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포드가 1907년에 설립한 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벨트는 노동을 보조하는 과거의 소박한 도구가 아니라 노동 과정을 새롭게 조직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테일러주의로 불린다. 작업 과정의 모든 동작을 초 시간 단위로 측정해 단순반복 작업을 표준화함으로써 기술 지식과 숙련이라는 노동자 자율성의 원천을 제거하고자 했던 프레데릭 테일러의 정신이 포드 공장의 컨베이어 라인에 구현됐다.

 

하지만 생산 과정에서 주도성을 완전히 박탈당한 노동자는 생산성 개선에 기여할 동기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 동기마저 떨어지는 법이다. 생산직 노동자를 포드주의 대량생산-대량소비 시스템에 통합하기 위해 자본은 그들에게 고용 안정 및 시장 임금보다 높은 생산성 임금을 보장했다. 이렇게 해서 전후 황금기의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포드주의 노사타협 모델이 수립됐다.

 

이 타협은 독일, 일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수익률 하락에 직면한 미국 제조업이 1970년대에 노조 압박, 국내 생산투자 회피 등의 대응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붕괴의 길로 나갔다. 포드주의를 대신한 린(lean) 생산 방식은 이름 그대로 생산과 판매 전체 과정에서 모든 군살을 제거하고자 했다. 여분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생산설비는 최소 상태로 가져가려면 핵심 부문 이외의 영역을 최대한 외주화(아웃소싱)해야 했다. 외주화는 파견 노동 같은 외부노동 유연화 제도를 요구했다.

 


한국에서는 린 모델이 1990년대부터 기지개를 켰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한국 경제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998년 제정되고 시행된 파견법은 20년의 역사 속에서 파견 양산법이 되었다. 산업단지의 중소기업 태반이 파견 노동자를 쓰고 그 태반이 사실상 불법 파견이다. 잠을 자지 않는 컨베이어벨트는 파견법과 합작해 주야 맞교대 노동을 정착시켰다. 원청기업의 주문이 몰리는 기간에는 회전 속도를 인간 노동의 한계 지점까지 높인다. 노동을 컨베이어벨트의 완력과 속도에 맞춘다는 것은 불면증, 근골격계 질환, 소화불량을 달고 산다는 의미다. 포털 사이트에 ‘컨베이어벨트 사망’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보라. 끝없는 노동자 죽음의 행렬이 이어진다.

 

지난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은 24살 청년 노동자 김용균씨의 목숨을 앗아간 자본 설비도 컨베이어벨트다. 설비 운전이라는 핵심 업무를 담당했음에도 그는 발전소의 직원이 아니었다. 발전소의 설비 운전을 통째로 도급받은 한국발전기술이라는 하청업체의 1년 계약 비정규직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불법파견 문제를 우회하는 외주화 방식의 발전 공기업 민영화, 1년 단위로 비정규직 신분을 갱신하는 기간제, 최저임금 말고는 어떤 노동법적 방어 수단도 박탈당한 노동자에게 오롯이 전가된 위험이라는, 한국 신자유주의 불안정 노동체제의 모든 악덕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이 비극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0일에는 한 영업용 택시 노동자가 카카오의 카풀 서비스 금지를 요구하며 분신해 사망했다. 카카오는 한 명의 고용 노동자도 없이 한 대의 자동차 자산도 없이 승차 서비스를 조직한다. 린 플랫폼 사업자는 자신들이 공유상품이 거래될 수 있는 디지털 장터만 제공할 뿐이므로 사용자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 공유상품은 플랫폼을 통해서만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기에 린 플랫폼은 ‘디지털 컨베이어벨트’를 소유한 사용자다.

 

컨베이어벨트는 20세기의 생산성 혁명을 이끈 기술이다. 그러나 그 설치와 운전이 얼마나 노동자에게 안전한가, 인간의 노동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운전되는가, 위기 상황에서 컨베이어벨트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자율성이 직접 이를 운전하는 노동자에게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컨베이어벨트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다. 린 플랫폼처럼 물리적 형태를 갖춘 컨베이어벨트가 사라지더라도,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이미 컨베이어 라인의 인간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했더라도, 사회적 구성물로서 컨베이어벨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갈 것이다. 김용균 노동자와 같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서는 컨베이어벨트의 소유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사용자 책임,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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