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과 나>

콩이 왔다. 노란 메주콩, 검은 서리태. 지구를 지키고 사람을 살리는, 건강한 농사를 짓는 어느 농부의 콩. 정성껏 기르고 거두어 알찬 것으로 한 알 한 알 골라내기까지, 농부의 땀과 혼이 서린 콩들을 보고 만지고 하자니 왠지 시큰하다. 한 자루 그득한 이 콩에 담긴 노동의 시간들을 감히 값으로 매길 수 있을까. 고맙고도 뭉클한 마음을 안고 서리태를 넣어 밥을 짓는다.

어릴 때부터 콩밥을 좋아했다. 다른 애들은 콩만 골라낸다는데 난 되려 콩만 골라 먹기도 했다. 쌀보다 콩이 더 많아 보이는 밥 한 공기 꼭꼭 씹어 먹는다. 아~ 역시 콩은, 특히 서리태는 눈물 나게 고소하고 담백하다.

다음 차례는 메주콩. 메주를 쑤어야 하니까.

다른 이들은 벌써부터 했다는데 너무 추울 때 하면 안 좋다는데. 어느덧 일곱 번째 맞이하는 일인데도 이렇게 나는 또 늦고야 만다. 왜 또 늦었을까? 잘 모르겠다. 게으름 때문이라고만 하기엔 뭔가 아쉽다.

늦고, 모지라고, 어설프고. 귀촌살이 6년 넘게 변함없이 흘러온 걸 보면 어쩌면 그게 그냥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내년에는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을지, 그때 가 봐야 아는 일. 지금 이 모습 탓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련다. 아, 그래도 욕심 하나는 또 꿈틀댄다. 간장, 된장 해마다 만들어야지, 콩 종류라면 사족을 못 쓰게 좋아하는 나. 콩 농사는 어케 좀 해 보고도 싶은데… (두부 만들고 싶은 열망도 가득~)

아효, 그러자면 땅부터 빌려야 하니까, 고게 문제여 문제!  한 마지기 텃밭에 콩 농사 지으려면다른 농사 엔간히 접어야 하는디. 다품종 소량 농사를 추구하는 산골혜원네 살림 기준에 또 그게 어긋난께로.

 

엣따, 몰겠다. 메주나 잘 쑤고서 생각해 보자꾸나. 된장, 간장 빚어내는 일만 해도 어디여, 어디! 산골살이가 안겨준 내 인생에 벼락같은 혁명인디~^^


 

<메주, 산골살림의 새로운 시작>

 

아침부터 어둑해질 무렵까지 가마솥 불 지피고 또 지피며 큰 국자로 콩을 젓고 저으며 대망의 메주를 쑤었다. 8시간 넘게 메주를 쑤면서 무쇠 화덕 앞을 지키며 장작불을 지피고 또 지폈다.

큰 장작들이 활활 불타오르고 콩물마저 부글부글 끓어오른 뒤에는 작은 나무토막이나 나뭇가지들로 불을 지그시 살리고 지킨다. 콩이 눌어붙지 않으려면 끈기 있게 불 조절을 해야 한다.

긴 시간 하염없이 장작불을 바라보면서 이 노래가 그저 떠올랐다.

 

‘장작불’

우리가 산다는 건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탄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불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은 놈은 마른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마침내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우리가 산다는 건 장작불 같은 거야

장작 몇 개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여러 놈이 엉켜붙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침내 활활 타올라 쇳덩이를 녹이지~♪

_백무산 시, 백창우 곡

 

장작불 땐 지 몇 날이 흘렀건만 이 노래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네 삶이, 사랑이, 투쟁이 이 노래와 닮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닮기를 바라서 그랬을까… 가만히 불러 본다. 한 옥타브 낮추어서. 먼저 불타든, 빨리 불붙든 아예 젖은 나무였든 그 모든 땔나무들이, 그 모습이 귀하고 소중하다고 노래하는 ‘장작불’, 이 밤에도 자꾸만 입에서 흐른다.

정성 다해 네모난 메주를 빚고 볏짚 꾹꾹 눌러 청국장을 만들며 그렇게 2019년 산골살림 공식 일정은 끝이 났도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위로 콩 익는 냄새가 참으로 고소했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메주가 마르며 내뿜는 구수한 내음, 청국장 보따리에서 퍼지는 구릿한 향 모두 푸근하게 다가온다. 메주랑 청국장이랑 행복한 동거를 하는 지금 이 순간이 아늑하고 좋다.

볏짚으로 감싸 메주를 띄우고 내년 봄 장 가르기를 하여 긴 숙성 시간이 흘러야 맛볼 수 있는 된장, 간장. 꽁꽁 싸맨 이불 속에서 진한 발효를 거쳐 탄생하는 청국장. 꾸덕꾸덕 마르면서 하얀 곰팡이 슬슬 피어나는 메주를 보고 있으니 이것은 산골살림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느낀다. 메주와 청국장이 안겨줄 또 다른 살림의 시간들을 정성껏 받아안으리라. 된장, 간장, 청국장 따라 산골혜원네 산골살이도 구수하게 맛깔날 수 있도록!

 

Comment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