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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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입니다.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메모

에너지는 전체를 설명하는 이어진 선이다. 범신론, 가이아, 생태학에 대한 연구는 동양에서는 타파를 거칠 필요가 없었고, 자연스러운 일상에 의하여 인간 개체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실제로 이에 대한 통찰은 순간적이고 연속적이다. 마음과 사고를 뛰어넘는 이러한 연결성과 일체감을 투사한 개념이 ‘나들’이다. 존재 간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은 각각의 세계에서 인식론으로든 존재론으로든 최고의 지위를 갖는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모여 세계인지를 구성하며 그 전체에 각 존재자들은 도구 또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이다. 그 각각과 통합된, 사실은 애초부터 하나인 하나가 ‘나들’이다. 실제 각각의 존재들이 또한 독립적인 위치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과 휴머니즘을 넘어선 생태학적 연결을 위한 표현이다. 이는 이질적인 존재론과 동양적 일상의 만남이며, 서구의 이원론 속에서도 표현되는 감정의 일체감, 즉 감동과도 통한다. (1994-1995의 메모)

 


ⓒ나도원

 

꽃은 꼭 열매를 맺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물론 이것은 인간과 벌의 생각이다. 식물은 구경거리나 먹잇감을 위하여 그토록 어려운 일을 할 정도로 한가롭지 않다. 나와 너,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알아야 자기가 처한 상황이 아니어도 공감할 수 있고,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니어도 반성할 수 있다. 아픔과 공감의 눈물을 나누는 그리움과 기다림은 이어짐에서 비롯된다. 역사의 이어짐을 알면 분노할 줄 알게 되고 사람과의 이어짐을 알면 사랑하게 된다. 다음세대와도 연결되어 있으니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과 이주여성들에게서도 우리를 본다. 우리도 그랬으니까. 먹고 살기 힘들 때 남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나갔고 여자들은 외국인과 결혼하여 이 나라를 떠났다.


ⓒ나도원

 

오래 전에 ‘민원인’이라는 제목으로 남긴 메모가 있다. “늙은 아저씨가 면사무소를 찾았다. 검붉고 마른 몸에 어색하게 걸쳐진 정장은 어떤 자존심의 보루처럼 보였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얼굴이긴 했으나 그 때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사실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복지팀에서 생활보조금대상에서 제외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의를 했으나 그다지 설득력을 발휘하진 못하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더니 분을 이기지 못한 듯 ‘나도 옛날엔 공장장이었어!’라는 맥락 없는 항변을 내뱉었다. 어색한 정장과 함께 서글프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를 어디에서 봤었는지는 바로 다음날 확인되었다. 내가 자주 지나던 길에서 리어카를 세워놓고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그 역시 나였다. 모두가 나, 즉 ‘나들’이다.

자연이란 말은 마치 돌부리나 주마등같은 단어처럼 되어간다. 길을 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는 일은 없어지고 주마등을 본 사람도 사라지자 체험 없는 습관적인 표현으로 남아 문장의 장신구가 되는 것처럼, 자연은 진부한 말이 되었고 사회에 무관심한 태도로 오해받기까지 한다. ‘하나됨’이 아니라 ‘하나임’에 대한 인정은 신에의 도전이 아닌 낮아짐이고,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 아닌 사회구성원이자 자연구성원으로서의 자각이다. 그러나 역시 너무나 진부해진 단어, 깨달음은 아무리 많은 답을 얻는다 해도 질문이 끝을 모르고 늘어나는 지식과 다르다. 종종 답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이것이 선문답과 괜한 농담, 투철함과 기회주의, 자신감과 두려움, 안정과 공허의 차이를 만든다. 여기가 황폐한 번식을 넘어설 출발점이자 귀로이다.

 

그래서 정치·경제적으로는 나눌 수 있어야 하고, 사회·문화적으로는 이어야 하며, 개인적으로 비울 줄 알아야 한다. 생태·환경의 문제 역시 약자에 대한 지배와 수탈, 나와 남의 분리, 자본의 전지구적 지배와 연결되어 있고, 어떤 책에 ‘인간의 억압체제와 대지의 억압 간의 관련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 있는 정치행동의 전략과 계획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구절이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자연의 살집을 파헤치는 삽질에 대한 반대가 누구에겐 특정 정권에 대한 반대 차원이기도 하지만, 크게는 사회구성원들을 물들인 성공 경쟁 개발 탐욕의 가치관과 새로운 공존의 가치관이 대결하는 사건일 수도 있다.

 



ⓒ나도원

 

강을 찢는 것은 자연의 운율을 빼앗는 것이다. 생명의 음악을 부수는 것이다. 우리 역시 세상이 씨앗을 뿌려 각자가 생겨났지만 스스로 물을 주며 가꾸고 자연과 함께 자신을 만개시킨다. 이러한 성찰이 가능한 반성 없이는 질적인 차이가 없는 (웰빙 류의) 유행만 뒤따를 뿐이다.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다녀오는 걸음, 남긴 글, 사진, 기억은 엮이지 못한 파편들로 이루어진 흔적으로 추락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체감하지 못한 언어들을 쏟아내는가. 그러나 현란한 수사로 범벅된 어린 글의 가벼움과 체화된 언어만 사용하며 말을 아끼는 나이든 글의 깊음, 즉 나이의 무늬(年輪)를 살펴볼 줄 아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지혜와 자비가 떼어질 수 없다는 부처의 가르침, 믿음과 사랑이 따로 있지 않다는 예수의 언행과도 연결된다. 지식과 실천 역시 분리될 수 없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을 지적하는 매체가 없다” 혹은 이와 비슷한 표현을 유독 즐겨 쓰는 인사들이 있다. 그들은 공히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공히 게을러 보인다. 자기들 말고도 그런 문제를 인식하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으며, 그런 글이 실리는 매체가 없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게으름이고, 알면서 무시한다면 독선이다. 모름지기 독선은 게으름에서 비롯되고, 게으름은 독선을 합리화한다. “어디엔 관심을 가지면서 어디는 모른 척 하니 가슴 아프다”, “어디엔 목소리를 높이면서 어디는 외면하는 세상이 한심하다”, “어디엔 몰려가면서 어디에는 모이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처럼 너무 오래되어 발효되어버릴 지경인 이런 사고와 화법이야말로 문제가 있다.

 

이미 남과의 비교에서 벗어나 다른 삶의 선택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운전면허 소지자가 늘어나는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분리의 역사를 넘어 가치체계와 생활방식과 사회구조에 대한 반성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비울 줄 알면서 자연을 가까이 하며 ‘맨발로 살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찾아보면 많다. 첨벙거리며 늪에 발을 담그고 바짓가랑이를 적실 정도의 애정과 책임감을 지니고 ‘놓인 곳에서 가꿈’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생각을 바꾸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생겨난다. 길을 걸으며 ‘여기 한 사람 있소!’라고 말하면, 또 누군가 ‘여기에도 한 사람 더 있소!’라고 말하고, 그들을 보며 또 다른 누군가가 ‘여기에도 한 사람 또 있소!’라며 만나는 장면을 꿈꾸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여행이다.

이런 생각은 방향성만 있고 목표 설정은 꺼리는 노마디즘의 일각과 무정부주의 중 관념파와는 다르다고 확신한다. 또한 과거의 나쁜 조건이 사라지고 더 나은 조건이 조성된 뒤에 일시적으로 가능한 평화 상태와 공동체의 ‘오래된 미래’를 모델로 삼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시골의 평화 이전에는 독재의 강압이 있었고, 그전에는 전쟁의 피바람이 있었고, 그전에는 제국주의의 침탈이 있었고, 그전에는 봉건체제의 수탈이 있었다. 인성과 공동체 의식은 좋았을지라도 삶은 팍팍했다. 비슷한 한계는 선진국에 사는 여행자들이 여행 중에 오지의 행복에 찬사를 보내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지켜내고 재현해야 할 가치와, 대안으로 제시해야 할 지향을 구분하지 않는 ‘취향의 정치’는 대규모 인구와 노동과 생계와 교육 그리고 복잡해진 사회·경제구조의 문제 그리고 중요한 복지재원, 무엇보다 끝없는 죽음에 해답을 주지 못한 채 자기만족에 그친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장자·장녀 상속제와 그 나머지 가족을 흡수해준 사원처럼 종교적 장치들을 부활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과거나 미래에 이상사회를 설정하지 말고 지금을 살아야 한다. 과거를 낭만화 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시-새로 만들기가 아니라 처음-새로 만들기라는, 무서운 사실을 무겁게 인정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여기에 대한 좀 더 딱딱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나중에 다시 하게 될 것이다. 이제 완전히 들통 났듯이, 그럴 듯하게 중언부언하는 비법을 터득해가고 있는 중이다.

 



ⓒ나도원

 

인간에게 잠은 절전모드이고, 꿈은 형광등 잔광현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꿈은 열쇠이자 통로이다. 꿈을 꾸면서 너무 피곤하여 어디든 누워 자려들거나 술에 취해 있는 기묘한 상황도 겪었고, 아예 꿈속에서 잠이 들면서 깬 적도 있다. 같은 장소에서 스토리가 이어지는 미니시리즈처럼 각양각색의 꿈들에 대해선 유사사례를 공유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꿈속에서 꿈을 꾸는 꿈도 종종 꾼다. 한번은 꿈속에서 아이의 꿈속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오두막에 가족이 모여 있었고, 어린 조카인 우재가 깨어나 울었다. 한창 재미있는 꿈을 꾸고 있었는지 원망하듯 울었고, 나는 마법의 물을 뿌려 다시 잠들게 해주곤 꿈이 궁금해 따라가 보았다. 잔디가 깔린 초록빛 공원 여기저기에 장난감 생명체들이 나타났다. ‘아이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세계는 이런 것이겠구나’ 생각했다. 또 한 번은 머리를 벅벅 긁다 잠이 들어 당면한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꿈을 깨고서 허탈해하기도 했다. 그리고선 반쯤 정신이 돌아온 상태로 ‘벽지 매직아이’에 열중했다.

 

사람은 간밤에 꾼 꿈을 줄거리 중심으로 기억해보는 습성이 있지만 눈앞에 펼쳐진 은하수, 방 안에 들어온 제비집,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있는 자동차, 증기를 내뿜는 지하철, 머리 위의 떠 있는 연못,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는 거대한 성처럼 실제에선 볼 수 없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나보는 것, 그것도 꿈이 신비로운 이유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장면들을 눈앞에 펼쳐놓곤 했다. 다른 책에 쓸 이야기를 여기에도 적어둬야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여준 물에 살짝 잠긴 철길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게다가 사실적인 재현, 예를 들어 <이웃집 토토로>에서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시골 들녘의 색조는 지독하게 사려 깊었다. 거기에 말이 되는 줄거리까지 갖춘 ‘이야기’가 있었기에 감동으로 치닫게 했다. 묵시론 서사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가 진한 울림을 남긴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이웃집 토토로>가 행복한 웃음 뒤에 남겨준 여운은 어떻게 만들어졌던가. 독창성과 이야기에서 나왔다. 만약 이런 걸 무시하는 게 여유라면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걸 부수는 게 실험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자, 그러면 헛된 꿈은 무엇이고 가치 있는 꿈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하여 현실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절망과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공존한다. 객관과 사실로는 절망해야 합리적인 판단이란 걸 알면서도 의지로 버텨야 하는 상황과 끊임없이 마주한다. 수십 년을 기다려도 된다는 자들이 부럽다. 그동안 무수히 많을 하루하루의 절박함을 짊어지지 않은 자들이 부럽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밖에 없다.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사실상 잔소리를 듣다가 쓰러지는 친구를 못 본 척 하는 조회와 같은 이 사회에서 뒷자리 친구들의 정말 쓸모없는 ‘짓’들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결국 세상을 바꾸었다. 그래서 내게 여행은 거대한 구조의 틈을 찾아내는 ‘짓’이다. 누군가는 몽상이라 말한다. 그런데 음악가, 미술가, 작가, 예술가, 혁명가에 붙는 ‘가’가 몽상에도 붙어 몽상가를 만든다는 사실은 흥미롭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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