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라일락 上 – http://2-um.kr/archives/5735

유월의 라일락 中 – http://2-um.kr/archives/5742

 

 


 

인터미션

 

며느리가 지금은 쓰지 않는 19인치짜리 캐리어에 모든 것을 담았다. 집에 남긴 것이 당연히 더 많았지만, 아내의 육십구 년에 필요했던, 그리고 이제 ‘입원’한 순간부터 필요할 물건들은 전부 그것뿐이었다. 가방을 방구석에 밀어 넣었다. 누웠다. 아내와의 마지막 동침일 것이다. 혹여나 꿈에서 “여보, 나 요양원 보낼 거야?”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픽 웃었다. 웃은 기억이 마지막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생은

 

전화벨이 끊어질 때 쯤 눈을 떴다. 잠결에 시계를 찾다가 오줌통을 쏟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아내가 화장실을 못 찾으며 오줌을 지리는 일이 잦아질 무렵부터 들여놓은 것이다. 새벽에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면 덩달아 깨어 소변을 거든다. 여느 날처럼 소변을 놓아준 뒤 잠든 다음이었다.

 

소변을 닦고 치우느라 잠이 다 깼다. 다행히 아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것까지 보아두고서 전화통을 확인했다. 박 대표였다.

 

“아니 뭔가. 전화를 이 시간에 하면…”

“선배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오늘 시에서 감사가 나옵니다. 누가 신고를 한 모양이에요.”

 

그것 때문이구나. 그래, 아무래도 수상한 회사였다. 그렇게 일을 벌려놓고 탈이 안 날 리가 있나. 누군가 신고했든 하지 않았든 언젠가는 들통 날 일이었다. 입을 막거나 뒤를 봐줄 사람을 찾는 것이겠지.

 

“나도 지금 시청 건축과에 아는 사람이 없네, 동문회에 연락해 보는 게 나을 걸.”

“논현동 현장입니다. 선배님이 진짜 현장대리인을 해 주시면 됩니다.”

 

예상보다 두 걸음은 더 나간 제안이었다. 하기는 내가 정말 현장에 나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서류상으로 책임자는 내가 아닌가. 원로급 인물이 현직에 가끔 나오는 것이 드물지만 있기는 있는 일이다. 물론 이렇게 이름만 걸어놓고 사기를 치는 일이 더 잦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이제 무슨 소용인가.

 

“젊은 사람들끼리 허게. 늙은이가 가서 뭐 하겠어.”

“의지가 있으시잖아요. 그동안 해 오셨던 대로 하시면.”

“그동안은 무슨 그동안인가 퇴직한 게 언제 적 일인데.”

“그럼 하루면 됩니다. 딱 하루만 해 주시면 됩니다. 연극한다고 생각하세요. 선배님만 오시면 됩니다. 저희가 이번 현장책임자에게 주는 돈이 오백만 원입니다.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그 망신을 주고 지금 이게 뭐 하는 건가?”

 

박 대표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날 밝으면 동문회 전화나 돌려보게. 서울시청에 H대 건축과 많아.”

 

전화기를 놓고 책상에 앉았다. 나흘 전에 쓰다 만 가계부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온통 아내에게 들어가는 비용들이었다. 한 쪽을 넘겨 빈 책장에 ‘5,000,000’을 썼다. 한 획마다 책상이 흔들렸다. 다리 나사가 금방 헐거워지는 싸구려였다. 두 줄을 그어 숫자를 지웠다.

 

“어디로 자꾸 가.”

“병원 가야지. 병원 가서 약 타 와야 낫지.”

“아픈 데 없는데 왜 약을 타 와. 나는 가기 싫어…”

 

 

참, 웃기는 일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오갈 때마다 길바닥에서 ‘어디를 가냐며’ 아내와 실랑이했던 일이 떠올랐다. 어디를 자꾸 가느냐, 병원에 간다, 병원에 가기 싫다. 또 얼마 있다가는 어디로 자꾸 가냐… 의미가 없는 대화를 도돌이표 그리듯 했다. 그러면 더러는 이 정신 나간 노인네야, 하고 벌컥 화를 내고는 했던 것이다. 통원에는 버스와 도보를 합쳐 삼십 분이면 너끈했지만, 진료가 점심 때 끝나도 집에 오면 저녁이 되고는 했다. 이 돈이 있었으면 그냥 우격다짐 택시를 태웠을 것이다.

 

일출이 조금 남았다. 진보랏빛 어둠이 걷히는 시간이었다. 구름이 드문 하늘은 유독 높아 보인다. 하얀 빛이 점처럼 눈에 뜨인다. 인공위성일 것이다. 아니 샛별일지도 모른다. 이 시간에 샛별이 서쪽 하늘에 뜨던가, 아니 동쪽인가. 문득 지금껏 살아온 칠십 여년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들어봤자 나침반 없이는 방위를 모르는 것이다.

 

한때 마천루 현장을 지휘하는 상상을 했었다. 땅바닥에서 보면 건물이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건물을 짓고 싶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평생 올려다보며 살았는가, 한다. 그 잡상을 뚫고 하늘에서 공기가 내린다. 알고 보면 맑은 날에도 무언가는 떨어진다. 내민 얼굴이 지표보다 먼저 그 서늘함을 만난다. 그러나 곧 해가 뜨고 땅이 달구어질 것이다. 뭇 상쾌한 기분의 유통기한이다. 아직은 쾌(快)한 나날, 그것은 어느새 다가온 눅진한 계절의 마중물이기도 하다. 장마가 지고 여름의 색은 시나브로 갈맷빛으로 변할 것이다.

 

장년을 넘어서면 인생의 갈피를 잡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더럭 깨닫는다. 새벽에 전화를 받은 사람은 또 있었다.

 

 

꽃 핀 자리

 

무사히 연극을 끝냈다.

아들이 실직했다. 회사가 한국 시장 전면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미국 이사회에서 서울 지사 모두의 ‘레이오프’를 결정했고, 퇴직금 정산 기간 14일을 부여한다고 통보했다. 말일, 곧 오늘로 예정되었던 월급 지급은 정지되었다. 일이 이리되자 아내의 요양병원행은 어려워졌다. 보증금 잔금은 뒤로 미루어졌기 때문이다. 모아놓은 돈은, 일전에 며느리가 접은 카페에 다 부어놓은 다음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몇 가닥 남은 꽃이라도 가져야 했다.

 

“오백만 원이랬지, 오늘 바로 들어오나?”

 

박 대표에게 다시 전화했을 때, 그는 다른 말 않고 집 앞으로 차를 보냈다. 퇴직하기 전에도 받아본 적 없는 ‘대접’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짧은 브리핑과 함께 작업복과 헬멧을 건넸다.

 

“선배님, 오늘 고맙습니다.”

“뭘. 너무 옛날 사람처럼 안 굴었는가 모르겠어.”

“아닙니다, 아까 시청에서 전화 왔는데 모범사례래요. 은퇴하신 분이 작은 현장에 와서 경험 살린다고….”

 

박 대표가 단 둘이 뒤풀이를 권했다. 오랜만의 권주에 마음이 동해 따라간 논현동의 바(BAR)에서 그는 짐작대로의 얘기를 했다. 부인과 대화한 지가 오래된 모양이었고, 육 개월 쯤 전부터 일주일에 사나흘은 친정에 있다고 했다. 어차피 본인이 집에 잘 들어가지 못하니 집에 있으나 친정에 있으나 의미가 없고, 이미 벼랑 끝이라고, 스스로의 결혼생활을 평가했다. 주제가 기왕 거기로 흐를 것이라면 할 말이 많았다. 술이 들어간 김이었다.

 

“사랑하는 거야?”

“잘 모르겠네요.”

“자네 오늘, 나를 아주 극진히 대접하더구먼. 저번 주하고는 아주 딴 판이야.”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아니고. 박 대표, 사랑이 대접이랑 다른 게 뭔 지 아나?”

“네?”

“대접은, 내 입장에서 그 사람을 편하게 하는 거. 사랑은, 그 사람 입장에서 그이를 편하게 하는 거… 늙은이가 이런 ‘빠’에 오니까 불편해 죽겠다고. 비싼 술 먹고 좋은데, 자네는 대접이었지? 이 블랙라벨 위스키, 이거 만든 회사에서 오늘 우리 아들내미가 잘렸어. 있지, 여기 옆에 뒷고기 잘 하는 집이 하나 있어. 거기서 대포나 한 잔 하자고. 나는 거기가 세상에서 제일 편해.”

 

 

박 대표는 알아들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나를 사랑하면 대포 마시러 가자 이거야!”

 

자리를 옮겼다. 있는 조언 없는 충고를 다 끌어다 얹고, 얘기가 너무 박했나 싶어 위로를 건네니 박 대표는 취중에 눈시울까지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외도는 감히 생각도 않았고, 아내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다. 불콰해진 술상에서 박 대표는 물었다.

 

“그런데 왜 다시 전화하셨습니까?”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다.

 

“그럼 사모님 요양원 보내시려고 오늘 오신 겁니까…”

 

술이 확 깨는 듯 했다. 연보라 꽃 핀 자리라도 선물하겠다는 것, 다시 생각하니 변명이었다. 결혼 이후 아내에게 상처만 준 시절을 떠올리니 부끄러웠다. 아내는 항상 저녁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다 잠들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아랑곳 않았었다. 술을 먹고 늦든, 다른 여자와 동침하든 했다. 그 기억이 틈입하니 견디기 어려웠다.

 

“나한테 결혼생활 상담한 거, 잘못 생각했지?”

 

뜻밖의 이유로 술자리가 일찍 파했다. 택시를 탔다. 밤풍경을 볼 틈도 없이 잠들려는데, 며느리에게 전화가 왔다.

 

“어, 소현 에미냐. 통장 확인했다. 돈 들어왔어. 내일 병원 들어간다고 얘기하면 될 거다. 소현 애비는? 오늘 어디 가서 공연한 짓 안 하게 같이 좀 있고.”

“네, 지금 자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아버님…”

“응?”

“오늘 어머님 생신이래요. 알고 계셨어요?”

 

 

택시가 대교로 오르는 고가도로 전 마지막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다리 넘어가지 말고 잠깐만 빠집시다.”

 

 

봄꽃 지고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일주일 전 버스 안에서 분명 보았는데, 그 자린데. 강변에 내려 라일락을 찾았지만 꽃은 이미 지고 없었다. 하기는 유월 말에 라일락을 찾는 미친놈이 어디 있나. 알고 보면 정신 나간 노인네는 아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니 열 시였다. 아내는 저녁상 앞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아내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 열 시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이 조금 일찍 끝났어. 당신 오늘…”

“요즘 현장 한창 바쁘다며. 잠도 거기서 자야 한다더니. 소장이랑은 안 싸우는 거야? 무슨 강상판이랑 랭거아친가 뭔가 잘난 척 했다가 쪼인트 까였다더니, 흐흐. 한강에 다리 짓는 거 얼마나 근사해. 일부러 일찍 들어오려고 하지 말아요.”

“…….”

“당신 일 덜 바빠지면 어디루 대포나 마시러 갈까요?”

 

비가 이제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온 뒤 오후

 

붙들린 손이 이제는 나를 붙들고 있었다. 아내는 자꾸 뒤로 나를 잡아끌었다.

 

“자꾸 어디루 가는 거야.”

“병원 가지 어디로 가.”

“병원? 무슨 병원, 나 아픈 데 없는데.”

“허허, 맞아. 당신 아픈 데 하나도 없지… 그렇게 가기가 싫우?”

“아픈 데 없으니까 가기 싫지. 괜히.”

“그래, 가지 말자고.”

“참말로?”

“그래… 여보, 저기 저것 좀 봐. 저게 나팔꽃인가?”

“아니야. 저건 메꽃이야. 쩌 옆에 있는 저게 나팔꽃이야.”

“저건 꽃말이 뭐람.”

“기쁜 소식.”

“저거는 뭐야?”

“루드베키아? 영원한 행복.”

“라일락은 안 보이나 왜?”

“바보야, 라일락은 여름에 안 핀댔잖아. 사월에 피어서 오월에 다 진단 말이야.”

“그런가? 몰랐네.”

“라일락 꽃말이 뭐라구 했어.”

“음, ‘젊은 날의 추억.’”

“맞네! 어쩜 그거 하나는 외워요?”

 

 

글쎄,

“당신이 좋아하니까.”

 

 

 

남은 계절에도 꽃은 계속 피어날 것이었다. ■  (完)

 

 

 

유월의 라일락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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