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사거리, 철탑 위 둥지에서 쓴, 김용희 삼성해고노동자의 자작시 ‘인간새’를 읽었습니다.

 

“투쟁해온 24년의 세월속에서 인간새로 태어난 50일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글자까지 간신히 훑고 나서는 그 글을 얼른 닫아버렸습니다. 가슴이 턱 막히는 듯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시를 쓰는 중에 아내의 전화를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왠지 그 아내 분의 아픔까지 마구 타고 전해오는 바람에 그리도 힘이 들었나 싶기도 했습니다.

 

시를 본 뒤로 갑자기 배가 아파 와서 저녁을 먹지 못했습니다. 보통 땐 좀 아프다가 말곤 했는데 이번엔 좀 길게 가더군요. 뭔가 길을 찾아야 하는데, 찾고만 싶은데. 집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이 책 저 책을 배 부여잡고 하릴없이 만져 봅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습니다.


<이랜드 노동자 이야기-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항상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혜원동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황선영”

 

책을 열자마자 그리운 이름이 따스하게 저를 맞이합니다. ‘노동운동’의 ‘노’ 자도 몰랐던 제 삶을 뜨겁고도 아름답게 가르쳐 준 산골혜원의 인생 노동학교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하고 보고만 싶은 이랜드 노동자, 선영 언니. 뭔가 힘이 좀 납니다. 더 힘 받고만 싶어서 선영 언니랑 이랜드 투쟁을 징검다리 삼아 함께 만들어 간 소중한 추억들을 하나둘 열어 봅니다.

 

 

—–2008년 4월—–

며칠 전 이랜드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문화제에서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 황선영 씨가 편지글을 읽었습니다. 그때 땅바닥에 앉아 그 편지글을 듣는데, 눈물이 펑펑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차마 꺼이꺼이 울지 못하고…계속 주먹으로 눈 주위를 쓸어내리곤 했습니다. 나를 심하게 울게 한 그 편지글 전문을 옮겨 봅니다. 선영언니의 ‘목소리’로 들었던 그 편지글을 ‘글’로 다시 보는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날 울린 대상이 그저 영화라면, 드라마라면, 이 눈물 흘리고 말면 그만일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현실이니까, 날 울린 이 상황을,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만은 없는 거겠지요?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월드컵분회 황선영 조합원의 편지 전문>

오늘 집회현장에서 입을 파란색 스머프 티를 찾기 위해 서랍장을 뒤졌습니다.

이 파란색 스머프 티는 지난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랜드 노동자들 투쟁의 상징물입니다. 지난여름 이 파란 스머프 티를 벗어놓을 땐 다시 입게 되리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파란 스머프 티를 다시 입는다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지난여름 이 땅의 노동자로 당당하게 살고자 정당함을 부르짖고 인간답게 살아보자며 우리의 목소릴 외쳤습니다. 그런 저희들의 곁엔 늘 우리투쟁을 지지하는 많은 동지들이 함께하셨기에 더욱더 당당하게 결의에 찬 모습으로 ‘투쟁! 투쟁!’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팔뚝질, 그간 관심조차 없었던 투쟁가등 모두 낯설기만 한 우리에게 우리의 울분을 담아내는 팔뚝질과 투쟁가로 만들어 준 힘도 동지들이었습니다. 무참하게 가해지는 공권력 앞에선 우리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시고 처절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대포 앞에선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동지들… 항상 그들이 함께하기에 그 어떤 폭력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300일이란 기나 긴 투쟁으로 인해 저희들은 많이 지쳐가고 있습니다. 어려워진 생활고로 가족들의 지지도 많이 낮아졌고, 이젠 끝냈으면 하는 가족들의 무언의 압력으로 인해 그 어느 고통보다 저희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지난겨울 어느 날 ‘드뎌 전기가 끊어졌다’는 큰아이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전 답문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진행된 투쟁일정과 회의를 마치고 현관에 들어섰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촛불하나 켜놓고 공부하고 있는 큰아이의 뒷모습을 보고도 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도 제게 눈길조차 주질 않았습니다. 전 밤새 베개 깃을 적시며 고민했습니다. 진정 나와 우리가족이 쳐해 있는 현실 속에서 지금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지금 당장 먹을거리가 없고 기본적인 삶이 영위되어지질 않는데 이런 가족들의 고통들을 뒤로하고 길바닥에 앉아 투쟁만을 외치는 내 모습이 진정 우리아이들의 엄마로서의 모습인가…

또한 며칠 전엔 작은아이가 보낸 문자에는 ‘급식비 못 내서 점심 못 먹으면 운동장 수돗가에서 물이나 먹지 뭐…‘하며 제 가슴을 긁어내리는 내용이 담아져있었습니다. 빨리 급식비 내달라는 말보다 몇 십 배 아니 몇 백배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문잘 보내려 맘먹고 한자 한자 찍어 내려가는 그 아이의 고통스러웠을 순간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무너집니다. 전 300일간의 긴 투쟁 동안 나름 강한 결의로 투쟁에 임했었지만 그 순간들만큼은 제자신의 결의만으론 극복하기 어려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고통을 딛고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한 힘은 ‘엄마, 전기 끈긴 열흘 동안 오히려 집중도 더 잘 됐고, 책도 10여권이나 읽었어요. 하고 말해주는 큰아이의 한마디와 ‘급식비 못 내서 굶는 아이들이 많다는 말 안 믿었었는데 진짜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돼서 잔반 없이 먹어야겠다’는 작은 아이의 일기장에 적힌 두 줄 또한, 오늘도 투쟁현장에 가면 볼 수 있는 우리 조합원 동지를…저 못지않게 힘겨운 현실 속에서 그 모든 고통감수하고 극복해나가며 서로 어깨 걸고 보듬어 안고 힘찬 팔뚝질과 투쟁을 외치는 밝고 당당한 모습들이 이 자리까지 절 이끌고 와 준 힘이라 믿습니다.

그보다 더 큰 힘은 우리 이랜드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이라면 언제든지 달려와 주시는 동지들…우리 조합원들 힘들고 지쳐있을 때 용기와 힘이 되어주신 수많은 동지들의 사랑과 관심이 오늘 이 자리에서 동지들께 감사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자릴 만들어주셨습니다.

300일이란 긴 시간동안 흔들림 없이 노동자 탄압하는 자본가에 맞서 당당히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신 동지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해주시고 저희 투쟁의 지지자가 되어주시는 모든 동지들의 사랑으로 저희 투쟁 승리하는 그날까지 흔들림 없이 투쟁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해서 현장에서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또한 저희 투쟁뿐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은 우리 동지들의 단결과 사랑으로 만들어나가며 이 땅의 모든 노동자가 인간답게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결실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 동지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이랜드일반노동조합 월드컵분회 조합원 황 선영

 

——-2008년 7월——-

오늘 회사로 잡지가 왔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내는 잡지다. <사람세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찌어찌 아는 분이 글 써 보겠냐고 제안을 해 주셨다. <사람세상>이 올 하반기 맞이 개편을 하면서 새로운 꼭지를 만들게 되었고, 나도 한 꼭지 참여해 보라는 말씀이었다.

덜컥 하겠다고 했고 꼭지 이름도 모른 채, 그 누구든 만나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내면 된다는 말에, 덜컥! 이랜드일반노동조합 황선영 직무대행 언니를 만나겠노라고 했다. 그래서 선영이 언니를 만났고, 선영언니 둘째 아들이랑 밥 같이 먹고, 도넛 가게에서 음료수 한 잔 마시고 쓴 글이었다.

그렇게 만나면서 수첩 한 번 꺼내지 않았다. 이미 나에겐 친구 같기도 하고 동네 언니 같기만 한 선영 언니 앞에서 어설피 인터뷰한다고 수첩 꺼내는 짓 따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냥 평소에 만났던 기억 떠듬떠듬, 그날 나눈 이야기 떠듬떠듬 떠올리면서 쓴 글이다.

만족스럽게 쓴 글이 아닌데, 결국엔 그 글이 실렸다. 더구나! 나를 놀라게 한 건 꼭지 제목이었다. 내 이름이 바로 꼭지 제목이었다. ‘조혜원이 만난 사람.’ 참 당황스럽고, 황당스럽고 부끄럽고 오만가지 생각들이 스쳐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태일기념사업회라는, 뜻과 정신이 굵직한 곳에서 펴내는 잡지에 내 이름을 단 꼭지가 생기다니. 기가 잠시 막힐 노릇이기도 하다.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잡지라고 하니 한 달쯤 안에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야 할 테다. 따뜻한 사람을 만나 따뜻한 글을 남기고프다. 허나 마냥 따뜻하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리고 다른 사람과도 나눌 수 있는 그런 따뜻함이어야 할 것이다.

하여간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정말 이런 일도 다 생기고 말이다. 왜 이렇게 나한텐 하루하루가 새롭고 또 새롭기만 한 건지. 때론 버거울 정도로 말이다. 내 운명인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는 건지…

 

<조혜원이 만난 사람 “월드컵분회에 노래 모임을 만들고 싶어요.”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월드컵분회장 직무대행 황선영씨>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월드컵분회장 직무대행.’ 참 긴 이름입니다. 한 호흡으로 읽기엔 조금 벅찬 이 긴 이름으로 일 년 가까이 지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황선영 씨입니다. 황선영씨는 2003년 상암에 홈에버가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홈에버 최고참 직원인 황선영 씨는 지난해 7월 상암 홈에버 점거 투쟁이 강제 해산 된 뒤 전 월드컵분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부터 ‘직무대행’을 맡고 있습니다.

파업투쟁을 시작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파업투쟁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그럴 줄 알았으면 시작할 엄두도 못 냈을 거다.” 황선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무슨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직함 맡을 만한 사람도 아니에요. 마음도 약한 편이고.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한 달 정도만 이 일 맡으면 끝날 줄 알았지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으면 직무대행 맡을 생각도 못했을 거에요.”

어쩌다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모자란 듯하여 조금 더 물어봅니다.

“전 월드컵분회장이 자리를 떠난 뒤에 아무도 이 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았어요. 대의원들 모두 서로 못하겠다는데, 그리고 왜 그러는지 알겠는데 어떡하겠어요. 나라도 해야지.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이 투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아무도 하지 않겠다는 일에 총대를 멘다는 것, 그게 바로 카리스마인 것을. 자기는 이런 일 맡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전히 손사래를 칩니다.

“처음엔 제 기도 살려줄 겸 제가 무슨 말을 하면 조합원들이 그래도 잘 따라주었는데 이젠 제 말은 별로 먹히지도 않아요. 직무대행 말발이 안 서요. 직무대행은 이름뿐이고 이젠 그냥 조합원들이랑 같은 위치에요.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많고.”

보통 무슨 ‘장’ 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말하면서 조금은 억울하다거나 아쉬운 표정을 보여주어야 맞는데 황선영 씨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지금 그런 상황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나중에 이 투쟁이 이겨서 다시 일터로 돌아가면 분회장 직을 계속 맡을 생각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어차피 선거도 다시 해야 하지만 분회장 할 마음 조금도 없어요. 직무대행이니까 하고 있는 거에요. 공식 직함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한 다리 건넌 상태라서 활동하기가 편해요. 나를 잡아 가거나 그럴 거리가 없으니까요.”

참 예쁘고 젊게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나이는 마흔이 넘었고 큰 아들은 고2,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이라는 황선영씨.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늘 투쟁 현장에 나와 있자면 아이들이 눈에 밟힐 법도 합니다.

“엄마가 없어도 아이들이 알아서 잘 해요. 두 아이 다 밥도 자기가 잘 챙겨먹고. 엄마가 없어도 옆으로 세지 않을 아이들이에요. 어차피 홈에버에서 일할 때도 새벽 한 시까지 일했기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엄마가 익숙할 거에요. 집회장소에서도 아이들한테 자주 전화해요. 엄마 지금 전경들한테 둘러싸여 있다, 잡혀갈지도 몰라. 이렇게요. 그러면 둘째 아들이 그래요. 엄마 무슨 일 생기면 내가 달려가서 지켜줄 테니까 힘내라고. 물론 이젠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말 믿지 않아요. 실제로 잡혀간 적이 없으니까.(웃음)”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기만 하겠는가요. 하물며 지난해 가을에는 집에 전기가 끊긴 적도 있고, 둘째 아이 급식비가 밀릴 뻔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아이들은 꿋꿋하게 그런 엄마를 믿고 따라주었다고 합니다.

‘엄마, 전기 끈긴 열흘 동안 오히려 집중도 더 잘 됐고, 책도 10여권이나 읽었어요.’ 하고 말해주는 큰아이의 한마디와 ‘급식비 못 내서 굶는 아이들이 많다는 말 안 믿었는데 진짜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돼서 잔반 없이 먹어야 겠다.’던 작은 아이 일기장에 적힌 두 줄은 그렇게 황선영 씨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도와 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마음에 걸려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니 요 몇 달 동안 두세 시간 이상 자지 못한다고 합니다.

“밤에 누워도 잠이 잘 안 와요. 생각이 많아져서. 맥주 한 캔이라도 먹어야지 눈을 붙일 수 있죠. 그래서인지 몸은 힘들어도 자꾸 살이 찌네요. 안 먹던 술 날마다 먹다보니까. 투쟁이 끝나야 술도 덜 먹고 살도 빠질 텐데.(웃음)”

월드컵지원대책위원회와 월드컵분회는 지난해부터 1-2주에 한 번씩 ‘이랜드 투쟁 승리를 위한 문화제’를 열고 있습니다. 황선영씨는 이 문화제를 기획하는 ‘월드컵문화제기획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부터는 금요일마다 이 문화제를 열려고 기획 중이지만 자체 힘으로 이 행사를 치러내기가 만만치 않은 듯 합니다. 때마다 문화 노동자들이나 다른 단위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곧 다가 올 문화제에서는 황선영씨가 노래를 부르기로 했답니다.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라는데 걱정하는 얼굴치고는 왠지 밝아 보입니다.

“제가 실은 노래하는 걸 되게 좋아해요. 기타도 좀 치다 말았는데, 결혼하기 전에는 직장에서 노래모임도 했어요. 집에서도 혼자 자주 노래를 흥얼거리죠.”

황선영씨를 잘 아는 다른 조합원한테 슬쩍 확인해 본 결과 실제로도 황선영씨가 노래를 참 잘한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문화제에서 노래하기로 한 건, ‘어쩔 수 없어서’ 가 아니라 다분히 ‘하고 싶어서’ 하게 된 일인 거였죠. 노래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새 신이 난 황선영씨는 이런 다부진 꿈까지 밝힙니다.

“이랜드 투쟁 승리 문화제를 스스로 꾸릴 수 있는 노래모임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조합원들이 노래도 부르고 연주도 하고, 춤까지 추고. 더 나중엔 우리끼리 투쟁 문화제가 아닌 작은 음악회 같은 걸 열 수도 있구요. 그렇게 하다 보면 다른 투쟁 단체에서 공연 섭외가 들어올지도 모르잖아요?”

그전까지는 그렇게 피곤해 보이던 얼굴이 노래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인 건 분명한 듯 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정말 큰일입니다. 황선영 씨 못지않게 노래를 좋아하고, 지난해부터 이랜드 투쟁 문화제에서 몇 번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 제가 덜컥 그 노래 모임을 같이 만들어 보자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황선영 씨랑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겁’보다는 ‘설렘’이 먼저 드니 어떻게든 되겠지요?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월드컵분회에 노래 모임이 만들어지면, 그땐 그 이야기를 이 자리에 써보겠다고 황선영씨한테 살짝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려면 노래 모임 만드는 일을 얼른 서둘러야겠어요. 이랜드 투쟁이 곧 끝날지도 모르니까요. 투쟁이 끝나기 전에 한 번 쯤은 이랜드 투쟁 승리를 위한 문화제에 자체 공연팀으로 출연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인터뷰 글 끝)

 

선영이 언니. 허리 디스크가 자주 도져서 집회장에서 앉아 있기보단, 서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되는 언니. 노래모임 만들자고 말한 게 벌써 언젠데 아직도 실천을 못하고 있다. 나도 사는 게 버거워, 막 추진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

그래도 해야지. 하고 싶은 거니까. 선영언니가 기타 치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 노래하는 모습은 이미 봤으니. 낼모레 이랜드 금요 문화제에 가서 이 책자 언니한테 줘야겠다. 자기 이야기 슬프게 나오는 거 싫다고, 밝게 써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언니는 내가 쓴 글 보구 뭐라고 말을 할까? 싫어하지 않았음 좋겠다.^^


노래를 참 좋아하는 선영 언니랑 또 다른 멋진 이랜드 언니들과 마음 맞춰서, 그리고 참 멋지게 고마운 노래 선생님 명인 언니의 푸근하고도 정성어린 노래 지도 덕분에 이랜드 노조에 노래모임 ‘비상’을 힘차게 신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비상’의 (이름만) 매니저였고 서른 전에 만난 ‘Re:서른 즈음에’ 노래가 참 좋아서 혼자 부를 때마다 이 가수는 누굴까 참 궁금하기만 했던 명가수 명인 언니가 무려 노래 선생님이었죠!

추억 돋은 김에 이랜드 투쟁이 맺어 준 참 고마운 인연, 명인 언니의 앨범 ‘우리가 있는 풍경’을 들으면서 썼던 글도 다시금 들여다봅니다.

 

—–2008년 4월—–

요즘은 노래모임에 대한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 보니까 (민중가요 가운데) 이 노래 저 노래 들어 보고 있는 중이다. 전에는, 정말 제 아무리 민중가요라고 해도 듣고 싶은 것만 들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있는 풍경> 음반에 담긴 노래를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처음엔 편안한 마음으로 듣다가 바로 이 노래! ‘노래하는 이유’를 듣는 순간, 정말 오랜만에 맘 깊숙한 곳을 노래라는 망치가 건드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 기운이 너무 짠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잠시 엎드려 이 노래를 마저 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에, 갑자기 밀려오는 시릿한 기운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게 어제 일이다.

 

‘나 입술로만 노래하는 인형은 되지 않으리

노래가 필요해

살아 있는 사람의 노래’

 

노랫말이 정말이지 멋지게 아프다. ‘노래하는 이유’를 듣다 보면 꼭 어느 뮤지컬 주제곡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바람이 있다면…듣는 첫 순간! 내 맘을 ‘팍’ 하고 내려치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도 좋으니까, 그런 노래들을 명인 씨도 많이 만들고 불러 줬음 좋겠다. 요즘 세상에, 첫 순간에 와 닿지 않아서는 웬만해선 다시 들으려고 맘먹기가 쉽지 않다. 민중가요는 더욱더!

 

———–

명인 언니 노래를 들으면서 명인 언니 만나기 전에 썼던 글을 보는데 그때 그 마음이 노래에 실려 막 샘솟는다. 노래 선생님이자 귀촌 선배인 명인 언니를 오랜만에 만날 때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명인 언니, 두 번이나 산골 학생 집에 발걸음 해 주었는데 못난 학생이 선생님 사는 곳에 가 보질 못해서 참 미안해요. 오늘 언니 노래 들으면서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렇더라고요. 언니 사는 데서건 장수 산골에서건 조만간 만나야만 할 것 같아요. 이번엔 제가 먼저 연락하도록 애써 볼게요!

언니가 있어서 ‘비상’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랜드 투쟁 승리 문화제까지 치를 수 있었어요. 그때도 지금도 저한테나 이랜드 언니들에게 커다란 축복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초보 노래꾼들 떨면서 노래할 때, 바로 앞에서 맨손으로 지휘하며 이끌어 주던 언니 모습이 오늘 참 많이 떠올랐어요.^^)

이랜드 문화제 때 보통은 비상 멤버인 예닐곱 명이 같이 노래를 했는데 어느 하루는 선영 언니랑 듀엣으로 나선 적이 있어요. 명인 언니 노래 들으면서 그때 사진을 보고 있으니 배 아픈 게 슬슬 가라앉는 듯해요. 불쑥 선영 언니가 가까이 있으염치 불고하고 묻고만 싶은 마음이 일렁이더라고요.

비정규직 투쟁 500일을 겪은 언니는, 노조탄압 홈플러스에서 노동조합을 지켜내고 나아가 끝내 정규직으로 우뚝 선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시도 때도 없이 무엇을 묻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요건 요렇고..” 다정하게 조목조목 다 말해주던 언니는, 철탑 위에 오른 김용희 삼성해고노동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것만 같았거든요. 전화기에 있는 언니 번호를 꾹 누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 참았습니다.

 

지난번 승진 언니랑 현미 언니가 산골에 두 번째로 찾아왔을 때 늦은 밤 이랜드 투쟁 이야기가 잠시 흘러나왔는데 그만 울음바다가 된 적이 있어요. 아이고, 그때 마음먹었어요. 이랜드 언니들이랑 ‘노조’니 ‘노동운동’이니 그런 이야기들 손톱만치도 꺼내지 말자. 승리했다지만, 조금은 아픈 승리였기에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제가 감히 짐작하지 못할 슬픔들이 있겠기에, 어쩌면 ‘노동조합’의 ‘노’ 자만 들어도 이 언니들은 무조건 아플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거든요.

그래도 선영 언니랑 함께한 시간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좋아져서요, 그만 또 노래가 하고 싶어졌어요. 이랜드 노조 노래모임 ‘비상’을 꾸릴 때 함께 부를 노래를 고르고 또 고르고 저도 나름 애를 좀 썼어요.

그때 처음 듣자마자 언니들 거의가 참참 좋아했던 노래가 있어요. 바로 꽃다지가 부른 ‘노래만큼 좋은 세상’이죠. 이 노래로 공연도 몇 번 했답니다. 내가 참 좋아하고 아끼는 노래를 언니들도 바로 좋아해 주니까 진짜 신나고 행복했던 그때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그래서, 오늘도 불러 봤어요. 역시 힘이 납니다!^^ 스무 살 때부터 부른 노래, 이십 년이 훌쩍 지나도 어쩜 만날 때마다 요로코롬 노랫말도 곡 흐름도 기분을 싹싹 곱게도 어루만져 주는지.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노래랍니다~^^

이어서 ‘내일의 노래’까지 마저 불렀어요. 아팠던 마음 어디 가고 이젠 흥이 막 나네요. 이 노래에 맞춰 이랜드 언니들이 신나게 몸짓을 나누던 장면도 눈에 선하고요.

그러고 나니 갑자기 배가 고파요. 밤 열한 시 넘어 식은 밥 덥혀서 된장찌개 남은 거에 쑥쑥 밀어넣는데 맛있어요. 그게 참 기뻤어요.

“밥은 하늘이고 힘이고 사랑이다”

십시일반 밥묵차를 꾸리는 참말이지 ‘하늘 같은’ 마음을 지닌 유희님 말씀인데요, 밥 먹으면서 자꾸 생각났어요. 김용희 삼성해고노동자가 하늘이고 힘이고 사랑인 그 밥을 하루빨리 만날 수 있기를, 밥 먹으면서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어요.

밥 먹으니 역시 힘이 나네요. 선영 언니를 만나면서 썼던 글을 다시금 들여다봅니다.

 

“날 울린 대상이 그저 영화라면, 드라마라면,

이 눈물 흘리고 말면 그만일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현실이니까,

날 울린 이 상황을,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만은 없는 거겠지요?”

 

오늘 제 위를 찌를 듯이 아프게 한 50일 넘게 철탑 위에 오른 인간새 김용희 삼성해고노동자.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그래도 그이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있는 이 자리에선 ‘노래’밖엔 없는 거 같아요. 당신이 어서 빨리 하늘 같은 밥을 먹고 하늘 같은 식구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절실히 애타게 바라는 마음을 담아 ‘밝고 희망찬’ 노래들을 불러 보려고 해요. 철탑 아래서 부르진 못하지만 간절한 마음은 바람 타고 빗님에 실려서라도 어떡하든 전달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찬 믿음으로! 김용희 삼성해고노동자가 땅으로 내려올 때까지 오늘부터 날마다 노래에 제 마음을 담아 보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랜드 투쟁 500일을 늘 설레는 마음으로 출퇴근했듯이, 인간새가 하루빨리 ‘사람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를, 그날이 부디 바로 내일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지금 이 순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철탑 위에 산골 노래를 띄워 봅니다. 그 첫 노래! 오늘 저를 밥 먹게 만들어 준 정말 고맙고 아름답게 신나는 노래 ‘노래만큼 좋은 세상’과 ‘내일의 노래’입니다~

 

“내 작은 목소리로 다른 이들을 노래하고

나와 너의 목소리로 세상을 노래하면

언젠간 이룰 거야 노래만큼 좋은 세상

우리 모두의 힘으로 우리가 만들 세상~♪”

(노래만큼 좋은 세상/ 유인혁 글, 곡/ 꽃다지 노래)

“어제의 모든 괴롬 털어버릴 오늘은

헛된 두려움 벗어던지고 내일 위해 살겠네~♬”

(내일의 노래/ 작사, 작곡, 부른이는 다시 확인해야 해요. 노래책마다 다르게 나와서요.)

 

제목에 ‘노래’가 들어간 노래들은 거의가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라도 노래는 참 좋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노래의 힘으로, 노래의 꿈으로 오늘 하루 저를 힘겹게 휘감았던 헛된 두려움 벗어던지고 이제 말갛게 다가올 내일을 위해 단꿈을 꾸러 가야겠습니다. 세상에 아픈 모든 이들이 부디 함께 단잠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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