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밀림이 따로 없네!”

해질 녘, 참으로 오랜만에 고구마 밭에 앉으니 탄성(인지 비명일지)가 불쑥 터집니다. 멀리서는 별거 아닌 듯 보이는데 가까이 앉아서 바라보면 매서운 여름풀이 제 앉은키랑 거의 비슷하거든요. 어떤 건 넘어서기도 하고요. 그동안 풀에 가려서, 얽혀서 숨 막혔을 고구마들한테 미안하고 또 미안하기만 합니다.

밀림을 헤쳐 나가는 기분으로 열심히 풀을 뽑았습니다. 아이고야, 뿌리가 너무 깊숙해서 가끔 고구마 뿌리마저 따라 나오네요.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밭을 매다 보니 갑자기 배가 고픕니다. 이럴 수가! 오늘 아침부터 오후까지 내내 입맛이 하나도 없었어요. 웬만해선 바로 살아날 것 같지 않았거든요. 갑자기 밀려든 허기를 참지 못하고 흙 묻은 일옷 채로 집에 들어가 허겁지겁 밥을 먹었습니다.

맨밥으로 먹어도 맛있고 달걀찜 남은 부스러기까지 왜 그렇게 맛나던지. 마지막 밥 한 숟갈 입에 넣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어요. 고구마한텐 많이 미안했지만, 그래도 풀 가득한 밭매기 덕분에 밥맛이 돌아온 것만 같았거든요.

‘시장보다 더 큰 반찬은 땀방울과 함께 흐르는 노동인 걸까? 그래, 역시 노동은 아름다워!’

밥상 치우고는 오늘만큼은 허리가 아파도 손목이 시큰거려도 깜깜해질 때까지 몸 부려야지, 단단히 마음먹고 다시 밭으로 나서던 순간, ‘주르륵 주르륵’ 비님이 오십니다. 산골혜원, 밭일 작심하는 날이 정말 어쩌다 한 번 찾아오는데요. 하늘도 무심한 건지, 고마운 건지 더 일하지 못하게끔 말리시네요.

 


참참참! 그러고 보니 오늘은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석날이네요. (물론 칠석은 음력으로 잡지만요, 그래도 ‘칠석’ 하면, ‘견우와 직녀’ 하면 7월 7일, 바로 오늘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아요.) 칠석을 맞이하여 예보에 없던 비님까지 나려 주시는데 이런 날, 이런 노래를 안 부를 수 없죠. 불후의 명곡 중에서도 명곡, ‘직녀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법. 이 노래, 저 노래 부르고 또 부릅니다.

그래 너희들은 알고 있었지

그날 흘린 눈물들이

오늘 이처럼 당당하게 일어선

우리들의 기쁨된 것을~♪

(‘그래 그것이 너희들의 사랑일 게야’_홍지연 글, 곡)

 

여보게 나에게 문을 열어 줄 수 없겠나

밤새 일하고 돌아온 노동자처럼

그대 안에서 쉬고 싶네~♪

(‘세상을 절망하던 날’_황광우 시, 이시연 곡)

사실 밥맛이 끈덕지게 없을 때도 이 노래들을 계속 불렀네요. 그러면 조금은 숨통이 트였거든요. 밥심 생긴 뒤에도 여전히 이 노래들을 부릅니다. 그러면 또 다른 힘이 샘솟았어요. 민중가요는 그런 힘이 있나 봐요. 여러 사람들한테 같은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노래. 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곧 여러 마음들을 그릴 수 있는 노래. 혼자 불러도 좋고 여럿과 나눌수록 더 좋은 노래.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노래는 연필로 쓰면서도 부르고, 청소할 때도 부르고, 학교 갈 때 올 때 부르고, 여하튼 노래라면 사족을 못 쓰고 살았어요. 민중가요를 몰랐던 그때도 친구들이 ‘뮤직박스’라고 불렀을 만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뭐, 거의 제 노래였어요. 글자랑은 다르게 노래는 어쩜 그렇게 머리에 잘 들어오던지 말예요.^^

하물며 1분여짜리 시엠송 여러 개를 모아 1시간 넘게 혼자 메들리를 만들기도 했어요. 그렇게 이어서 부르면, 순간 사라져버리는 시엠송도 멋진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거든요. 그러다가는 그 메들리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까지 해서 듣고 또 듣고 그랬다죠. 다 초등학교 때 이야긴데, 그때부터 이노무 기질이 시작된 거 같아요.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양에 안 차서 기록까지 남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오늘 온 마음 다해 힘든 자리를 버텨낸 당신, 이 글을 보면서 제 얼굴 슬며시 떠올리는 당신, 어느 날 산골에 찾아와 산골혜원 인생 노래책 <우리 시대의 노래> 두 권을 모조리 훑으며 함께 노래한 당신, 그리고… ‘세상을 절망하던 날’을 제 기타에 맞춰 같이 부르고 싶다던 당신. 네, 맞아요. 바로 그 모든 당신들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면서 부르고 또 부릅니다.

저는요, 오늘 흘린 당신의 눈물이 당신도 나도, 그리고 이 세상도 내일은 더 당당하게 일어설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어요. 당신도 그런 믿음을 안고서 오늘만큼은 푹 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몸은 쉬었어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아릿아릿 저리거들랑, 그대가 삶에 지친 어느 날 산골 텃밭에 잠시 머물면서 김매기라도 같이 해보면 어떨까요?

고구마 밭은 워낙 다급해서 며칠 사이에 다 매야 할 테지만 거기 말고도 풀은 엄청 많답니다. 같이 김매면서 마음 밭도 매 보고, 막걸리 넘기면서 상한 마음 어루만져도 주고 노래와 함께 세상살이도 나누다 보면 오늘 제가 겪었듯이 밥맛도 살 힘도 슬그머니 되돌아올지도 모르거든요. 찬찬히, 잔잔히 생각해 보시고요.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보다는 이 아픈 세상을 위해 힘겹게 수고해 주신 당신의 오늘 하루를, 저부터 잊지 않을게요. 고맙습니다, 모두들, 진심으로!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푹 쉬세요. 산골혜원의 인생 동지들 모두 부디 잘. 자.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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