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밤 도시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은 선행을 감추려 으슥한 골목을 찾아 비둘기모이를 뿌리곤 한다. 술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묘약임을 확인하기도 하지만(술의 신 바쿠스는 쾌락과 다산의 신이기도 하다는 사실!), 대개는 방금 전까지 다음날이면 기억하지도 못할 말을 떠들며 술을 마신 청춘들이다. 아침에는 간밤의 음주를 후회하며 한껏 우울해하다가 이내 극복해낸다. 그 무렵에 도시의 비둘기들은 그들의 선행에 감사하는 뜻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배를 채운다.

 

 

같은 주말, 어떤 이들은 보다 근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유명한 여행지를 찾아가는 일은 다음과 같은 일정으로 짜인다. 먼저 숙소를 확인하고, 요기를 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보성 녹차밭이나 담양 죽녹원, 혹은 경주 불국사와 첨성대를 찾는 이유는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자연과 역사를 만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다. 그리고 저녁에는 고기를 구우며 술을 마신다. 역시 다음날, 숙취를 이겨내며 짐을 꾸려 차를 타고 거북한 배를 의식하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 앞에서 운전자는 껌을 동무삼아 졸음과 필사의 투쟁을 벌인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 주말에 여행 다녀왔어.”

 

그러나 가벼운 물병과 적당한 무게의 나무지팡이만 있으면 이 행성의 구석구석과 계절의 현장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법, 그런 길을 내려올 때 무릎이 덜 아프게 걷는 법, 눈 쌓인 곳에서 바보처럼 미끄러지는 법, 야생동물의 흔적을 발견하고 호들갑떠는 법, 혹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법, 봄이 되면 먼저 피는 꽃들을 구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물론 정말로 투명한 바람을 마실 수도 있다.

가을이 지기를 기다렸다가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산마루의 주인 행세를 하기 위해 매섭게 심술을 부릴 법하다. 가끔은 햇살마저 얼어붙게 하려는 듯한 날도 있다. 더구나 산이란 곳은 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추워진다. 하지만 이 날 산위바람은 친절하고 나긋했다. 벤치에 번갈아 누워 맑고 차가운 겨울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만 있는 하늘이었다. 생각해보면 바람을 쐬기에 좋은 장소가 산만은 아니다. 여름날, 강과 잇닿아 있어 유난히 바람이 시원하다 싶은 서울 합정역 사거리 어디쯤에 앉아 땀을 식히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 사거리에는 못다 이룬 꿈을 이야기한 어느 신문사 기자와 앞으로 이룰 꿈을 이야기한 음악인 김민규와 함께 심야에 국수를 먹었던 곳도 있다. 그런 밤들이 생각나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못 이룬 꿈과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이 삶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고요의 울타리 문을 열어젖히고 등장한 등산객이 오남리로 내려가는 길을 물어왔다. 어떤 아가씨, 동반자의 친구 오은영 씨가 도서관에서 뽑아든 덕분에 알게 된 구효서의 소설 『오남리 이야기』가 태어난 곳이다. 소설가 구효서는 자신이 오남리 진주아파트에 살면서 이 소설을 썼으며 훌륭한 문인들인 윤대녕과 성석제도 머물렀다고 전했다. 구효서의 짧은 글에 의하면 머잖은 진건읍에도 박상우와 이승우 같은 작가, 그리고 “천마산을 심마니처럼, 혹은 산적처럼 누비던” 평론가 반경환이 살았다 한다. 이 오남과 진건의 경계가 시인 여림을 남양주장례식장에 남겨두고 박형준 시인이 “터덜터덜 되짚어 내려간” 바로 그 어내미고개이다.


[구효서의 소설 오남리 이야기]

 

“며칠 전, 남양주장례식장에 시인 여림을 남겨두고 박형준 시인이 ‘터덜터덜 되짚어 내려간’ 어내미고개를 걸어 올랐다. 그 길 근처에는 닭을 풀어놓고 키우는 농장이 있다. 팔현리에도, 진건의 다리 근처에서 그런 곳들이 있다. 말이 농장이지 삼계탕과 백숙을 파는 시골식당들이다. 그런데 닭들은 울타리 없는 그 곳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그래봐야 살길이 보장되지 않음을 알아선지, 때마다 주는 모이가 편해선지, 차례로 삼계탕과 백숙이 된다는 걸 몰라선지, 아니면 자기와는 무관하리란 기대를 가져선지, 그도 아니면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여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닭들은 한가롭기만 하다. 우리처럼. 인간도 야성을 완전히 잃은 걸까.” [2008년 8월 8일]

 


[여림의 유고 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

 

문인들만이 아니다. 자가용에 나를 태우고 홍대에서 여기까지 길고 긴 새벽 도로를 달려와 준 음악인 이기용과 그 옆자리에서 고개를 기울이고 잠들었던 이소영도 이곳을 스쳐 다녀갔다.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진건에 사는 음악인도 홍대에서 여기까지 태워준 적이 있다. 앞서 얘기했던 기타리스트 류호성은 ‘자풍당’과 함께 낚시를 했고, 싱어송라이터 시와는 모닥불로 쬐며 밤을 보냈다. 음악평론가 서정민갑과 모닥불로 덥힌 훈제 소시지를 나눠 먹기도 했는데, 언젠가 훈연구이도 시도해볼 계획이다. 그런 자리에서 ‘Dee’ 같은 곡을 연주해본다면 참 고즈넉하겠지.

 

* 불과 50초만 흐르다 멈춰버리는 어쿠스틱 트랙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고 오랫동안 기억한다.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1980년에 발표한 [Blizzard of Ozzy]의 의의와 더불어 랜디 로즈(Randy Rhodes), 바로 그 때문이다. 기타 키드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곤 했던 기타 히어로들과 달리 옛 친구처럼 남아 있는 랜디 로즈는 천재기타그리고 요절에 관한 상징적 유형이 되었다. 그리고 ‘Dee’는 영원히 청년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 한 남자의 짤막하지만 슬픈 사연이 담긴 작은 엽서와 같았다.

 

요즘 세상 식대로 도로를 기준으로 보면 그 너머에 견성암이 있는데, 산위에선 잠시 내려가는 길을 잃고 방황하고 말았다. 1999년 봄에 오토바이를 타고 갔던 곳을 한겨울 반대편 산길로 찾아가야 했으니, 그리고 이런저런 공사로 지형이 바뀌었으니 헛갈릴 만 하다고 스스로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높은 곳에 오른다고 길이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간혹 이런 말을 멋들어진 격언인양 얘기하고픈 습관이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빨리 가는 건 여행이 아니기도 하다. 길은 목적지를 향해가는 과정과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길은 기다림이고, 덕분에 길이 글을 낳는다.

하지만 이렇게 그럴 듯하게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긴 했지만 하얗고 차가운 겨울 산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제대로 방향을 잡고 내리막길을 따라 나무로 둘러쳐진 길에 접어들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좁은 산길은 가장 가치 있는 것들만 볼 수 있도록 시야를 한정해 놓는다. 이 숲에는 줄무늬를 가진 잿빛의 조형물 군락이 있다. 거대한 얼음 혹은 미끈한 근육처럼 힘찬 서어나무들은 기묘하게 몸뚱이를 틀고 있다. 숲이 건강하다는 표식인 서어나무 군락은 잎이 노랗게 물든 가을에도 아름답지만 잎을 모두 떠나보낸 겨울에 그 진가를 드러낸다. 리기다소나무처럼 덜 대단한 이름을 가진 나무들도 늘 같은 자리에서 이정표가 되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몸뚱이가 베어진 후 ㄴ자로 뻗어 자란 나무, 뿌리가 이어지고 가지가 붙어 하나가 된 나무들이 낮잠을 자다 실눈을 뜨고 약수터로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누군가 제집 마당마냥 쓸어놓은 고운 빗질자국에서 싸리비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관음약수터는 지붕 없는 집이다. 가만히 앉아 바람과 풍경을 들이마셔 보면 계절 따라 바람소리가 다르고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소리가 다르다. 산새가 대부분인 여름철새들이 휴양지로 떠난 눈 덮인 숲에서는 직박구리의 좀 앙칼진 목소리를 제외하면 새소리도 새하얗게 들린다. 평상에 앉아 있으니 하늘은 천막이 되고 나뭇가지는 대들보가 되고 가지런한 나무들은 벽이 되어주었다. 난로가 없어 아쉽지만 정말 집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아늑했다.

찬 물을 떠서 두어 모금 ‘들이쉬면서’ 처음 생수라는 것이 시판되었을 때 물을 돈 주고 사 마셔야 하는 상황이 어딘지 우스꽝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국에선 물이 좋지 않아 차 문화가 발달했다는데 우리 시골에선 학교 수돗물을 아무렇잖게 마셨고, 놀다가 남의 집에 들어가 양해만 구하면 얼마든지 물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한여름엔 남의 집에서 아예 세수나 등목을 하는 넉살좋은 형들까지 있었다. 병에 물을 담아 사고파는 세상이 된 지금, 아직 산 곳곳에는 너그러운 샘들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천마산 자락에선 정상 아래에 있는 돌핀샘이 가장 유명한지만, 그 대가로 사람의 손을 워낙 많이 탄 데다 굵은 올챙이들까지 헤엄치고 있어서 10년 전보다 기꺼운 맛은 덜하다. 거기보다는 팔현리에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임도(林道)의 젊어지는 샘물이 상쾌하다. 물론 정말 젊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무책임한 얘기로 오해받기 전에 누군가 샘물 앞에 ‘젊어지는 샘물’이란 표지판을 걸어두었다고 얼른 밝히는 바이다. 산악자전거 타는 이들이 가끔 오가는 임도에 관해선 몇 해 전에 적어둔 메모가 있다.

 

“천마산 능선의 임도를 자전거를 끌고 혼자 올랐다. 굵은 몸통의 나무들이 뻗은 산이란 원래 조금 두려운 법이다. 생각해보면 혼자 산에 갈 때마다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경외심에서 비롯된 공포와 존경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이다. 그 때마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 어떤 인간도 보지 못했을, 다르게 말하면 보는 자가 있건 없건 숨 쉬는 자연이 만들고 있는 장관을 복판에서 객이 되어 훔쳐보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날, 낙엽송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걸 알았다. 오후 햇살이 비스듬해지기 시작할 무렵 움직이는 거라곤 전혀 없는 숲길로 쏟아져 내리는 낙엽송을 잊을 수 없다.” [2004년]

 

현대에는 전에 없던 소리들에 둘러싸여 살고, 그런 탓에 전자음악의 리듬도 만들어진 것 같다는 소박한 주장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잃어버린 소리들도 많다. 선비들의 인내심마저 무력화할 정도로 여름밤을 뒤흔들었다는 개구리소리야말로 얼마나 리드미컬한가. 하지만 고요 안에도 리듬이 있고, 죽기에 살아있는 것들이 있다.

 

“산불은 때때로 장엄한 광경을 만들었다. 거대한 불길과 기둥 같은 연기로 메워진 능선과 계곡은 본분을 망각케 하는 쾌감을 주곤 했다. 눈앞에서 거목이 불과 2~3초 만에 숯처럼 되어버린다거나, 강풍에 올라탄 불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산과 산을 넘어버리기도 하는 걸 보지 않은 이들은 쉬이 믿지 못한다. 진화된 후, 고통 속에 몸을 태웠을 검은 나무들과 발목까지 묻어버리는 재가 펼쳐진 희고 더운 숲은 다른 세상이다. 그러나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2007년]

 

그 곳은 다시 숲이 되었고, 눈에 잠긴 겨울 숲은 심해와 같다. 삶은 죽음 안에 있고, 죽음에 의해 삶이 있다.

 

* 바람 이야기에 포스트막스(The Postmarks)‘Know Which Way The Wind Blows’를 떠올려본다. ‘소인들의 플로리다판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루시드 폴)라고 할까. 그들이 엔니오 모리꼬네를 언급하는 이유를 잘 드러내는 소품이다. 반면 차고 고요한 숲에 쎄리온(Therion)‘The Siren Of The Woods’가 울려 퍼진다면 사뭇 장엄한 공기가 감돌 것이다. 겨울 숲은 역시 북유럽 뮤지션들의 음악이 잘 어울리는 어둑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황보령=스맥소프트의 [Mana Wind] 역시 자기 세계가 분명한 아티스트와 색깔 있는 밴드의 범장르적 작품이다. 간혹 쏟아져 나오는 북부 유럽의 무드와 라인이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다. 메탈 프레이즈와 앰비언트·뉴에이지·일렉트로닉이 혼종을 이루기도 하고 스맥소프트 안에서 융화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들어왔음에도 ‘Wind’‘Do U’ 그리고 ‘Blue Marble(파란 구슬)’처럼 주문 같은 곡들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이들은 한국 안에 있지만 그 음악은 이미 한국 밖에 있다.

 

 

창백한 겨울햇살을 쬐며 졸던 숲이 마루바닥 교실에 연필을 떨어뜨리듯 “뚝… 뚝” 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지난 가을에 떨어뜨린 열매에게 제 몸을 거름으로 바치는 소리다. “도톨… 도톨”하며 풀숲 위로 도토리가 낙하했던 자리에서 말이다. 그 소리가 도토리 이름의 유래일 텐데, 동식물의 귀여운 이름들 중에는 소리나 특징 뒤에 ‘-이’만 붙여놓은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영화 <판의 미로>에 나오는 대사처럼 “바람만이 발음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맴맴” 수다 떠는 곤충은 맴이를 거쳐 오랜 기다림과 짧은 생의 상징이 된 매미가 되었고, “개굴개굴” 왁자지껄한 녀석들은 개굴이를 거쳐 개구리가 되었다. “귀뚜르 귀뚜르”에서 귀뚜라미가 된 과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코가 길쭉한 희한한 동물을 대충 코길이라고 해버리는 무성의도 있었으나, 좀 미안했는지 그럴듯하게 코끼리로 바꿔주는 친절을 베풀었으니 그만하면 되었다.

 

이 글을 읽은 벌레들과 풀들이 자기 이름도 해명해달라고 줄을 설 테지만 아직 연구 중인 주제들이 많아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나이보다 어려보인다고 생각하는지(한국인 중 무려 80%가 그렇게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지, 그리고 아무리 청소를 해도 방바닥과 가구 위에 하얗게 쌓이는 먼지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수행했다. 이 중 상당 부분을 판명해놓고 발표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바쁘다. 더 늦기 전에 견성암에 들어설 차례이다. ■

 


 

반동의 동반자 1편 : http://2-um.kr/archives/5991
반동의 동반자 2편 : http://2-um.kr/archives/6027
반동의 동반자 3편 : http://2-um.kr/archives/6054
반동의 동반자 4편 : http://2-um.kr/archives/6087

견성암 가는 길 1편 : http://2-um.kr/archives/6123
견성암 가는 길 2편 : http://2-um.kr/archives/6132

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입니다.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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