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1편 : http://2-um.kr/archives/5991 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입니다.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

구스타프 프라이타크(Gustav Freytag)는 극작가의 임무를 “사건을 위해 사건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다. 등줄기에 깊게 패이며 그어지는 채찍 자국을 무늬로 삼게 될 젊은 영혼들에게 애정을 품어온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는, 비가 내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비 갠 후 흔적만 봐야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한 편의 에세이를 썼다.


[사진 – 영화 <엘리펀트>의 한 장면]

 

영화 <엘리펀트>는 어느 습한 가을날 가뭇없이 사라진 순간들을 밟아갈 뿐이다. 그리고 살인을 앞둔 알렉스의 손가락으로 ‘월광 소나타’와 ‘엘리제를 위하여’가 차례로, 그리고 처연하게 흐르게 했다. 정적이면서도 꿈틀대는 시적 현장감이 달성되는 순간이다. 총탄에 희생되기 직전까지 셔터를 눌렀던 일라이가 어른이 될 수 있었다면 어떤 사진을 찍었을까?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여 가꿨을 텃밭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 학살자의 운명을 앞두고 그간 배운 피아노곡을 연주하던 소년은? 살아남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나’, 어디에선가 눈길을 주고받았을 그 사람이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 ‘그냥 바라보기’를 권하는 것, 구호에 앞서 눈앞을, 바로 옆을 보라고 권하는 것, <엘리펀트>는 여기에서 다시 출발할 때 구호도 살아있을 수 있음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여행과 벗어남에 관하여

이쯤 되면 ‘도시를 벗어나자’에 국한된 여행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들통 났을 것이다. 슬슬 여행마저 일종의 도시화와 세계화의 자장 안에 있지 않은가 묻기 시작해야겠다. 속살과 속내를 읽어내지 못하고 ‘아!’하는 감탄사만 동반할 경우에 눈앞에 펼쳐진 이국적 풍경이란 여행자에게 무엇일까. 아마존처럼 지중해의 지역신화가 세계로 확장한 지명들이 있다. 에티오피아도 그렇게 세계화된 지명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전란과 기아 속에 있을 당시의 에티오피아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의 낙원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어떤 이들은 낙원의 이름을 물려받은 황무지에 유폐되었다. 이른바 오지를 탐험하며 구경한 생활상을 만약 자신이 사는 곳에서 본다면 불쌍하다기보다는 불쾌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여행자가 측은해하는 가난한 나라사람들은 잠시 지나가는 이가 생각하는 만큼 불행하지 않다고 한다. 오만한 여행자의 집에 TV와 냉장고와 욕조가 있다고 해서 더 부유한 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계기로 여행을 말하기도 한다. 자기계발 혹은 자아성취의 도구로 본다면 일부 역사가들이 동아시아에서도 자본주의의 맹아기를 찾으려 했던 눈물겨운 노력과 다를 바 없다. 낯섦을 찾아가는 저돌적인 일탈과 자유로운 무전여행을 낭만처럼 여겼지만 외국인들에겐 추태였을 뿐인 시절도 있었다. 평화로운 휴식? 개발을 중시하는 정부가 관광산업 목적으로 사력을 다하여 유치한 슬로우 시티 지정을 자축하는 행사만큼이나 음울한 광경이다.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만들어야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그냥 손에 물을 바르고 멍하니 찰흙을 주무르고 있는 아이처럼 예쁜 배낭을 짊어지고 몸속의 단어들과 문장들과 영상들을 꾸역꾸역 되삼키고 만다. 그러면 비우기 위한 여행길에 짐만 늘어난다.


[그림 – Paweł Kuczyński]

왜일까? 우리의 둥지에 뻐꾸기가 알을 낳았고, 새끼가 거대하게 커서 윽박지르고 있다. 어느 일본병사처럼 수십 년 동안 외딴 섬에 숨어 살지 않았다면 다리 하나를 사이엔 두고 전혀 다른 두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혼하면서 빚을 지는 삶에 익숙해졌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제 상황은 생활과 사고에도 영향을 준다. 과거에는 아이가 많을수록 노동력과 수입원이 되었으나 비용만 증가하게 된 지금에는 항상 무언가를 맡기거나 팔고 돈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럴만한 돈이 있다면 말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과 지자체 그리고 국가 할 것 없이 모두 빚으로 유지되는 세상이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빚을 내기 위하여 빚을 내야 한다. 시험성적 좋은 학생이 되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준비하며 살다가, 학교에 들어가서는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살다가, 더 큰 학교에 가서는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살다가, 졸업해서는 결혼을 준비하고 통장을 채워놓기 위해 살다가, 혹 결혼을 하게 되면 대출금을 갚고 아이를 시험성적 좋은 학생이 되도록 지원하기 위해 살다가, 언제부터인가는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살다가, 그리고 절대다수로부터 고립되어 동족끼리 사치를 누리는 특권층의 꿈은 일찌감치 접은 채, 빚을 유산으로 남기고 죽는 것이다. 평생 삽으로 제 무덤을 열심히 파면서 사는 셈이니 출생은 가히 시체의 탄생이라 할만하다.


[그림 – Paweł Kuczyński]

 

과시소비는 삶의 방식이 되었고 화폐의 빌딩이 꼴 보기 싫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병 없이 거친 밥을 먹는 것이 병이 들어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 낫다’는 말은 옛 선비들의 물정 모르는 소리가 되었고, 비싸고 좋은 약을 얻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며 기꺼이 병을 얻고 있다. 그리곤 선거 1년 후면 꼭 인기 없고 실망스러운 정치지도자를 만들어낸다. 속았다고들 한다. 정말 실망해야 할 대상은 그들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유권자 자신이다. 나도 그러한데 남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하는 사고가 성숙이지, 너희도 그러한데 나를 비난하느냐는 사고는 미숙이다. 사실 비판이란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기에 가능하다.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과거가 된 두바이의 고층 탑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은 날이 갈수록 과거로 향하고, 마치 죽기 위해 사는 것처럼 산다. 무의미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경쟁하는 TV오락프로그램, 예를 들면 한때 인기를 얻은 <무한도전>을 보며 깔깔 웃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거나, 그렇게 살아야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어느 도사의 생애>

어린 나이에 깨달은 바 있어 평생 수련을 거듭하여 드디어 변신술까지 부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젊은이로 둔갑할 수 있는 도술을 익히느라 젊음을 다 바쳤다.

<어느 배우의 여유>

배우는 전라장면에서는 자신이 아닌 대역이 연기했다며 웃었다. 그런데 관객이 그 배우의 벗은 몸으로 알았고 보았고 기억하고 있다면 도대체 그가 지켜낸 건 무엇일까.

 

 


[그림 – 멋 부리길 좋아했다는 노인, 아리스토텔레스]

 

멋 부리길 좋아했다는 노인은 치장하고 시간이 남았는지 책을 썼다. 장르를 막론하고 비평의 『수학의 정석』이자 『성문종합영어』인 『시학』에는 연민과 공포의 차이를 적어둔 구절도 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불행을 당할 때 연민을, 자신과 유사한 사람이 그러할 때 공포를 느낀다고. 지금 다수가 연민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고 있다.

 

‘돈’ 세상의 포식자가 모든 영역에 전염시킨 바이러스는 행정구역과 세대의 경계를 지키지 않을 뿐더러 파괴적인 수레바퀴는 제 스스로 멈추지 못한다. 가로막아선 자를 깔아뭉개는 이유는 급정지하면 전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부신 빛을 향하여 질주하다가 눈이 멀어 암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거대한 수레에 올라탄 채 반대 방향으로 맹렬히 내달리면서 막연히 새로운 삶에 가까워진다고 믿고 있다. 더 지독하게 표현하면, 단맛이 도는 독에 빨대를 꽂고 조금씩, 그리고 계속 빨아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체제의 체면을 생각해주며 잠시 떠나보기만 하는 휴가는 쳇바퀴 위에 올라간 햄스터의 발차기와 다르지 않다. 이런 곳을 잠시나마 외면하고 훌쩍 다녀오겠다는 것이 여행이라면 쳇바퀴로 스트레스를 풀고 충전(아니, 인간이 건전지라도 된단 말인가?)하고 돌아와 다시 발차기를 계속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상은 그런 것이니 당신이라도 제대로 보고 느끼고 살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각자 열심히 살면 결국 세상도 좋아집니다.’ 이런 선전(!)을 믿느니 TV토론프로그램에 나온 정치인이 짧게 한 마디만 더하겠다는 말을 믿는 편이 낫다. 세상은 우리에게 답이 정해진 질문을 퍼붓고 있다. 그렇다보니 행복을 나의 길에서 찾지 않고 타인들의 광장에서 찾고 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근사한 자동차와 작은 궁전 같은 아파트의 주인이 되라고 권하는 광고가 1인칭이나 3인칭 소설보다 오히려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2인칭 소설처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모두가 눈 감은 세상이기에 마음의 눈을 뜨려는 자가 눈 감은 자로 취급당해야 한다면, 어릴 때에 실명했으나 중세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살며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곡들과 노랫말들을 남긴 프란체스코 란디니(Francesco Landini)의 세상을 택하겠다.

 


바질에게 분갈이를 해주고 오랜만에 미용실에 들렀다. 상가 건물의 북향 점포에 입주해 있어 1년 내내 볕이 들지 않는 이 가게의 이름은, 해바라기 미용실이다. 중년 사내가 머리를 맡기고 멀뚱히 앉아 있는 동안 테이블에 놓여있던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신문을 뒤적였더니 소비․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의 변화가 절실하다는 논설이 인쇄되어 실려 있었다. 이 신문에도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기사들이 종종 실리지만 매번 어딘가에 멈춰서거나 말미에 가면 엉뚱한 하수구를 찾아 흘러들어가곤 했다. 문제의식과 자기조건이 어긋난 곳에 북향에 자리 잡은 해바라기가 핀다.

 

영화 <맨 온 파이어>에서 소녀 납치에 가담했거나 돈을 가로챈 부패 경찰들은 크리스(덴젤 워싱턴)에게 응징을 당할 때마다 “내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자기 일을 했을 뿐’이었기에 죄인이 된 것이다. 정치적 문제로 고가도로에서 분신한 남자에 대하여 경찰은 ‘빚 독촉’ 운운하며 언론에 정보를 흘렸다. 밀양에서 거대 송전탑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세상으로부터 숨결을 거두자 언론 담당 경찰은 분신하신 분에 대해선 ‘실화로 인한 사고’ 운운했고, 농약을 마신 농민에 대해선 ‘가정불화’ 운운했다. 아무리 자기네 업무가 사태를 사적인 문제로 축소시켜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라 해도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 망자에 대한 예의조차 저버리는 자들이 과연 인간인가?


[그림 – Paweł Kuczyński]

 

자기 일에 충실했을 뿐이기에 남에게 상처를 주는 부류는 군인과 경찰, 핵 기술자, 철거업자, 정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식 ‘투기’와 부동산 차익에 연연하며 돈을 굴려 덩치를 키우는 프로는 사실 포로일 뿐이다. 선한 얼굴의 금융회사 직원들은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자기 일에 충실한 덕에 어떤 가정들을 파괴하고 가장들을 자살로 내모는 ‘얼굴 없는 잔인성’을 실천해버렸다. <빅 쇼트>가 뉴욕발 금융위기에 대한 리포트라면, J. C. 챈더 감독의 영화 <마진 콜>은 약간의 양심적 가책을 보탠 주범들의 그 날을 그려낸다(이 감독은 <모스트 바이어런트>에서는 착한 기업가의 ‘딜레마=본성’을 지적한다). 여신의 질투어린 저주로 괴물이 되어버린 미녀, 메두사처럼 누구든 원치 않게 악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장기판에서 종횡무진 하는 말도 장기판 밖에선 아이들의 노리감이 될 뿐이다. 많은 사회인들이 물고기를 잡아도 삼키지 못하도록 목을 동여맨 새를 이용하는 가마우지 낚시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영광을 얻었다. 물론 맡은 배역은 어부가 아니다! 기꺼이 이 질서의 일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제 아무리 다수처럼 보인다 해도 적벽의 조조(曹操)군에 지나지 않고, 설령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유방(劉邦)의 동지들과 같은 운명일 뿐이다. 숀 펜과 나오미 와츠, 그리고 베네치오 델 토로의 열연과 “삶은 계속된다”는 대사로 각인된 <21그램>은 할리우드에 입성한 안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작품이다. 그의 <비우티풀(Biutiful)>에는 약자가 약자를 파괴하고 자책하는 비극이 그려진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선구적인 채식주의자였고, 음주를 하지 않았으며,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평생 비혼을 고집했다. 음악과 미술, 영화와 건축에 조예가 있었다. 정치인이 되었고, 마지막 날까지 블론디라는 이름을 가진 애견과 함께 한 그가 속한 정당은 동물보호법의 선례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피폐한 경제를 부흥시키고, 유럽에서 최초로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바그너를 특별히 좋아한 그는 죽는 날에야 오랜 연인과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동반 자살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이다.

역사 속에는 비슷한 살육을 저지르고도 승자가 되거나, 패자였으면서도 뒤에 숨어 그럴 듯한 초상화로 기억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유명한 독재자들은 대개 경제부흥과 국민지지라는 공(功)을 가지고 있다. 히틀러가 그랬고 무솔리니가 그랬으며 박정희도 그랬다. 그들의 공과(功過)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체제와 근본의 가치관으로부터 떼어진 개인적 생활관과 취향은 이토록 허망하기 짝이 없다. 이 구조 안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이룩한 성공과 업적이라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 병사가 나치독일에게 받은 훈장과 같다. 그 영광은 곧 부질없이 사라지고-오히려 불명예가 되고-그저 패전국 전사자들의 묘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뿐이다.

 

요즘 혼용(혹은 혼동)하여 자주 쓰이는 단어인 욕망이 순진한 얼굴의 탐욕을 그럴 듯하게 꾸민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칼을 갖고 노는 아이 같은 현대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욕망에 욕망(실은 욕구)으로 맞서 해결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러다보면 소·돼지·닭을 먹지 않겠다며 말·사슴·꿩을 잡아먹는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린다. 게임의 룰을 바꾸기 두려워 감행하는 일탈 혹은 이탈이 경기장을 벗어나고자 하는 또 다른 욕구에 그친다면 벗어남이 아니라 도망침이고, 놓아버림이 아니라 잃음이다. 그럴 경우 가능한 복수는 이런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테야!’ 그러나 가고자 하는 바로 그곳에 앞서 살았던 이들이 만약 그런 식이었다면 우리가 찾아가고 싶어 하는 바로 그곳조차 없었다. 이러한 벗어남은 비단 거주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은 고맙게도 큰 굴과 덩치 큰 물고기를 원하는 만큼 주었다. 다섯 개의 굴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줄지 않는 기적은 수산물을 좋아하는 내겐 행복한 일이다. 굴비도 흔해졌다. 사치스럽게도 이마에 다이아몬드를 끼고 있으면 국산이라지만 중국 어선들의 활동범위를 생각하면 의아한 구별법이긴 하다. (그들의 불법조업을 강조하면서 한국 어선들이 일본 영해에서 불법조업을 해온 건 외면하는데, 이런 경우가 많다. 왜구와 유사한 신라해적이 존재했고, 한국군의 월남전 만행은 사실이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자국의 일본인들을 수용소에 집어넣었으며, 지성인들의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100만 명을 학살했다.) 그보다 자연산과 양식의 차별이 더 흥미롭다. 자연산 여부에 따라 다이아몬드도 보석이 되거나 공업용이 되고, 일종의 양식 산인 인삼보다 산삼이 귀한 대접을 받으니 자연산이 더 좋긴 한 모양이다. (그런데 산삼이 그렇게 찾기 힘들다면 희귀식물이란 얘기고, 그러면 보호해야지 않은가?)


[그림 – Paweł Kuczyński]

 

하지만 정작 양식되는 건 우리다. 아이들은 더 커지고 하얘졌다. 양식된 굴처럼! 세상을 덜 아는 아이에게 꿈을 묻는 건 간혹 이상형이 뭐냐는 질문처럼 그런 것이 있어야할 것만 같은 강박을 준다. 이 성급한 물음에서 ‘꿈’은 ‘생계를 위한 일’의 줄임말로 통용된다.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정도는 순진하기라도 했지만 지금은 어떤 수식이 붙는지 모르겠다. ‘난 떡을 썰 테니 넌 글씨를 쓰거라’던 이야기도 수상하다. 과거시험의 답안지는 감독관이 옮겨 적기에 채점자는 글씨를 볼 수가 없었다. 석봉이와 엄마의 복불복게임은 다른 깊이의 결전이었던 셈인데, 공부=기능 등식의 생산 팩토리가 이상하지 않은 걸 이상하게 만들어놓았다. 누구든 한번쯤 사행시(司行試)를 상상할 정도로 문학을 사랑하는 사회라지만, ‘먹이기’ 그리고 ‘키우다’가 아이와 나무에게 쓰이는 건 의미 있지 않았는가.

 

부지런한 사회는 미덕을 빠르게 전파했다. 한때 그토록 강조한 절약과 검소는 특별한 경우로 한정된 대신 소비하라고 다그친다. 소비가 줄어들면 주름이 느는 나라를 위해서라도 필수품이 된 사치품처럼 쓸모없는 물건을 빚(카드·할부·대출)으로 사주는 도전적인 생활방식이 자연스러워졌다. 비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돈더미 위에 눕고 있으니 얼마나 푹신푹신할까. 강 아래에 지하로부터 세워진 높은 호화분묘에 들어가거나 거리낌 없이 위화감을 조성하는 걸 영예로 여기기도 한다. 지옥이 있다면 우주 너머 어딘가가 아니라 지구 내부에 있으리라 상상했다. 그 지옥에서 만들어진 연료를 먹는 기계를 틀어 막힐 것이 뻔한 길에 매일 고집스레 끌고나오는 불굴의 정신은 존경스럽다. 대중교통으로 다니기 어려운 곳이 많다던데, 그렇다면 국토를 단숨에 종단하여 소매물도까지 다녀오는 기행을 저지른 나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아니, 송석 여행 때에 자욱한 바다안개로 뒤덮인 갈목 해안길을 술에 취하여 걷지 않았다면 그 공기를 마시지 못했을 테고, 아예 차와 함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쳐 모래사장에 처박혔을지 모른다.


[그림 – Paweł Kuczyński]

 

오늘도 101호부터 1804호까지 온갖 사료가 공급되고 내일이면 그만큼의 쓰레기와 분뇨가 배출될 것이다. 비대한 육식공룡들의 양식장에선 초식동물과 원주민의 소식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누가 더 가지면 누구는 덜 가져야 하는 질서 속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가난해야 한다. 증산과 개선은 같지 않고, 체제는 인간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돈이 사람을 소유하기 전이었다면 어떤 나라 사람들은 양궁경기장에서 상대팀이 활시위를 당길 때에 소란을 피우는, 수치스러운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에 망가진 인간규범은 회복되기 힘들다. 싱가폴에서 한국의 노숙자 사진을 교과서에 올렸다고 법석을 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안부를 묻는 만남의 장이었던 시장에서 이제 물건을 태운 카트의 운전자들이 무심히 주행한다.

 

시장에서 팔리는 건 소와 돼지, 그리고 닭의 사체만이 아니다(그들은 20년까지도 살 수 있으나 6개월이면 요절해야한다). 도구의 도구가 되어 돈과 성공에 먹혀버린 사람들은 결혼으로 연봉과 신분을 교환하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다파는 요령을 익혀 유능함을 인정받아야 한다. 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욕심을 채우려하면 넘어지거나 깨지면서 추해진다. 사람은 한순간에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기꺼이 타락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가 타락한다. 그런 사람을 몇 알고 있으나 아직도 미소로 인사하는 건 그만큼의 인간적 감정이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하고 용감한 지네닭도 결국엔 잡아먹히게 되어 있다.

 

한 사람은 시민이자 노동자이고, 소비자이자 시청자이고, 학생이거나 예술가 등등이다. 그 중 단 하나, 취업이나 사랑에 실패했다고 루저(looser) 자격증이 손에 쥐어지진 않는다. 자기가 먼저 낚아채면 모를까. 과욕을 부리지 않으면 자책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괜한 욕심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포기와 실패는 같지 않다. 꼴찌를 응원한다고 꼴찌가 아닌 것처럼, 깨어나 느리게 움직이는 삶은 굳이 자랑할 거리는 아닐지라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쓸모없었기에 베어지지 않고 크게 자랐다는 나무 이야기는 오래된 책에만 숨어있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길옆에 표지판을 설치해두었다. 그리고 그동안, 특히 요 몇 년 사이에 만난 현명한 이들은, 아니 수천 년 전부터 어떤 이들은 하나같이 삶의 가치를 재설정하고 있었다. 소망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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