유월의 라일락

 

초여름볕이 창문으로 와락 쏟아졌다.

왼쪽 창가는 눈을 반만 뜰 수 있는 자리였다. 얇은 창으로 어쩌지 못하는 햇살이었으나 더울 만큼은 아니었다. 아직 비스듬한 오전의 해가 오히려 느즈막한 봄기운을 풍겼다.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나른함이 흐느적 올라타 어깨를 부대는 것이었다. 졸음을 피해 창문에 고개를 바짝 댔다. 자욱한 물때 건너편으로도 하늘이 시렸다. 하지(夏至)의 태양은 명도(明度)의 지렛대를 끝까지 당기고 있었다.

강남행 간선버스는 더없이 한산했다. 어느덧 버스가 한강에 임박했다. 어차피 쓸모없어진 창문을 여니 이 계절 평균보다는 습한, 한강 유역에 적(籍)을 둔 국지(局地)풍이 느껴졌다. 동부이촌동을 고가로 지나와 바로 동작대교였다.

 

 

잘 지은 다리다.

 

길이 1,330미터, 40m 폭의 철도를 복선으로 냈고, 양측에 편도 3차로 도로가 있다. 하늘색 트러스가 경쾌하다. 삼십오 년 전 삼우(三隅)건설 과장으로 옮겨와 현장 부소장으로 처음 지은 것이다. 철도교는 랭거 아치로, 도로교는 철근 콘크리트 슬래브와 강상판으로 지어야 합니다. 교통부 공무원들이 동석한 회의에서 떠들었다가 소장에게 정강이를 차였었다. 당신 주제를 알고 얘기해. 현장소장은 상무였고, 그룹 회장의 아들이었고,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다. 소장은 착공식 때만 얼굴을 비췄다. 서른 둘, 내근만 하다 처음 현장으로 왔을 때였다. 공삿밥을 나보다 수십 년은 더 먹은 십장(什長)들과 씨름하며 지었다. 어찌어찌, 안 무너졌다.

그때는 평생 현장소장으로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어찌, 그렇게 살았다. 어깨를 틀어 오른쪽을 보면 파란 강물이 여의도를 비껴 흐른다. 아직 강물이 하늘빛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장마가 지면 누런 탁류(濁流)가 될 것이다.

강변 도로가를 죄 아카시아가 차지했는데 구석에 아직 라일락이 한 포기 남아 있었다. 곧 사라지겠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젊은 날의 추억’이던가, 맞다면, 아내가 알려준 수많은 꽃이름과 꽃말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머리에 남아있는 것이다. 미안하게도 나는 꽃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것만은 외우셔, 라고 했었다. 왜? 내가 좋아하니까. 웃음 나는 낡은 이야기다. 내 기억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라일락이 완전히 밀려난다는 것이다.

 

그런 계절이다.

 

머리를 기댔다. 눈꺼풀이 감겨들었다. 라일락보다 갑절은 진한 보랏빛이 눈앞에 뜨였다.

 

 


꼭 그러라는 법은

 

“팔순 구순 깨끗하게 살다가 가는 노인들도 많은데…”

“네, 뭐. 그런데 다 그러시지는 못하니까요.”

 

그것도 초여름이었다. 외래진료실을 나오며 아내의 머리를 껴안았다. 얄궂게 맑은 날이었다. 아프도록 따가운 햇빛이 그 작고 희끗한 머리를 겨누는 듯 했다.

 

“엄마 요양원 모시죠.”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야기를 꺼냈다.

 

“시설도 좋은 곳 많고, 간병인들도 요새는 함부로 안 뽑아요. 알아보니까 파주에 있는 데는 독실에 전담 의사 선생이 붙는대요.”

 

입은 아들이 열었지만, 이것은 며느리의 말투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어. 아직 초기라잖아.”

“아버지, 지금은 몰라도 가면 갈수록 심해져요.”

“두 말 말아라. 가족은 한 데서 사는 거라.”

“꼭 그러라는 법은 없는 거잖아요.”

 

사족은 아들의 것이었다. 어쩌면 네가 더하냐.

 

“소현 에미 불러와라.”

 

요양원은 안 된다, 할 수 있을 만큼은 하는 거다, 그래 너희들 힘들어질 것 안다, 그런데 벌써 이러는 것 아니다, 대신 내가 어떻게 해 보마, 집사람 밤낮으로 내가 볼 거다, 약값이고 병원비는 내가 알아서 한다… 가 조건이었다. 물론 며느리가 내건 것도 아들이 요구한 것도 아니다. 병구완할 돈을 감당하겠다는 말은 며느리부터가 말렸다. 퇴직 이후 수입이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다만 단단히 해 놓으려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또 하나 참은 것은, 이 집 너희 돈으로 했느냐, 였다. 잘 참았다. 겨우 남아있는 이 집 한 채는 아들 내외가 달래서 마련한 집이 아니다. 명의를 아들에게 먼저 옮겨놓고 통보한 것이다. 재작년 며느리 카페를 차리는 데 오천만 원, 그 가게가 망해서 고스란히 은행에 들어간 빚이 또 오천만 원. 그러고 나서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집 한 채에 앉혀놓은 것이다. 물론 이 집을 사는 데도 돈은 들어갔다. 이렇게 평생 모은 돈이 사라졌다.

 

내 탓이려니 한다. 공사판에서 평생을 보낸 까닭이다. 건설회사는 철근 하나, 못 하나에 값을 매기지 않는다. 땅을 오 미터만 파고도, 십 미터를 팠는데 비가 와서 오 미터가 도로 덮였다고 공갈을 쳐도 십 미터 삽질한 삯을 준다. 아파트 단지 하나에 기십 기백억을 다루는 현장에 나가다 보면 주머니 속 만 원, 십만 원에 둔해진다. 술값은 언제나 앞장서서 내던 기억이, 삼사십 대 내내 있다.

 

 

이 성질을 못 바꾼다면 아들은 다르길 바랐다. 아들은 외국계 주류회사 경영기획실에 취직했다. 외국계 회사라 레이오프(해고)가 쉽다고 해 걱정했지만, 내심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술 다루는 회사이니, 병뚜껑 하나에 얼마, 이렇게 꼼꼼히 셈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의 씀씀이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많은 것을 해 줬다고 생각했다. 딴에는, 고맙게 여길 거라는 기대도 했었다. 그렇지만,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가끔 쨍하게 화창한 날이면 아내는 예전으로 돌아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 라고 읊조리고는 했다. 그 반짝이는 눈을 보면 단념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만 같은 눈이었다. 그런 일상이라면, 그래서 종종 올 그런 맑은 날을 기다릴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어쩐지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이 지나고부터 아내의 상태는 무섭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파르게 기억을 잃어갔다. 어제 일이 사라졌고, 일주일 전 일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육십 대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다. 그 다음 며칠 동안은 마흔 다섯인 양 행동했고, 또 언제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삼십 대가 되었다. 젊은 시절 외근이 잦던 내가 돌아오면 저녁을 차린다며 주방을 엉망으로 어질러놓기 일쑤였다. 차례대로 벽이 내려앉듯 그녀가 살아온 나날이 흩어져 없어졌다.

 

 

기억은 – 아직 – 성인 때의 것이었으나 다른 것은 아이와 같았다. 거의 모든 지각이 희미해졌다. 밥 먹은 것도, 물을 마신 것도 돌아서면 잊었다. 식사를 하고 삼십 분도 안 되어 밥을 달라고 떼를 썼다. 하루 종일 봤던 드라마를 돌려 보거나, 집안의 누군가와 마주치면 신경질을 퍼부었다. 안방에서 아내가 사라져 찾아보면 주방에서 무언가를 퍼먹거나 물병을 꺼내놓고 들이마셨다. 그나마 집을 맘대로 나가서 온 가족이 동네를 돌아다녀야 하는 일은 없었다. 안 그래도 사십 년을 전업주부였던 사람이었다.

 

 

한번은 손녀가 감기에 걸렸다. 아이가 하루 종일 누워 기진맥진하자 아내는 줄곧 혼잣말을 반복했다. ‘체해서 그래 어쩌누’. 결국 손을 따 준다며 양 엄지손톱을 온통 까맣게 만들었다. 장을 보고 돌아온 며느리는 손에 핏방울 범벅이 돼 울고 있는 딸과, 그제까지 팔목을 붙잡고 손을 따는 시어미를 보고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부터 아내는 집 안방과 화장실의 위치도 떠올리지 못했다. 밤마다 화장실을 찾으려 모든 방의 불을 다 켜 식구들을 깨우기 일쑤였다. 더러는 아들 내외의 방에 소변을 보기도 했다. 육 개월 동안 이런 일들을 숱하게 겪어야 했다.

 

 

아들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남은 삶이 모조리 수발과 간병으로 채워질 것이었다. 나는 이미 지쳤고, 자신이 없었다. 나도 요양원이라는 곳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그러나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

 

 

 

편집자 ㅣ 단편 유월의 라일락은 上,中,下로 나누어 금, 화, 금에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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