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라일락 – 上 (http://2-um.kr/archives/5735)

 


 

무엇이 바뀌었는지

 

졸았어도 잘, 내린 것 같다. 벌써 열한 시였다. 여름 하루는 길지만 넋 놓으면 무엇이든 짧다. 일화(一化)빌딩이랬다. 근처를 몇 바퀴 돌아도 잘 띄지 않았다. 뭔가 또 변하고 없어지고 새로 들어섰다. 분명 잘 아는 동네였다. 삼우건설 서울 출장소가 근방이었다. 보자, 옆에 아파트가 하나 있었는데 없어진 것 같다. 도로명을 물어물어 찾았다.

아내를 수발하려면 수입이 필요했다. 무명의 작은 건축 사무실에 자격증을 빌려주기 시작한 것이 꼭 일 년 전부터다. 아무리 소규모라도 건설사가 건축 허가를 받으려면 건축기사 자격증을 가진 직원이 여럿 필요하다. 큰 규모의 공사를 하려면 할수록 그 수는 늘어난다. 그런 이유로 이 회사 직원 명부에 이름만 걸어 놓고 얼마를 받는 것이다. 예전엔 꽤 돈이 되는 일이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한 달에 이십만 원 짜리가 됐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와이프는 어쩌고 주말에 나와 있나 그래?”

“저희 일에 주말이 없잖아요. 번거로우시겠습니다. 우편으로 보내주셔도 되는데요.”

“나는 우편이 더 번거롭네. 좋지 뭐, 가끔 이렇게 강남도 나오고.”

사무실 대표는 오래 전부터 바둑으로 친했던 박씨의 아들이었다. 삼 년 전 혼자 시작한 회사가 지금은 직원이 열 명, 물론 서류상으로는 나를 포함해 스물다섯이라고 했다. 업계에서 내실이 있기로 이름이 꽤 알려져 있다고도 했다. 실상은 자격증도 없는 ‘야매’들로 그때그때 일감을 때우는 누더기 같은 관행 투성이로 보였다. 지금 발주 받은 현장만 여섯 군뎁니다, 호기는 좋으나 ‘선배’가 보기에는 걱정도 일었다. 그러나 피차 상관없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적에도 비슷한 일은 많았다.

박 대표는 아무튼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주말도, 퇴근도 없이 일하는 것에 옛날의 내가 겹쳤다. 집에 들어가는 일이 잘 없어 아내와 소원한 눈치였다. 이것도 나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또 나처럼 몇 차례의 외도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 보기에는 하얀 얼굴이라 샌님 같았는데, 부하에게 지시하는 것을 들어보니 젊은이치고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조금 해 보니 그는 까마득한 대학 후배였다. 선배로서는 민망한 일을 부탁해 만났음에도 나를 깍듯이 대했다. 더욱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용돈벌이로 이런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늙은 기사들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인사를 받아본 것은 대단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공사현장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경례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군대나 다름없는 수직적인 업계다. 회삿돈 수백억이 들어가는 건설현장에서 소장은 회사의 유일한 대리인이었고, 곧 군림할 수 있었다. 경비원부터 함바집 아줌마, 하청업체 사장, 때로는 부시장급 공무원까지 다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자리였다. 배우가 커튼콜을, 가수가 앙코르를 받을 때 느끼듯 무대와 같은 쾌감이 있었다. 솔직하자면 군대를 사열하는 사단장의 기분을 느낀 것이리라. 하이바를 쓰고 남색 작업복을 착용하는 간부들은 여럿이었지만, 지휘봉을 쥐는 것은 현장소장 하나였다. 지금은 돌아올 수 없는 권위다.

이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오늘과의 괴리에 비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책상 곳곳에 놓인 도면이나 책자, 현장 사진을 보노라면 현장 생각이 동했다. 그 살아있는 느낌, 활기, 정력이 간절했다. 덤프트럭과 레미콘이 굴러다니는 공사장은 시끄러웠고, 우리는 언제나 크게 전달하고 크게 대답했다. 사고 없이 공기(工期)를 육 개월 단축해 준공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다. 서른둘부터 쉰다섯까지 그렇게 살았다. 항상 바삐 뛰어다니고 모든 것을 쏟아내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그럴 수 있을 때 일을 그만두었다. 정확히는 나가야 했던 것이다. 성수동 달동네 재개발 건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서였다. 회사가 보유 현금 절반을 투입한 큰 투자였고, 충돌 없이 철거민과 협상을 끝내고 부지를 확보한 것이다. 회장은 곧 사장직을 약속했고, 모두들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 그룹 계열사가 분리되며 없던 일이 됐다. 사장이 된 것은 다른 계열사에서 이십 년을 보내고 돌아온, 그때 그 동작대교 현장소장이었다.

“내가 뭐, 해볼 만 한 일은 없나?”

“어휴, 아닙니다. 거의 다 잡무라… 선배님이 하실 일이 아니에요.”

넌지시 농담을 던지면 대표는 매양 웃으면서도 단호했다. 젊은 사람들이 다 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예의바른 후배의 역할 이상을 하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든지, 오 분 이상 얘기를 나누든지. 그럴 시간도 없어 보이는 인물이기는 했다.

“뭐 관리라든지, 자재 다루는 거나 검수, 측량, 다 할 줄 아니까…”

“요새랑 선배님 일하실 때랑 많이 다를 겁니다.”

“아니 노가다판 일이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뭔가.”

“다 컴퓨터 써서 하고 이제는 그렇습니다.”

“컴퓨터는… 이 사람아, 자네 건축개론 가르친 교수가 내가 졸업할 때 들어온 74학번 후배 놈이야. 나 은퇴한 지 겨우 십오 년일세. 반포에 문정아파트도 내가 현장소장으로 지은 거고, 태평데파트(백화점)는 설계도 했다구. 서울시내에 내 손 닿은 것만 수두룩한데 무슨…”

“저희 직원들이 다 젊어서 부담스러워합니다. 옛날처럼 현장소장이 왕이 아니에요.”

“….”

“그리고 현장소장이라고 안 합니다.”

“현장소장을 소장이라고 하지 그럼…”

“현장대리인으로 불러요. 원래도 서류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까.”

칠십 노인의 처지를, 잠깐 잊고 있었다. 노인은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르니 노인인 것이다.

“그래…, 이번에는 어딘가.”

“논현동 빌라인데요, 오 층짜립니다. 선배님 이름이 현장책임자로 올라가는 겁니다. 바로 공사만 들어가면 돼요.”

대표는 놀랍도록 태연한 인물이었다. 나 같았다면 다시 오지 마시라고 했을 것이나,

“들어가십시오. 이번에는 책임자로 되어 있어서 오십만 원입니다. 바로 입금 해 드릴게요.”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13-34 다세대주택]

[현장대리인 김흥섭]

자격증과 교환하듯 서류를 받아들었다. 오랫동안 진짜 직함이었던 ‘현장대리인’은 지금은 가짜 직함이었다.

다시 동작대교를 건널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니까요

 

당연히,

아들 내외는 찬성했다. 내가 태도를 달리했으니 놀랄 법도 한데,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 했다. 며느리는 어머님을 모시고 여러 군데를 가 보자고 했다. 유배당할 곳 답사를 시키자니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마지막 배려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마고 말을 그만두었다. 열흘 동안 서울 근교의 요양병원 대여섯 군데를 다녔다.

강행군이라면 강행군인데 아내는 통 불만이 없었다. 문제는 말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흔한 ‘여기가 어디야’ 같은 말도 전혀 뱉질 않았다. 혼잣말도 없었다. 요양원을 향하는 동안, 집에 오는 동안, 또는 요양원을 구경하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붙여도 응, 하고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어딘가로 초점을 흩뜨리곤 했다. 다만,

맘에 들어?

라고 물으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열나흘 동안 아내는 전에 없이 차분해졌다. 천진난만한 것도 아니고,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것도 아닌 것이라 우리는 모두 찜찜했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하루가 머다 하고 말썽을 피워 고되기만 했는데, 이제는 아내가 가만히 있어 문제였다.

엄마가 삐졌나 봐요, 가는 것 알고.

그쯤 되자 아들이 농담을 했다. 아닐 거다, 신혼 때도 둔한 여자였다고 대꾸했지만, 정말 그랬나. 잘 모르겠다. 며느리는 마지막으로 파주에 있는 요양병원을 가자고 했다. 혼자 쓰는데다 전담 선생이 붙어준다는 거기였다. 아들 내외가 일 년 전부터 별러놓은 곳이었다.

병원은 신도시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며느리의 얘기대로 썩 근사한 곳이었는데, 5km 전부터 이정표를 만들어놓았다. 여섯 층짜리 건물 다섯 동이 모였고, 가운데 잔디밭이 있었다. 건물마다 [5년 연속 적정성평가 1등급]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아내는 어디를 온 것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입을 벌리며 둘러보기만 했다.

온 김에 병실을 구경했다. 십 년 되었다는 병원의 연식과 다르게 집기며 시설이 아주 깨끗했다. 아내는 침상에 앉아보기도 하고, 옷장을 활짝 열어보기도 했다. 물론 열어보기만 하지 닫을 줄은 몰라서 며느리가 쫓아다니며 뒤처리를 해야 했다. 그러다 아내가 다시 침상에 앉았다. 아까는 걸터앉더니 이제는 눕다시피 했다. 가만 보니 침상 건너편에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문이 있었다. 그 너머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참이었다. 그리고

좋네.

병실을 나오자 아까 못 보았던 표지가 보였다. [배회로]. 여느 병원처럼 생긴, 복도를 가운데로 양 옆에 병실 여럿이 있는 그 통로의 이름이 배회로였다. 한껏 표정이 밝아진 아들 내외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의 아내를 보며 생각했다. 아내는 이제 몇 년 동안이나 이 아득한 복도를 그저, 배회할 것인가.

“아이구, 보증금 오백만 원에 한 달 백만 원이면 다른 데 두 배는 되네.”

“어머님이 좋다는데 그 정도야.”

나도, 아들도, 며느리도, ‘좋네’ 한 마디에 한결 죄책감을 던 기분이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내친 김에 가계약금 오십만 원을 줬다. 나흘 뒤 보증금을 완납하기로 했다. 입원은 그 돈을 내는 날 곧장 할 수 있었다. 선금은 내가 냈다. 마침 생겼던, 이제 아내에게 쓸 일도 없는 돈이었다. 이십오 년 동안, 그리고 퇴직하고도 십오 년 동안 자랑으로 삼았던 ‘현장소장’ 아니 ‘현장대리인’이라는 이름은 이제 아내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는 데 쓰이고 있었다. 서울에서 처절하게 보낸 그 사십 년이 목적지 없이 파주 외곽에서 배회하는 듯 했다.

곧 칠월인데도 저녁이 되니 퍽 쌀쌀했다. 얼른 차에 타려고 보니 2층에 불 켜진 병실 창문이 보였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모양으로 보아 아까 아내가 앉았던 그곳인 듯 했다. 그 창 너머로 곧장 보이는 화단에 눈에 익은 연보랏빛이 비쳤다. 그것은 몇 가닥 삐져나온

라일락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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