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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입니다.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소문

 

– 새로운 소문 –

운다.

쉼 없이 잡담을 늘러놓는다.

그러나 듣는 이가 없다.

그래서 그의 소문은 초라하다.

낙엽들이 쓸려간다.

마르틴의 생각은 엉터리라고 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나들을 처량하게 만들어버린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 소문의 체험 –

낙엽이 내린다.

모든 건 거기에 있다.

여기저기서 배회하고 있던 잡담들이 들리고

여기에 가득 찬 소문들을 만난다.

나와 나들은 여기에 있다.

낙엽이 내리고 흐르고 소용돌이치고 다시 낙엽이 내린다.

– 1994년 11월 30일 –

 

 

휴가철 유명 관광지에서 무엇부터 봐야할지 두리번거리는 습성은 이 사회에서 자신이 무얼 찾고 있었는지 찾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 일상에선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일단 급히 가야만 한다. 여행지에서도 마치 재난영화의 막바지에 큰 문제가 해결될 때에 꼭 등장하는 상황실의 환호장면 같은 것을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고는 거기에서 만들어지지도 않은 기념품을 사서 돌아온다.

아마 여행자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와 더 가까운 공장에서 만들어진 후에 더 일찍 배송되어 관광객들의 결제를 기다리며 진열대를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가는 관광지를 찾아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굳이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방해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만한 재미와 그런 방식이 더 적합한 분들이 계시다. 하지만 걸음이 느려지는 곳도 있다. 가장 느린 걸음과 동작을 볼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다.

 

그곳은 광릉숲 아래에 있다. 1468년 조선 7대 왕 세조가 광릉의 부속림으로 지정해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한 포천시 광릉숲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임업 시험림 구실을 해온 덕에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웃한 남양주시 진건읍에는 광릉의 주인인 세조 때문에 죽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묘(사릉)가 있다. 그리고 그 뒤 인적이 드물고 더욱 외진 곳에 광해군묘가 있다. 이들이 사후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리고 남양주시 마석에는 전태일와 여러 민주열사들의 묘지인 모란공원이 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곳은 세조의 광릉과 정순왕후의 사릉을 잇는 길목에 있는 사찰이다.

간혹 찾는 남양주 봉선사에서 맞은 어느 일요일 오후, 철이 되면 등을 띄우는 ‘연’못 옆길의 풍경을 동반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후에 아무런 계획 따위 없다는 듯 세상 가장 느린 발걸음을 보여준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과 그 뒤를 걸어가는 사람이 뒷짐을 지고 걷는다.”


어떻게 사는가와 어떤 여행을 하는지는 엮여 있다. 탈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에 『결국, 음악』에 썼듯이, 이름 없는 여행지에서 마주한 비경에 감탄하는 것과 숨겨진 음악을 찾아내고 감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 또한 인적 없는 곳에서 부르는 노래의 아름다움은 소중하다. 기억과 생활과 관계, 즉 삶이 사람이요, 노래는 사람의 사랑이고, 그 모두가 하나의 여행이다. 결국엔 목적지에 도착해서 허무함을 토로하는 여행전문가들이 많은 이유도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사회의 바깥에서 무언가를 찾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에게 여행을 의미하는 ‘돌아․가다’는 세 가지 뜻을 지닌다. 귀환을 의미하는 ‘돌아가다’, 우회를 의미하는 ‘돌아서 가다’, 그리고 죽음을 의미하는 ‘돌아가다’이다. 이 셋은 하나로 통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서 ‘가화’는 ‘만사성’이라는 목적을 위한 전제가 아니다. ‘가화’없이 만사성이 무슨 소용인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수신’은 ‘평천하’라는 목적을 위한 전제가 아니다. ‘수신’ 없이 ‘평천하’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지나온 길과 시간을 돌아보는 행위를 동반하는 여행은 자신의 바깥으로, 내 환경과 다른 어딘가로 떠나보기가 아니라 익숙함을 새로이 재발견하고 연대를 확인하는 돌아가기다. 답습이 아니다. 타인이 나의 기준이 되는 의식의 전환이기에 각인되는 첫사랑의 경험에 더 가깝다. 몸을 움직이며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마음속에 감추어진 여행지를 찾아가는 운동이다. 미개척지는 그대로 놔두는 여유까지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다. 기존의 기준과 다른 삶을 지향하면서 멋도 중시하는 삶은 가능하다. 대개의 남자와 여자가 등 떠밀리듯 관성적으로 가게 되는 코스가 있지만, 가드레일을 이탈해 다른 길을 걸어도 괜찮은 경치를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성공했다고 믿는 자는 정성스레 가꾼 잡초-밭을 자랑하기도 한다. 하긴 성공이란 농사와 비슷하다. 좋아하는 작물을 심어 기르는 밭 가꾸기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텃밭을 가꾼다. 그럴듯한 농장이나 정원을 꿈꾸지만 늘 텃밭이다. 그러나 거둬서 자신이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고, 더 잘 가꿔 이웃에게도 나눠줄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굳이 말해야 한다면 성공이다.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이자 늙은 배우이기에 만들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온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달러 베이비>에는 파격과 연륜이 함께 있다.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매기에게 여자가 권투를 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매몰차게 몰아세운다. 그 때 그녀가 울먹이며 했던 말, “서른 두 살이라서 권투를 할 수 없다면 나에게 남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당신은 어떠한가?

 


별자리

 

“조정은 매우 더럽고 밭은 심히 황폐하며 창고는 텅 비었는데, 예쁜 비단옷을 입고 좋은 보검을 차고 음식을 배불리 먹고 재물은 남아돌아간다. 이를 도둑의 사치라 한다. 도(道)가 아니로다.” 『노자(老子)』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은 자연의 본성을 어김과 같고,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지 않는 것은 억지로 무위를 가장했기에 역시 본성을 어긴 것이다.” 『장자(莊子)』

“세상의 부가 10명 중 1명에 집중되고 있다 … 부양가족이 없어도 10~15년 동안 일해야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다 … 사업을 하면 100명 중 97명은 실패한다.” 『월든, 헨리 데비잇 소로우』(1854년 미국)

 

“맑은 물엔 고기가 없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처럼 익숙한 격언의 출처는? 각각 공자와 노자이다. 어느 날 저녁에 문득 <묵자>를 펼쳐 들었다가 꼬박 밤을 새웠다. 그 다음날 저녁에는 <한비자>를 꺼내 들었다가 또 꼬박 밤을 새웠다. 누구에게나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읽는 책이 있을 터인데, 내게는 <신약성서>와 동양고전이 그렇다. <장자>는 어느 장을 펼쳐도 익숙하고 <노자>는 외우다시피할 지경이 되었다(이 기회에 보태면 ‘노장’은 결코 현실도피사상이 아니다). <명심보감>은 부담이 없어 쉼이 필요할 때면 펴든다. <묵자>는 몇 백 년 앞선 예수(와 제자들)의 <신약>, <한비자>는 2000년 앞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랄 수 있다. 평등․겸애․반전사상을 골간으로 한 묵가는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공동체 결사로까지 이어졌다. 예수의 경우도 그러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묵가는 과학적이고 전투적인 행동파였다. <한비자>와 <군주론> 역시 당대 혼란한 시대상황과 현실 타개책으로, 그리고 독자(군주)를 위한 ‘술(術)’로 통한다.

 

그런데 잘못 읽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 한 권력자가 <군주론>을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거론한 적이 있다. 그것을 떠올리면 그의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인민을 대하는 태도와 정치인을 대하는 태도는, <군주론>과 <한비자>에서 임금이 백성을 대하는 태도, 신하를 대하는 태도와 흡사하다. 박근혜의 정치는 ‘<한비자>와 <군주론>을 2500년 전 중국이나 500년 전 이탈리아가 아닌 21세기 한국에서, 자기위주로 읽은 자가 할 법한 정치’이다. 지배자를 위한 차가운 ‘법치’와 권력자를 위한 불신의 ‘술’을 실천 중인 박근혜는 왕권을 회복한 왕의 후손, 즉 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건 아닐까. “나는 왕이로소이다!”

 

대신 <명심보감> 한 구절을 보탠다. “작은 배는 무거운 짐을 견디기 어렵고, 으슥한 길은 혼자 다니기에 좋지 않다.” 분수에 맞게 처신하고 조신하라는, 군자의 길은 그와 다르다는 뜻으로 읽는다. 자리가 사람을 찾아간다. 그 반대 경우엔 탈이 나거나 설령 누리더라도 미움을 이고 산다는 소리와 통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에는 혼자서, 독선으로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읽혔다. 커 보이나 별 것 아닌 일이 있고, 작아 보이나 중한 일이 있다. 끼리로는 짚을 수 없다. 충분히 경험했고, 실제 사례를 또 보았다. 이 길에 돌부리가 숱하다하여 잘못된 길이라 할 순 없지 않은가.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은 이러한-인간이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한 인간투쟁의 표현인데, 오늘날 예술의 효과는 그저 비속한 처지를 편안한 것으로 만들어 더 높은 경지를 잊도록 하는 데에 있다.”

 

앞서 오늘날과 똑같은 현실을 개탄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러한 예술론을 펼친다. 또한 내가 동질감을 갖는 인물들 중 한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는 노조활동가였고 사회주의자이자 생태주의자였으며,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이러한 사상과 태도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떼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좌파와 거리 두려는 생태주의, 생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주의에겐 공통점이 있으니, 진부함이다. 진보할 수 없는 진부이다.

 

첫 숨과 마지막 숨은 같은 데서 와서 같은 데로 간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평등평화 세상을 바란 노자의 무정부주의, 자연을 애찬하며 인민의 권리를 주장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 그리고 미야지키 하야오, 국경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던 존 레논과 자유로운 공동체를 지향한 플라워 무브먼트, 이 점들을 이어 별자리를 그려본다.

 


봄의 투쟁

 

바로 그, 1982년에 800원을 주고 산 『명심보감』에는 ‘생사사생 성사사성(生事事生 省事事省)’ 즉, 일을 만들면 일이 만들어지고 일을 덜면 일이 덜어진다는 말도 있었다. 나로 하여금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가며, 그렇기에 자신의 의미는 다른 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할 시간은 필요하다. 이기기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적을 만난다는 ‘호승자 필우적(好勝子 必遇敵)’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다. 애초에 용서할 일이 적은 삶이면 좋겠지만 어디 그러한가. 더욱이 이기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세계가 있다.

 

산은 죽음 속에서 삶이 피어오르는 곳이다. 흔히 봄 앞에 ‘만물이 소생하는’이란 수식을 붙이지만, 아지랑이 아래에는 힘겨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작은 벌레들은 깨어나 아무도 몰래 집을 짓고, 주어진 만큼의 날들을 위해 힘을 다해 싸우네”라고 노래한 ‘봄’은 싱어송라이터 이장혁이 2008년에 발표한 [이장혁 Vol.2]에 실린 쓸쓸한 곡이다.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스러져갈 무렵, 어딘가에 앉아 생각을 멈추고 바람을 맡으며 듣기에 좋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새봄이 오기 전까지 뿌리 한 가닥 내릴 흙 한줌 얻지 못한 사람들은 차례로 벚꽃처럼 스러져 ‘모란꽃 피는 공원’으로 가야 했다. 그들이 보지 않겠다고 숨을 돌려버린 봄날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봄은 눈의 계절이다. 벚꽃이 질 적엔 분홍 꽃눈이 날리고 아까시꽃이 질 무렵엔 하얀 꽃눈이 내린다. 그래서 또한 봄은 눈물의 계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와 추도식을 같은 날에 지내야 하는, 그런 계절이다. 지금도 산에서, 도시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봄을 위한 투쟁(春鬪)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 봄은 마냥 기다린다고 절로 돌아오는 계절이 아니다.

 

“활은 휘어지고 활등이 울린다. 최고도의 긴장의 절정에 이르러 곧은 화살은 더없이 억세고 자유롭게 비약하여 날아갈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반항적 인간』 마지막 구절이다. 유람과 떠나보기만 가능할 것 같은 세상에도 자신의 몸을 팽팽하게 당겨놓은 반동분자, 반동의 동반자들이 있다. 등을 보이는 자들에는 두 부류가 있다. 방향을 튼 그들은 도착지가 어딘가에 따라 배신자가 되기도 하고 선구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여행은 등이 아니라 옆얼굴을 보여주며 함께 걷는 것이다. 이 사건에 연루될 공모자는 항상 모집 중이다. 가입원서는 마음대로 작성하여 자신에게 제출하면 그만이다. 꽃은 땅에 떨어져 썩었고, 바로 그 자리에 열매는 씨앗을 품고 떨어지고 있다. 걸음 하나하나가 봄-빗방울이 되어 귀하고 여린 작물을 키운다. 좋은 나무를 심었으니 열매가 맺힐 것이다.

 

다리는 땅을 딛되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마음은 홀연히 놀되 몸은 뜨겁게 싸우는,

길(道)

[2009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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