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소개>

 “돌아 · 가다 – 반동의 동반자” 연재를 시작합니다. 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라고 할 수 있으며,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은비늘 물고기를 낳고, 물고기는 눈이 큰 소를 낳고, 소는 깃 부드러운 까치를 낳고, 까치는 개구쟁이 강아지를 낳고, 강아지는 콧등 얼룩진 돼지를 낳고, 돼지는 향을 품은 전나무를 낳고, 전나무는 텃밭의 옥수수를 낳고, 옥수수는 부지런한 너구리를 낳고, 너구리는 초여름 개구리를 낳고, 개구리는 키 큰 가문비나무를 낳고, 가문비나무는 음악을 낳았다.

이윽고 사람은 물고기를 바늘에 꿰고, 소의 몸통을 가르고, 까치를 잡고, 강아지를 매달고, 돼지를 태우고, 전나무를 베고, 옥수수를 뽑고, 너구리를 밟고, 개구리를 찢고, 가문비나무를 죽였다. 그래도 미끈한 물고기는,

누런 소를 낳고, 소는 수다쟁이 까치를 낳고, 까치는 봄날의 강아지를 낳고, 강아지는 듬직한 돼지를 낳고, 돼지는 과묵한 전나무를 낳고, 전나무는 건강한 옥수수를 낳고, 옥수수는 귀여운 너구리를 낳고, 너구리는 논두렁 개구리를 낳고, 개구리는 바람 이는 가문비나무를 낳고, 가문비나무는 사람을 낳았다.

[2007년 7월 3일]


나비화

벚꽃이 눈처럼 내리던 날, 바람을 타고 고공까지 날아오른 꽃잎 하나가 나비처럼 떠돌았다. 나비화(飛花)였다. 건장한 물푸레나무가 드리운 그늘에서 고개를 젖히고 작고 하얀 열매 같은 꽃다발들을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보았다.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에 비스듬해지는 광선이 만든 음영에 의하여 입체감이 도드라지는 숲을 말없이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열띤 찬사를 보냈다. 가끔은 비의 무리가 엷은 초록빛 산을 배경 삼아 바람결을 타고 파도처럼 물결지어 흘러가는 ‘빗결’을 창 사이로 숨죽인 채 훔쳐보기도 했다. 그해 첫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 저녁엔 괜히 달뜬 마음에 작고 허름한 동네 호프집을 찾아 축하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밤길을 오갈 때에는 어둠의 휘장으로 몸을 덮은 산이 저만치 멀어지며 신령하고 근엄하게 커지는 풍경을 보며 걸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저수지와 산기슭에 서식하는 식물들과 곤충들에게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연과 명상을 좋아하는 내게 꽃마리가 달린 애기똥풀과 그렇지 않은 피나물, 꽃대가 있는 산수유 꽃과 그렇지 않은 생강나무 꽃을 구별해보라는, 굉장히 유용한 문제를 내며 시험하기도 했다. 숲 속에 있을 때면 새소리와 물소리, 바람소리와 흙-소리가 진정한 고요 속으로 인도했다. 그 전부터 성가시게 굴며 따라다니던 모기 소리도 빼놓을 수 없겠다. 또한 동네 개들과도 아는 사이가 되었다. 골목 끝에서 내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반길 준비를 해주는 널뛰기네 개들과 강아지 때부터 쭉 지켜봐온 두부집 흰둥이와는 마실 다닐 때마다 인사를 나누었다(그들은 지금 모두 죽었다).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멀리서부터 울타리 위를 향해 폴짝 폴짝 뛰어대는 모습이 널을 뛰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애칭 ‘널뛰기네 개들’] 

 

 

봄비가 내리고 얼마 후면 동네에 봄-소리가 들려온다. 저만치에서 트랙터가 제 주인을 업고 흙을 뒤집으며 경작을 준비하는 소리다. 막 봄을 맞은 산의 색은 단정하다. 곳곳에 누운 갈색과 소나무의 초록과 진달래의 연분홍과 생강나무 꽃의 노랑 그리고 하늘의 파랑! 생강나무 군락을 찾아 철마산의 막내 봉우리들 중 하나인 복두산 길로 올라, 깊은 숲 비탈에서 작은 폭죽처럼 터져 정지된 눈송이마냥 공중에 매달린 노란 꽃들을 땄다. 봄-산에서 가장 먼저 피는 생강나무 꽃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기 위해서였다. 생강나무와 생강의 관계는 고추나무와 고추, 국수나무와 국수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강나무에는 생강이 맺히지 않고 고추나무에는 고추가 달리지 않는다. 전자는 냄새 때문에, 후자는 모양 때문에 이름으로 맺어졌을 뿐이다. 물론 껍질을 벗긴 가지가 국수처럼 하얀 국수나무에서도 국수가 뽑혀 나오지 않는다.

 

세상엔 이런 관계(와 오해)의 말과 일이 얼마나 많은지 되새기며 나무마다 적당한 양의 꽃만 따고 옮겨 다녔다. 미안한 마음도 들고, 꽃을 남겨둬야 그들도 자기 몫을 할 수 있을 터. 같은 나무나 풀밭에서 충분히 먹으면 될 것을 굳이 옮겨 다니는 동물들의 비효율적인 행동을 의아하게 여긴 적이 있다. 그들은 우리 못지않게 현명했고, (세속의 기준으로는) 우리 못지않게 아둔했다. 그날 저녁, 살짝 데쳐진 생강나무 꽃들은 탁자 위에 누워 몸을 말렸고, 그 밑에 깔린 하얀 종이에는 노란 물이 배어 나왔다.

그렇다고 이곳이 아름답기만 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어느 날, 다음과 같이 썼다. “가뭄이 심하다. 산의 낙엽 아래의 흙마저 푸석푸석해지고, 며칠마다 산불진화용 헬리콥터가 저수지의 물을 빨아들여 경작지에 뿌려줘야 할 정도로 심한 가뭄을 지켜보았다. 그 때에 저수지는 수위가 낮아져 중상류 이상 지역에선 바닥을 황망하게 드러내 마치 외계행성의 모습처럼 변해버렸다. 대도시에 살았다면 ‘가뭄이 이뿐이겠는가. 이 사회의 가뭄은…’ 식으로 글을 이어갔겠지만, 그런 생각 따위가 들지 않을 정도로 당장 눈앞의 가뭄이 심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글을 페이스북에 띄우자마자 구름이 모이고 바람이 불더니 두 시간 넘도록 비가 쏟아졌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를 부르는 주술사로 나를 임명하여 파견한 것이다. 호형호제는 못 했지만 호풍호우는 할 줄 알았던 청년 길동 씨가 떠올랐지만 기우제를 다시 시도하진 않았다. 하늘을 시험에 들게 할 정도로 무례해선 곤란하니까.

 


 

그해 장마가 시작되고 가뭄이 끝나던 날, “뉴스에선 104년 만의 가뭄이라고 했다. 그해 장마가 시작되고 가뭄이 끝나던 날 우리는…”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소설이 써지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봄 가뭄은 해마다 반복되었다. 이 글을 남긴 2012년으로부터 5년 후인 2017년에도 장마가 시작된 7월 초에 이르러 집 앞 개천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날에야 수척해진 왜가리가 먹이를 찾아 막 흐르기 시작한 물에 발목을 담그고 자리를 잡고 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 두 글자인 자연(自然)에는 깊은 사유가 담겨 있어 이루 다 말로 풀어내고 글로 적어낼 수 없다. 하지만 말과 글을 벗어나 그저 ‘스스로 그러함’을 느끼면 그로써 충분할뿐더러 오히려 더 그 뜻에 가까워진다. 여기가 깊숙한 산골짜기나 논밭 한가운데에 인가가 드문드문 엎드린 곳이라서 이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고 놀랍기 그지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마트에 내다팔 수는 없지만 훨씬 가치 있는 생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음의 눈길과 발길을 그쪽으로 옮겼을 뿐이다. 시선의 깊이만큼 마음의 뿌리가 자란다. 그러면 저 높은 트베르가스타인에 들어간 아르네 네스(Arne Naess)처럼 살지 않아도 하늘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하루의 반은 암흑이며, 저녁마다 빨간 벽돌을 더 붉은 햇살이 물들이는 세상의 신비를 엿볼 수 있다.

 

고대 북유럽의 전설을 담은 『사가스(Sagas)』에 실릴 노래를 수집한 음유시인 스칼드(skald)처럼 세상을 떠돌지 않아도 주위에 가득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행여 도시에 산다 해도 누구나 장마철에 수중도시에 사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호수나 바다 속에 거대한 돔을 만들어 건설한 문명 세계에 대한 환상에 빠져볼 수 있다. 하긴 장마가 끝나면 땡볕과 후덥지근함과 열대야가 도시를 엄습할 테니 그렇게라도 생각하는 편이 낫기도 하다.

 

집에서도, 고개 넘어 개울가에서 뜯어온 돌나물과 쑥이 식탁을 싱그럽게 해주기도 했지만, 많은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느 날에는 위성안테나마냥 활짝 핀 동백꽃 옆에서 동거 중인 재스민의 마른 잎들로 차를 만들어 마셨는데, 꽃차는 아니지만 오후햇살을 받으며 마셔선지 맛이 좋았다. 만개한 동백꽃에 매달린 꿀방울을 새끼손가락으로 찍어먹는 풍류도 알게 되었다. 지난여름에 열매를 종종 얻어먹은 작은 고추밭은 언제부터가 서식 중인 달팽이들의 농장이 되었고, 해만 지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달팽이들에게 배춧잎을 공양하는 게 일과였다.

 

새벽에 귀를 기울이면 달팽이들이 여린 이파리를 갉아먹는 소리가 여간 씩씩한 게 아니었다. 마치 아프리카의 건기와 우기 사이에 무려 1,600km를 이동하는 누(gnu)에 견줘달라는 듯이 달팽이들은 매일 밤 장엄한 행군에 나섰고, 유리창에는 미술작품처럼 지난밤에 남긴 ‘달팽이 로드’가 아침마다 그려졌다. 참고로 잘생긴 회색 초식동물인 누가 수만에 달하는 무리를 이루어 목초지로 향하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악어 떼가 장악한 강을 건너는 마지막 관문에서 용기와 희생, 삶과 죽음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어린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해가 대지 속 은신처로 사라지고 나면 집 안의 작은 화단으로 나가 달팽이들을 구조하는 것도 일과가 되었다. 다음날 해가 은신처에서 나와 열기를 발할 때까지 자신의 은신처를 찾지 못한 달팽이들이 베란다에서 말라죽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올 때까지 구조 활동은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구조의 목적이 달팽이로부터 난초와 화초를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어갔다. 몇 달 새 부쩍 늘어난 달팽이 무리가 난이 어렵사리 피운 꽃과 몇몇 여린 화초의 잎까지 갉아먹고 끈적끈적한 액체를 발라놓곤 했다. 심야에 베란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가 가끔 무섭기도 했다. 자연으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은가 물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엔 완연한 봄이 되기 전이라 바깥은 황량하고 추워서 달팽이들 중 대부분은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난초와 화초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겨우내 죽었거나 동면중인) 고추들의 대형 화분으로 강제 이주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식량을 잘 공급해주었다.

 

마침내 초여름에 접어들자 달팽이 방사를 위한 대규모 수송 작전이 감행되었다. 고백하건대 전적으로 인도주의 차원의 결단은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의 달팽이들이 부화한 이 집이 그들의 고향이고, 그동안 배춧잎이며 상추며 시금치를 구해와 먹이느라 기른 정까지 생겼다. 하지만 늦겨울에 어렵게 피운 난초의 꽃들마저 먹혀버린 날,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군자란, 처음 올 때 꼬마였다가 늠름하게 큰 동백이(동백), 그리고 난에 이어 제 차례를 만난 제라늄이 꽃을 피웠고, 겨우내 다들 죽은 줄 알 정도로 말라있던 수민이(재스민)도 소생하여 싱그럽고 푸른 가지들을 뻗었다. 커피와 은행, 심지어 수박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는 과업에 성공한 이후 동네 화단에서 얻은 나팔꽃과 라일락 씨앗을 심었다. 고추들 중 몇몇은 다시 싹을 틔우며 자기네가 다년 생 식물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웅변했다.

다음 겨울에는 이 작은 집의 화분 1호인 동백이의 꽃이 겨우내 만발했다. 교대로 피고 지는데 만개했다가 떨어진 꽃만 스무 송이는 족히 되고 대기 중인 봉우리들도 적지 않다. 작년에 작은 밤톨 같은 씨앗을 두 개 얻었는데 올해에는 꽤 많을 것 같아 반갑다. 수민이(재스민)는 그 겨울에 동면에 들어갔다. 한 일주일만 일찍 따뜻한 곳으로 들여놓을 걸 후회스럽고, 좀 미안했다. 고추들도 마찬가진데 다음 봄에도 부활하면 3년생 고추나무가 될 것이다. 자란의 열매들도 잘 익어가고 있었다. 자줏빛으로. 그리곤 다시 봄이 오자 산수유는 겨우내 입고 있던 검은 외투를 벗어내고 새 몸뚱이를 드러내며 다시 노란 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봄도 생강나무의 꽃차와 함께 시작했다. 찌거나 데치거나 볶은(덖음질이라 한다) 후 잘 말리면, 절로 ‘좋다’를 연발하게 되는 맛과 향과 색을 지닌 최상의 자연차가 완성된다. 생강나무꽃차는 만들기에 따라 다른 빛깔과 맛을 지닌다. 데치거나 쪄서 말리면 신비로운 형광빛에 맑고 은은한 맛이 나고, 살짝 볶으면 노란 빛깔에 구수한 맛이 생겨난다(볶는 방식의 차들은 대체로 비슷한 맛을 내고, 그래서 대중적이다). 생강나무잎차와 진달래잎차까지 구상하며 초봄을 보냈고, 따먹지 않고 그대로 두니 노란 꽃이 만발한 브로콜리를 바라보며 초여름을 맞았다. 그러는 사이 돌나물 채취 시즌도 다가왔다. 봄마다 돌아오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명아주, 민들레, 질경이도 나물로 먹을 수 있으나 그 정도 수고를 바칠 수 있는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하늘을 자주 보는 사람은 목성과 잘 아는 사이가 된다. 들풀이 자라고 양털이 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는 하임달의 청력을 갖진 못했더라도 우리가 사는 동네와 집은 생명에 경탄한 기회들로 가득하다. 바싹 마른 빨간 고추열매를 흙에 놓아주면, 싹을 틔운다. 몸통이 잘리고 뿌리만 남은 대파에게 흙이나 물을 돌려주면, 다시 자란다. 썽둥 잘린 고구마가 무성하게 잎을 피우는 데에 필요한 것은, 물이 담긴 작은 그릇뿐이다. 양파와 마늘 한 조각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면, 로커의 머리 같은 줄기와 수염 같은 뿌리를 뻗는다. 밥의 일부가 되어 시작하지도 못한 생을 마감할 뻔했던 검은 콩은 흙만 만나면 쑥쑥 자란다. 집에 팔려온 채소들 중 여럿은, 이렇게 살아있다. 하물며 삶은 어떻겠는가. 우리의 노래는 어떻겠는가. 하루의 날은 하나의 음표이고, 한 달은 한 절이 되며, 그렇게 한 해는 하나의 노래가 된다.

 

몇 해 전, 철마다 서서히 색을 바꾸는 산을 창으로 볼 수 있는 계절이었다. 방에서 거실로 나왔을 때 붉고 노란 산이 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이 덜 깨어 눈을 반쯤만 뜨고 있었지만 감동받기엔 충분했다. 잰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쿵! 잠의 신과 완전히 헤어지지 못했던 사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아야 했다. 공기는 맑고 서늘했다. 거실과 베란다 사이의 통유리가 닫힌 채로 버티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유리에 얼굴자국이 찍히고 아랫입술은 터졌다. 만약 보는 이가 있었다면 무슨 만화나 코미디에서 볼법한 액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묘기였으나 애석하게도 증인은 없다.

 

그리곤 주섬주섬 추어탕을 먹다가 혼잣말로 음식과 생명에 대한 가상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논의가 점차 확장되어 채식주의를 거쳐 내가 보신탕을 먹지 않게 된 사연까지 갔다가 지금껏 함께 살다간 동물들과의 애절한 추억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수저를 차분히 내려놓곤 가을 산 담긴 창을 바라보며 짱가를 부르는 추모의 시간을 갖기에 이르렀다. 짱가는 여느 날처럼 거실마루에 누운 채 설거지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숨을 쉬었다. 2008년 4월 23일 오후였다. 10여 년을 같은 방에서 자던 생명이 지금은 없다.

 

이른바 통유리 충돌 사건은 또 다른 사유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나와 풍경 사이에 두껍더라도 깨끗한 통유리가 있다면 감동에는 차이가 없다. 다르게 생각하면 차이가 없어 보이더라도 통유리는 물리적 장벽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점점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입술을 어루만지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의 <물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망상의 사치를 누리게 되었다. 이 단편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탈리아로 이민 온 인도인 청년이 나무 아래에서 물을 청하는 노인을 위해 물을 구하러 갔다가 긴 인생역정을 겪고, 홀린 듯 다시 나무를 찾았더니 노인은 그 모습 그대로 청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는 힌두교와 통하는 소가 한가로이 서있었고.

 

이 우화는 김만중의 『구운몽』과 남가일몽(南柯一夢)의 출전이 된 이공좌의 『남가태수전』과 맥을 같이한다. 한단지몽(邯鄲之夢)의 출전으로 심기제가 쓴 『침중기』와는 결말까지 흡사하다. 배금주의와 성공신화의 허영을 충족시켜주고 난 후에 반성하도록 만든다는 이야기는 뉴요커인 로렌 와이스버거(Lauren Weisberger)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고 있다. 이런 생각이 오고갔던 거실에는 지금, 아찔하게 그윽한 난향이 감돌아 흐르고 있다.

 

집배원 아저씨보다 익숙해진 택배기사님과 ‘배달의 기수’를 일순 긴장시키는 우리 집 현관의 군화들을 외출시키기 위하여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은 아니다. 이쯤 되면 내게 여행은 풍광을 감상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며, 나아가 몸을 움직여 어딘가를 다녀오는 행위로서의 여행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슬슬 들통 나고 있을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일단 대도시, 특히 서울에 발을 들여놓으면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많아진다. 대도시에 사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집중과 지방의 희생, 환경의 오염과 식량생산구조의 왜곡을 비롯하여 이 세상 곳곳에 심대한 해를 끼치는 대열에 본의와 다르게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더 가까운 현실 속에는 이러저러한 이유와 사연이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 그래도 대도시에, ‘지금 살면서’가 아니라, ‘가능한 살아야겠다면서’ 핵발전, 송전탑, 생태파괴, 권력집중에 반대하는 걸 심정으로는 이해해도 논리로는 납득할 수 없다.

거대 브랜드숍에 앉아 공정커피를 마신들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런데 벗어나보면, 놀랍게도, 어떻게 사람 살만한 곳이 못되는 저런 곳에서 살았나 싶어지는 게 또한 대도시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진 서울과 같은 대도시, 그 중에서도 집값이 비싼 지역에 살다가 그 밖으로 밀려나기라도 하면 자신이 ‘짐마차를 끄는 페가수스’의 처지라도 될 것 같아 두려워한다. 그런 생활이야말로 자신을 빛을 잃은 은반지로 내버려두는 격이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이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기회가 되면 떠나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서 절대로 떠나려 하지 않는다. 어릴 적 고향을 생각하듯 단지 그리워할 뿐이다. 대신 어딘가에 아쉬움을 표출할만한 공간을 마련한다.

 

노인들뿐인 농촌이 한 세대만 지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이미 심각하게 다가오는 문제이다. 어느 미술 큐레이터가 갑자기 취소된 설치작품으로 인하여 텅 비어버린 공간을 보며 느꼈다는 공포 그 이상일 것이다. 일본에서 지난 10년 동안 사라진 마을이 3000개에 달한다. 일본의 여러 현상이 10년 정도 후면 한국에 나타나곤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섬뜩한 예언이랄 수 있다. 이와 다른 각도에서 현지의 당사자가 아닌 단기 체류자 혹은 뜨내기 방문자가 어떤 지역의 변화에 대하여 한탄조로 말하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다. 도시인이 시골의 개선된 변화를 안타까워하고, 선진국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온 사람이 오지 마을이 현대화와 함께 타락했다고 개탄한다. 또 어떤 사람은 가끔 찾아가는 (자신만의 소중한) 관광지가 전보다 유명해진 탓에 (자신 역시 그 일부이면서)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졌다고 투덜댄다.

 

과연 그들에게 전 인류를 대신하여 고뇌할 자격이 있는가. 자신은 가족을 거기로 데리고 와서 살 생각이 없음은 물론, 도시 거리의 인파에 몸을 보태고 짜증나는 교통체증에 충실히 일조하면서 말이다. 신화 속 괴물을 무찌른 인간이 괴물이 되었고, 인간이 건설한 현대도시라는 인간을 지배하는 체제 안에서 이런저런 소음에 익숙해진 인간은 점차 감방에서 자신의 처형대가 만들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형수가 되어간다. 과연 끈이 묶인 채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하는 일탈에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까. 영화 <역도산>에 나오는 얄미운 대사를 얻어 써본다.

 

“바보라고 말하고 싶군! 그러나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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