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의 동반자 1편 : http://2-um.kr/archives/5991
반동의 동반자 2편 : http://2-um.kr/archives/6027
반동의 동반자 3편 : http://2-um.kr/archives/6054
반동의 동반자 4편 : http://2-um.kr/archives/6087

견성암 가는 길 2편 : http://2-um.kr/archives/6123

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입니다.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TV를 잘 보지 않는다고 해야 지성인처럼 보이는 모양이니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실은 기다리면서까지 보진 않아도 게으름 피우며 즐겨보는 것들이 있다. 지금은 포맷과 이름이 바뀌어버렸지만 <영상포엠, 내 마음의 여행>이라든지 공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다큐멘터리3일> 그리고 <환경스페셜> 등이다. <환경스페셜>에 동물 이야기만 있진 않아서 밭을 갈다가 알을 품은 꿩의 둥지를 발견하고 그대로 남겨둔 농부 이야기처럼 은근히 감동적인 에피소드도 있다.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가 죽을 때까지 기어이 지켜보기만 한 카메라의 비정은 실망스러웠지만 다큐멘터리의 룰이었거니 생각해줬다. 다만 수리부엉이의 사냥을 촬영하려 토끼를 제물로 바쳤다가 PD들이 방송정화의 희생양이 된 일은 여러모로 안타깝긴 하다.

 

 

사실 <동물의 세계>를 단연 첫손에 꼽고 싶었다. 그 무엇도 도전할 수 없다. 평일 <5시뉴스>를 보고 성우들의 익살이 더해지는 이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면 꽤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거나 반대로 좀 암담한 처지일 텐데, 어쨌든 그 중에서도 BBC가 제작한 편들을 좋아한다. 모델처럼 일직선상을 걷는 사자의 걸음과 사람이 흉내 내면 바보처럼 보이지만 같은 편에 있는 앞다리와 뒷다리를 함께 움직이는 기린의 걸이는 우아하다. 덤으로 얻는 공부는 동물과 인간이 닮았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행동심리학과 뇌과학이 간혹 흥미롭긴 해도 엉터리 같은 연구결과를 내놓곤 하지만 전쟁 후의 베이비붐 역시 환경변화 후 개체수를 유지하려는 동물적 행위와 다름없다. 심지어 자살도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희를 위해 다른 생물들과 그 터전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종은 인간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솔개들이 날개를 펴고 내려다봤던 산의 아랫자락이 무참히 잘려나갔다. 골프장 증설 때문이다. 남양주CC에 관한 환경영향평가서에는 나무만 14,264주가 잘려나간다고 적혀 있다. 이전의 골프장은 그나마 산을 크게 침범하진 않았다. 그마저도 여러 해에 걸친 반대투쟁과 공사과정에서 발생한 주민부상 등의 사건을 겪었다. 그런데 두 배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스키장도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진화용 등짐펌프를 메고 가파른 숲을 기듯 올라 몸을 걸고 불을 껐던 산, 거기가 미래의 골프장 부지였다.


[사진 – 남양주 cc 전경]

 

버짐이 퍼지듯 산자락의 절반을 넘어 턱밑까지 파헤쳐졌고, 고라니와 멧돼지가 가끔 등산객에게 들키기도 했던 숲의 살점들이 뭉텅이로 떼어졌으며, 자기네끼리만 들리게 와글와글 수다를 떨던 작은 짐승과 새와 곤충과 도마뱀은 시위 한 번 못해보고 집을 잃거나 도륙 당했다. 아니, 아예 실종 당했다. 숲 한가운데에 숨어 있다가 처음으로 전신을 드러내고 황망해하는 나무들은 햇살을 독차지하게 되었다는 기쁨보다 언제 바로 옆에서 햇빛을 다투던 친구처럼 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그 참상을 목격한 날, 사루만에 의해 황폐화된 팡고른 숲을 본 엔트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변한 것은 땅이요, 변하지 않은 건 하늘이다. 자기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반대일지 모른다. 어쨌든 이 지역 역시 15년간 많이 변했다. 좋은 변화-연주인(煙酒人)에게 편의점이 생겼다는 건 축복이다-도 있고 나쁜 변화도 있다. 송어회집으로 가는 수사골은 파란 지붕의 공장들이 산을 깎아 먹고 들어앉았다. 몇 번 오르기도 했던 오남소방서 옆 산자락은 거인이 손으로 뜯어낸 것처럼 한꺼번에 사라졌다. 얼마나 웅장한 교회를 짓는지 송두리째 깎아낸 공사장 입구에는 ‘말씀이 존재로 드러나는 기적의 교회’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정작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학교 과학실의 지층모형처럼 직각으로 절개된 불그스름한 흙과 회색 암반이다.

 

수도권에선 공원을 제외하면 평지의 숲을 보기 힘들어져 평지에도 숲이 있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상상해봐야 하는 처지다. 그걸 버티며 심한 벌목과 전쟁과 화재를 겪고 조금씩 회복된 육지의 섬이 한국의 산이다. 이제 그마저도 가만 두지 않는다. 소유권은 파괴할 수 있는 권리가 되었다. 인공적인 행위 전체를 거부할 생각은 없다. 저수지와 논 역시 인공이지만 ‘자연히’ 또 다른 터전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친환경’ 여가활동을 위한 골프장과 스키장은 되돌릴 수 없게 산을 파괴하여 불구로 만들어버린다.

초록빛 잔디를 깔아 마치 자연의 일부인양 위장하고 사람들을 유인하여 자연 속의 낭만을 겸한 축제를 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농약이 살포되며 들쥐조차 돌아다닐 수 없게 통제된 죽음의 공간이다. ‘원주민’에겐 공간이 줄어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공간의 단절은 전체 공간의 폐허화와 생태계의 절단을 의미한다. 푸른 잔디와 하얀 눈 속에서 인간이 자연과 벗 삼는 이미지인 골프와 스키가 실은 인간이 자연에게 끼친 가장 커다란 해악과 학살을 전제로 즐기고 있는 스포츠인 것이다. 그것들 덕에 세수는 늘겠지만 전체로 보았을 때엔 득보다 실이 크고, 그 실만큼의 득이 몇몇에게 돌아간다. 무덤마저 사라진 아름다운 초원은 유유히 공놀이와 썰매놀이에 열중하는 이들의 알록달록한 옷들로 장식된다.

 

골프장 건설을 더 쉽게 허가해준다고 한다. 친환경녹색성장이라는 그럴듯하지 않은 기치를 걸어둔 채로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공장 건설을 용이하게 하며 큰 강들을 훼손시켰다. 일시적인 경기 진작을 위해 재앙이란 이름의 채권을 대거 발행한다. 도시문명과 자본주의에 마비되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만 늘어나고 있다. 인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발전이니 경제니 하는 말 뒤에 숨은 무엇 때문이다. 하지만 법으로 흥한 진(秦)이 법으로 망했듯이 돈으로 쌓은 체제는 돈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어도 건강이 증진되진 않았다. 병원이용률은 증가하고 병의 종류와 병자의 수는 늘어만 간다. 그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한 미군 전체의 수와 비슷한 6,000명이 단 1년 동안 교통사고로 죽는 나라에선 집을 나서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는 셈이다. 이사라도 하게 되면 버려야 할 물건을 잔뜩 쌓아놓고 살면서 잉여생산물을 파괴해버리는 포트라치를 행했다는 남태평양의 주민들보다 행복해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남의 불행을 보며 ‘그래, 저들에 비하면 행복해. 신이여, 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 미개인의 사회, 이것이 10억 명이 굶주리고 있는 문명사회의 오늘이다.

 

환경이란 단어부터 사치심과 도구성에서 비롯되었다. 환경을 보호해야 인간이 산다, 오염을 해소해야 인간이 건강해진다는 식이다. 아플 때만 몸을 찾는 환경보호는 꿩의 둥지를 남겨둔 농부의 마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둥지를 없애지 않는다고 돌아오는 이득? 불편뿐이다. 한편에선 멧돼지에 인한 농작물 피해와 도시 출몰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겁 없이 인간의 영역에 끼어든 멧돼지는 흥분한 경찰과 합법적인 사냥꾼에게 사살 당한다. 그런데 원래 그 영토의 주인은 그들이었다. 침입자는 그들이 아니다. 인간의 거주지를 그들이 침범한 게 아니라 인간이 그들의 거주지를 침범했다. 물론 피해를 입은 농민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주머니도 주범은 아니다. 묘하게도 이 양자가 만나 약자와 약자가 서로를 원망하고 죽이는 슬픈 그림이 그려진다. 사실 그들 모두가 함께 고통받아온 동지들이다. 똑같이 희생을 강요당하고 고통을 받아온 동료들이다. 여기에 ‘고통의 연대’란 다섯 글자를 적어본다. (고통은 다른 무엇보다 강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아량, 동정, 정의감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것을 같은 경험과 고통의 연대가 가능하게 한다.)

그 겨울, 마른 가지 안에 여린 순을 키우며 도토리를 몇 톨이나 빚어볼까 궁리하던 신갈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지금 그 자리에 없다. 전화 한 통으로 ‘짜장면’과 탕수육을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어도 상심하고 분노할 따름이다. 만약 (대개의 성현들처럼 오해받아온) 노자와 장자가 서울 용산역에 내려 동네를 둘러본 후에 중앙선을 타고 도농역에서 (오르겔탄츠가 음악으로 표현한 ‘9번 버스’와는 다른) 9번 버스로 갈아타고는 관음봉의 자애로운 시선 아래에서 벌어진 이 광경에 이르렀다면 속세의 일이니 그냥 두어라, 하였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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