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의 동반자 1편 : http://2-um.kr/archives/5991
반동의 동반자 2편 : http://2-um.kr/archives/6027
반동의 동반자 3편 : http://2-um.kr/archives/6054
반동의 동반자 4편 : http://2-um.kr/archives/6087

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입니다.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요정은 발목만 드러내고 있었다. 노을에 물들어가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달리는 버스 안에 붉은 빛이 감도는 순간만큼은 승객들 모두가 착한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 한 아주머니는 전화기에 대고 소녀처럼 “옥상에 올라가봐. 양수리 쪽으로 무지개 떴어!”라며 누군가에게 급보를 전했다. 지난밤에 본 야동을 되새기는지 앞좌석의 뒤통수를 열심히 응시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버스 안에는 이유가 필요 없는 평화가 감돌았다.

 

비가 그치자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개천을 이루기 시작하는 숫돌모루의 어린 물고기 떼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형제인양 크기가 한결같은 녀석들이 수량이 적어 연못처럼 되어버린 다리 아래에서 한가득 헤엄치고 있었다. 저수지의 한을 풀기 위해 그물이나 뜰채를 이용해 횡재를 해볼 마음을 슬쩍 품긴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은 사이에 비가 쏟아졌고, 그 아이들은 불어난 물을 타고 죽음의 마수를 벗어나 멀리 왕숙천까지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그 다리에 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산등성이들이 있다. 도로에 의해 잘려나간 손가락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천마산의 끝자락이다. 비 오는 날에는 평지 자체가 해발 60~80미터인 지역에 일어난 산자락답게 조심스레 뜯어 뿌려놓은 고운 솜처럼 구름들이 여기저기에 걸쳐지며 구름산이 된다. 그리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다가도 밤이 되면 연하고 어두운 색으로 변장하여 저 멀리 고원처럼 아득히 멀어져 간다.

 

* 16세의 주디 갈런드(Judy Garland)는 자신이 <오즈의 마법사>를 위해 부른 노래가 아카데미에 의하여 호명되리라고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와 당대의 사람들은 ‘(Somewhere) Over The Rainbow’50년 후에 화려한 록 기타 연주곡이 되리라곤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전음악과 팝 클래식을 기타 연주곡으로 변형시킨 사례는 무척 많다. 하지만 별개의 곡에 가깝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경우는 많지 않다. 임펠리테리(Impellitteri)는 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넘어 재창조에 성공했고, 기교의 시험이 아니라 예술성과 대중성의 성취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깔끔한 톤과 정교한 연주가 서정성을 잊지 않은 ‘Somewhere Over The Rainbow’는 어떤 이들로 하여금 명작 [Stand In Line]을 찾아 나서게 한, 갑작스러운 회오리바람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사는 곳 역시 숲의 연장이 될 자격을 조심스레 얻어가고 있다. 지은 지 십여 년이 넘어 나무들이 꽤 자랐을 뿐만 아니라 간격을 맞춰 은행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대신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면서 소박한 공원이 만들어졌다.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꽤 있고 산과 논이 가까우면서 천적들은 오지 못하는 안전지대라선지 적지 않은 새들이 입주하여 둥지를 틀었다.

 

그 덕에 새벽에 현관을 나서면 나뭇잎에 달린 이슬을 떼어먹거나 연한 이파리를 뜯는 작은 새들을 구경할 수 있다. 벤치에 누워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나는 바람을 볼 수도 있다. 어떤 나무를 세차게 흔들면서 바로 옆은 그대로 두고 비껴가는 정교한 바람의 걸음에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이런 재미로 대부분의 주말을 여기에서 보내고 있다. 자주 찾아서가 아니라 여기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조그맣고 동그랗게 생긴 동고비가 목소리만큼은 새벽 정원에서 가장 돋보인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응원단장이라도 되는 듯이 “재잘재잘 뷔-뷔-뷔-”거리는 동고비의 목청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까치 떼와 당당히 겨룰 만큼 위력적이다. 주황빛 배를 내보이며 아직 파란 단풍나무 속을 자유자재로 뛰어다니는 곤줄박이 커플을 보고 있으면 유독 새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기린이나 사슴, 물소와 코뿔소 애호가가 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이 한몫하고 있다지만 분명 새들에겐 그들만의 정겨운 매력이 있다.

인공마저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산줄기의 대미이자 출발점인 천마산의 복숭아뼈와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막내 봉우리에게 마음대로 ‘석봉달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사적인 연유와 정확한 설명을 절묘하게 담아낸 이름이라 자부한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 작은 갓머리는 바위들을 이고 있으며, 특히 상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손을 벌려 물을 담아두고 둘레를 이끼로 치장한 것으로도 모자라 돌 틈에서 자라는 식물까지 거느리고 있는 바위는 무척 감동적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달과 목성이 발사되듯 떠오른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니 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석봉달봉을 종종 올랐다. 경사는 급해도 30분 이내에 오를 수 있으며(연리지가 문 역할을 하는 코스로 오르면 15분밖에 안 걸린다), 해발 300미터가 조금 되지 않는데도 겁도 없이 서울타워까지 보여주기에 탁 트인 시야를 선물 받을 수 있다. 어쩌다 어둑한 저녁이 되어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굴러 내려오기도 했고, 먹구름이 몰려들어 빗방울이 나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맹공을 퍼부을 태세를 취해 도망치듯 황급히 내려오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낙서를 두개골 어느 구석에 해댄 공간이다. 아래 문장들도 그 오솔길에서 담아왔다.

 

숲길을 오르다 나뭇가지 위에서 벌어지는 찌르레기 떼의 소란스러운 숨바꼭질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알토 오카리나 소리 비슷한 멧비둘기의 점잖은 수다와 때 이른 매미소리 같은 곤줄박이의 지껄임을 엿듣는다. 늦봄에는 산타클로스의 젊은 시절 웃음소리 같은 검은등뻐꾸기와 꾀꼬리의 울음이 한창이다. 한참을 바위 위에 새 모양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나도 좀 끼워달라는 양 새소리를 흉내내가며 염탐했다.

 

휘파람새 같은 기교파를 흉내 내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새들에게도 방언이 있어 더더욱 힘든 공부지만 그럴만한 가치는 있다. 일본어를 일찌감치 배우고 “오이찌 오이찌 오이찌” 외치는 녀석은 분발하라고 다그치기까지 한다. 거기에서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옛말의 연유를 연구하면서 본시 휘파람이 새소리를 흉내 낸 것이니 뱀의 비늘에 파동을 일으키지 않을까라는, 확인되지 않은 결론을 얻었다.

 

여기에서 이어져 점점 높아지는 산등성이는 씩씩한 병풍처럼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특별하다고까지 하기에는 솔직히 주저된다. 그리 멀지 않은 팔현계곡처럼 야생화들이 봄을 채우고 단풍나무들이 가을을 물들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중턱 너머까지 차도가 뚫린 것도 모자라 신작로처럼 되어버린 천마산의 동편보다는 낫다. 마라톤 행렬처럼 앞사람의 등과 엉덩이에 코를 박고 허옇게 죽어버린 유명한 등산로를 오르느니 호젓하고 평범한 산길을 걷는 편이 더 가치가 있다.

건강이나 극기는 산행의 목적이 아니라 덤일 뿐이다. 오히려 산은 허락 없이 자기 팔과 다리를 간지럽게 하는 사람들의 무릎을 상하게 만드는 심술을 부린다. 좀 더 그럴 듯하게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글쎄, 모든 활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생산적 활동일 필요가 있을까. 그런 강박이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괴로워하는 생활, 즉 기계덩어리 같은 사회 속에서 당하는 집단적 고문에 무감각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스포츠 보기를 즐기는 팬들이 정작 운동부족과 과잉섭취에 시달리는 현상에 대한 긍정은 아니다. 오죽하면 유럽에선 TV를 켜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닭다리와 피자를 질겅거리는 스포츠팬들에게 운동하자는 캠페인까지 벌였겠는가.

 


석봉달봉을 떠나 이따금 다람쥐를 구경하면서 맘대로 정한 보폭을 따라 천천히 오르막과 내리막을 견디고 나면 쉬어가라고 준비해놓은 듯이 크고 널찍한 평상처럼 생긴 바위에 이르게 된다. 겨울에 야생동물을 위해 고구마 한보따리 챙겨들고 올랐던 지점, 여기부터 해발 400미터를 넘어선다.

 

그 겨울날, 단풍나무와 야생화 군락이 없는 산들에게도 공평해지는 겨울날, 새둥지를 드러낸 겨울산 한가운데에서 나뭇가지에 짐을 걸어두고 귤을 까먹으며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 산줄기의 무릎인 관음봉 아래를 돌아 견성암까지 탐사대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대개 이런 식이다. 발이 덜 탄 천마산 북서편의 등줄기를 타고 812미터의 정상에 오른 것 역시 아침산보에서 일이 좀 커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험난한 여정을 각오해야하는 겨울탐사대의 일원으로 발탁되고 말았다.

이름 없는 겨울 능선에는 듬성듬성 쌓인 흰 눈과 맨몸을 드러낸 참나무 말고도 많은 것들이 있다. 눈 내린 오솔길에는 산짐승의 발자국이 사람의 발자국과 주거니 받거니 겹쳐있다. 사람과 같은 길로 다니는 그들의 행동이 어딘지 익살맞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겨울 산의 특성을 고려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생존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 아래에 수북한 낙엽들은 많은 생명체들과 나무 자신에게 보온막이자 거름이 되어준다. 이불이자 밥인 것이다. 모두 죽은 듯이 조용한 겨울 숲 안에 모두가 살아있다. 생명들의 터전이자 무덤이다. 그리고 생명과 주검의 덩어리는 다음해에 많은 곤충과 식물과 동물의 죽음 위에 이름 없는 풀꽃을 피워내고, 꽃핌만큼 아름다운 나무들의 잎펴짐으로 채워진다. 이렇게 겨울은 봄과 공존한다.

 


내용은 달라도 스피커스(The Speakers)가 예이츠를 노래한 [Yeats Is Great]에서 ‘The Mountain Tomb’을 떠올려도 크게 구박받을 일은 아니다. 천마산 본령과 겨울의 팔현계곡이 아갈로크(Agalloch)의 [Pale Folklore]를 연주한다면, 이 소박하고 우울한 능선은 숭고한 ‘The Mountain Tomb’이나 제프 핸슨(Jeff Hanson)의 [Madam Owl]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The Hills’처럼 자그마한 노래들을 기억해내려 애쓰게 만든다.

* 싱어송라이터 제프 핸슨은 2009년에 사망했다.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의 경우와 정황이 비슷하다. 더구나 그들의 앨범들은 이름을 바꾸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싶은 레이블, 킬 록 스타스(Kill Rock Stars)에서 나오기도 했다.

 

쓸 모는 없으나 쓸모 있고 쓸 데 없으나 쓸데 있는 생각을 대충 뿌리며 걷다 간혹 누구말대로 기괴하게도 똑같이 옷을 맞춰 입고 멋들어진 스틱을 짚은 등산객들과 길을 나누었다. 평상복과 나뭇가지 지팡이를 들고서 ‘우리는 등산객’이란 신분증 같은 차림의 사람들에게 어깨만큼의 길을 내줄 때 살짝 우습기도 하지만, 그다지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외딴 산길에서 만나는 사람의 손길은 반갑다.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할지도 모르나 높은 산길의 눈을 빗자루로 쓸어낸 흔적에 깊은 고마움을 품었다.

 

찬 공기 가득해진 허파를 안고 가장 높은 마루에 올라 나무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을 때였다. 존재감이 남다른 물체가 투명한 겨울하늘을 갈랐다. 갑자기 나타난 솔개가 450미터 고공의 바람을 타고 유유히 활강했으며, 우리는 같은 눈높이에 있었다. 며칠 후에는 세 마리가 거의 날갯짓을 하지 않은 채로 기류를 타고 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완벽한 그들은 바람을 마시고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겨울에 솔개들이 다시 나타날지, 나타난다 해도 그들이 무엇을 보게 될지 확신할 수 없다. 이 능선은 참혹한 일을 겪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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