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에 한 번 꼬박꼬박 병원에 갑니다. 혈압 약 처방 받기 위해서요. 어제 보니 약이 달랑 한 알 있더군요. 긴급 사태입니다. 혈압환자는 약이 없으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른답니다.

냉큼 병원으로 갔어요. 다행히 화요일이네요. 제 담당 의사 선생님이 화, 목에만 진료를 하거든요. 시골 병원은 거의가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입니다. 제가 가는 곳은 종합병원인데도 예약을 따로 못 잡는 구조예요. 그래서 거의, 늘 한두 시간 넘게 어르신들 사이에서 제 순서를 하릴없이 기다려야 한답니다.

한데 이번엔 웬일이죠? 접수하고 내과로 가니 대기실에 아무도 없어요. 이 병원에 발걸음한 지 3년 가까이 됐는데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죠! 문득 병원 가는 길에 이 밭 저 밭에 양파 망 잔뜩 늘어선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제야 감이 옵니다.

‘다들 양파 일 하느라 병원에 못 오시는구나…’

오늘 비 온다니 그전에 마치느라 어제는 거의 모든 양파밭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넘쳤을 거예요. 다들 아파도 참고 일하셨을 테죠. 2년을 기다린 양파 수확을 위해서.

곧바로 의사선생님을 만났어요. 왠지 반가워하는 느낌이 들어요. 간단히 혈압 확인하고 대뜸 말씀하세요.

“어디 아픈 데 없어요?”

“네? 아, 없어요…”

순간, 그 말이 왜 그렇게 따뜻하게 다가오던지요. 전에는 혈압 샘한테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쑤신다고 하소연을 좀 했어요. 혈압 때문에 왔으면 그 이야기만 해야 할 텐데 말이죠.

실은 얼마 전에 위랑 대장 내시경을 했답니다. 올 초부턴가 배 어느 자리가 콕콕 쑤셨어요. 크게 아프진 않은데 한번 통증이 오면 엄청 신경이 쓰이더란 말이죠. 그렇게 몇 달 보내다가 ‘아픔’보단 ‘걱정’이 불쑥 커진 어느 날, 이른 아침부터 병원에 갔어요. 월요일이어서 제 담당이 아닌 다른 의사 샘한테 진료를 받았죠. 아, 그런데 위내시경 실에서 제 담당 혈압 샘을 만난 거예요!

“그동안 많이 아팠어요?”

침대에 누운 저한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네는데 어찌나 마음이 평온하고 안심이 되던지요. 그동안 비수면 위내시경은 몇 번 해봤어요. 딱히 겁먹거나 그렇진 않은데 어쨌든 시작 전에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죠.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내시경 중간 중간 “괜찮은데요” 말도 건네주고, 끝난 뒤에는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해주셨죠.

혈압 샘 말씀처럼 위에 별 탈은 없었어요. 누구나 있다는 염증 조금? 위에 문제가 없다니 대장까지 마저 들여다봐야만 속이 시원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무척이나 두렵기만 하던 대장내시경을 끝내 하고야 맙니다. 위내시경 하고 열흘쯤 뒤에.

새벽부터 마시고 싸고 하느라 기진맥진한 몸으로 대장내시경 실에 들어갔더니, 언뜻 혈압 샘이 보여요.

‘이번에도 샘이 해주시려나?’

대장내시경은 처음이라 겁이 많이 났어요. 약 먹었는데도 혈압이 높게 나와서 기분도 별로였고요. 그치만 혈압 샘 본 뒤부터 마음이 참 편안해졌어요. 무수한 종합병원 환자들 가운데 두 달에 한 번 찾아가는 저를 혈압 샘이 기억하기는 사실 쉽지 않을 거예요.

이번엔 일주일 사이로 위랑 대장까지 다 맡아 주셔서 그런가, 이번에는 왠지 저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건네는 듯했어요. “어디 아픈 데 없어요?”라던 혈압 샘의 따뜻한 목소리가 저한텐 이렇게 들리더라고요.

‘별일 아닐 거라고 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잖아요. 그렇게 걱정 많더니만 이젠 마음이 좀 괜찮아요? 하긴 내 눈으로 확인하니까 나부터 기분이 괜찮은 것도 같네요.다음에도 혈압 말고 아픈 데 있으면 꼭 말해요. 들어줄 테니까.’

꿈보다 해몽이죠, 뭐!

어제 받아온 약을 뜯으면서 혈압 샘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단정하게 고운 얼굴, 차분한 목소리, 10개월 동안 딱 한 번 보았던 환하게 웃는 모습까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편했던 (같은 여자라서 더 그랬을까요?) 혈압 샘을 생각하면서 책 한 권 펼쳐 봅니다.

<오늘도 괜찮지 않은 당신을 위한 반딧불 의원>이에요.

고마운 산골 손님들 가운데 의사 선생님이 한 분 있어요. 이 분을 만나면 술자리에서 저절로 건강 상담을 하게 되지 뭐예요. 그 덕분(?)인가 최근에 찾아올 땐 이 책을 들고 왔어요. 아는 분이 쓴 건데 저한테 꼭 권하고 싶은 이야기라면서요. 동네 환자들의 소소한 이야기와 은밀한 고백까지 하나하나 들어주는어느 비밀스러운 의사선생님 이야기예요. 독특한 건 밤에만 문을 연다는 것! (아, 물론 픽션입니다.)

고혈압부터 당뇨병, 위장병 등등 현대인들이 앓는 온갖 고질병을 안고 늦은 밤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의사 선생님. 모든 이야기들이 참 좋았어요. 내 마음까지도 위로받는 듯했죠. 이 책을 보는 순간은 혈압도 저절로 내려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술자리 건강 상담만으로도 제 마음에 이 책이 필요하다고 명 처방(?)을 해준 의사 선생님! 당신도 서울 어디선가 환자들의 몸을 그리고 마음까지도 보듬고 있을 테죠. 자기가 아프고 힘들었던 만큼 다른 이들의 아픔을 더 잘 들여다보고 돌봐주던 책 속 의사처럼요. 다음에 산골에서 만나면 지금보단 건강하고 단단한 모습 보여드릴게요. 제 마음 건강까지 마음써 준 당신한테 고마워서라도요.^^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는지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네요. 살다 보면 이런 날 저런 일 오락가락 다가오듯이 말이에요. 모두들 그럴 때 있으시죠? 그동안 잘못했던 일들이 밀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날.

‘그때 왜 그랬을까, 이땐 저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 싶을 만큼 제가 자주 웃으며 살지만 가끔은 울고 싶은 날도 있어요. 산골혜원은 캔디 발끝도 따라갈 수 없기에 외로워도 슬퍼도 눈물이 나면 그대로 흐르게 놔둔답니다. 눈도 씻어주고 마음까지 맑게 해주는 고마운 눈물, 비님이 다가오실 때처럼 언제든 고맙게 받아 안아요.

<오늘도 괜찮지 않은 당신을 위한 반딧불 의원>. 이 책을 오랜만에 꺼내들면서 어제도 괜찮지 않았고, 오늘도 괜찮지 않았을 어쩌면 내일도 괜찮지 않을 수 있을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어요.

‘오늘만 괜찮지 않은’ 산골혜원은 책을 읽으면서, 덮으면서 그 모든 분들한테 미안하기만 합니다. 그 가운데는 저로 인해 괜찮지 않은 하루를 힘겹게 보내야만 했던 분들도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많을지도 모르니까요.

“현대 의학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것이 아니기에 틈새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틈새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메우려는 노력을 해온 것이 의학의 역사이고 과학의 본질입니다.”

<반딧불 의원>에서 오늘 본 글귀인데요. 마음에 쏙 안기면서, 역시나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이렇게 바꿔 읽고 싶었어요.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틈새는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틈새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메우려는 노력을 해온 것이 사람의 역사이고 본질입니다.”

틈새가 많아도 너무 많은 제 어깨를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하고 이 글이 토닥토닥해 주네요. 글 앞에 두고서 ‘앞으로 틈새를 정성껏 메우며 살겠습니다!’ 다짐했답니다.

책 덕분에 기분이 스르르 풀어지니여지없이 노래 한 곡 떠오르네요. 마치 우리 혈압 샘처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딱 마음에 들었던 노래, ‘이건 나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야!’ 탄성이 절로 나왔던 노래, 기분파 성격 덕분에 뭔가 실수가 생겨도 그저 말없이 안아주던 노래, 안치환이 만들고 부른 ‘고백’.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허나 눈부신 새날 찾아 이 어둠을 헤치는 사람되어

나로부터 자유로운 내 이 작은 노래에 꿈을 실어

노래여~ 나의 생이여

노래여~ 내 젊은 청춘의 꿈이여

노래여~~~ ♪”

책 읽다 노래 부르고 하다 보니 괜찮지 않았던 이 하루가 어느새 저물고 있습니다. 왠지 내일은 괜찮은 날이 될 것도 같아요.

오늘 우산 들고 산골 원두막에 자주 걸어갔어요. 집안에서 어디론가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죠.

원두막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면 내 안에 있던 어떤 안타까움들이 빗물 따라 흘러가는 것만 같았어요.  이 밤도 여전히 제 마음 촉촉이 적셔 주는 비님께 슬며시 말을 걸어 봅니다.

 

오늘 하루 괜찮지 않았을 이들이 내일은 꼭 괜찮은 하루를 맞을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세요!

제 미안한 마음까지 비님 품속에 실어 보내니 부디 많은 이들에게 골고루 뿌려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참! 고구마랑 호박, 참외, 수박, 오이, 가지, 옥수수, 고추, 토마토, 양배추, 브로콜리, 비트, 도라지 또, 여하튼 밭에 있는 모든 농작물들이 비님께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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