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기억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감기에 걸려 며칠 동안 맹렬히 기침을 한 덕에 단련된 복근을 뿌듯해할 시간이 없다. 나뭇가지가 팔에 얹고 있다 흩뿌리는 눈을 얼굴로 맞으니 정신이 든다. 낙엽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을과 달리 겨울은 어떤 소리를 더 크게 들리도록 하는 고요만 전한다. 머리를 붉게 염색한 딱따구리가 제 몸과 소리 중 어느 하나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든 사람과 어부만이 아는 물고기 떼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 양 자랑스러웠다. 민어와 조기도 새와 개구리처럼 시끄럽게 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연안에 물고기가 가득했고, 생선이 아이처럼 컸고, 인천에선 20세기 중반까지 김장하듯 집집마다 굴비를 말렸다는 이야기는 책에서나 볼 수 있다. 이젠 어부들도 그물을 내리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가야 한다.

생기 도는 겨울 숲은 살아남은 자들의 자취를 드러낸다. 고양이과 동물의 귀여운 발자국부과 숙녀의 구둣발 같은 고라니의 흔적 그리고 멧돼지의 의젓한 걸음을 발견하기란 도시에서 ‘공짜폰’ 배너를 찾는 일보다 어렵지 않다. 눈은 골프장 공사 때문에 산이 입은 치명상을 덮어주지만, 바로 옆의 잣나무 숲 향기를 떠올려보면 더 서글퍼진다. 하긴 눈 없는 겨울 행색처럼 황량한 것도 없다. 자갈밭 걷는 소리를 내는 오래된 눈과 달리 새 눈은 발을 부드럽게 감싼다. 이런 곳에선 사람이 빚어졌는지 절로 생겨났는지 토론할 필요가 없다. 잠과 명상은 비슷한데, 악어와 북극곰처럼 이중눈꺼풀이 없으니 잠드는 건 위험한 일, 설야를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른 팀 낙오자의 구원요청을 외면하는 비정의 산, 에베레스트는 아니지만 추운 곳이다. 물론 언제 그렇게 더웠는지 잊었듯이 이 추위를 잊는 데에도 몇 달이면 충분하다. 그러면 집 어딘가로 복귀했던 선풍기들이 각자 담당했던 방들로 복귀하겠지.

외국엔 은둔생활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소행성과 충돌하는 영화를 많이 만든 미국에선 야생생존법과 통나무집 짓는 법처럼 언제 써볼까 싶은 기술을 배우러 찾아간다.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여행상품을 위해서도 돈을 지불한다. 비포장도로 운전법을 배우고, 온라인으로 피델 카스트로의 강연을 듣고, 아프리카로 교육하러 가는 사람들도 있다. 선행국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교육하러 가는 대신 그들에게 배우러 간다면, 그렇게 학생이 교사가 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싶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참나무 껍질로 갈액 만드는 법과 얼음을 땅 속에 쌓고 여름까지 보관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해도 사람들이 모일 것 같지 않다.

팸 그라우트가 이런 정보들을 모아놓은 여행 가이드북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100대 여행지』는 흥미로운 사람들을 여럿 소개한다.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밥 마셜은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자연보호활동가였고, 밥 마셜 재단은 지금도 야생지 보호활동에 열심이다. 29세에 백만장자가 되었으나 전 재산을 기부한 밀러드 풀러는 빈곤주택 퇴치를 목표로 집짓기 사업을 하는 해비타트를 창설했다. 여행사업을 하면서 환경보호에 기금을 대는 리트 여관과 컨퍼런스 센터, 각국에 고아원을 설립하는 리버 오브 라이프 농장, 좋은 사업을 하지만 자금이 부족한 업체에 대출해주는 언투어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창조적인 공동의 저항운동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거긴 미국이잖아”라고 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절망 속에서 인간애와 낙관,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칭찬이 필요하지 않을까.

드디어 산사에 가까워졌다고 바위 많은 내리막길이 알려주고 있었다. 돌탑과 바위들은 거친 화강암으로 만든 왕릉의 문석인과 무석인처럼 마음씨 고운 과객을 노려보았다. 사도세자를 공포에 떨게 한 『옥추경』을 떠올릴만한 장소에서 수줍은 총각이 돌편지의 재료를 구하는 장면을 상상해 봐도 좋겠다. 그러고 보면 수석장사, 일명 돌팔이야말로 운치 있는 직업이다.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니 제법 더러워진 신발에 마음이 느긋해졌다. 지난 일을 담아두지 않고 앞일을 짜놓지 않으면 머리가 가벼운 법이다. 한 달 전에 짜장면을 예약해둘 필요는 없다. 마음에 쏙 드는 지팡이를 여태 찾고 있다면 눈동자가 좀 바쁘겠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지팡이가 되어주려 생겨난 듯한 나뭇가지를 찾을 시간은 충분하다. 이런 단순한 고민과 움직임 속에서 함민복의 시 「날개저울」처럼 “0이 아니라 ∞”가 되는 것이다.

이제 견성암의 유래를 탐구할 차례. 이름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문학과 영화엔 출신을 알려주는 누들스(Noodles), 기질을 드러내는 매버릭(Maverick)이 쓰였고, 아메리카 개척자들인 루이스(Lewis)와 클라크(Clark)는 커플로 등장했다. 갑자기 2009년에 어느 진보정당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괴산 가는 길에 본 사찰 표지판이 떠오른다. 보안사라니. 진건읍 삼거리에 있는 다방의 이름은 수다방이고. 진중해야 할 때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왜 그런지에 대한 학술적인 해명을 위해 삼성그룹이나 한화그룹에 연구비 지원을 요청할까 생각해봤지만 학자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또는 창고로 끌려가 맞을까봐 그만뒀다.

* 그러고 보면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음악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노래는 개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편의 로망을 불러낸다. 1970년대부터 하드 록 역사의 페이지를 드문드문, 하지만 굵직하게 채워온 보스턴(Boston)에게 1986, 팝송 애호가의 스타라는 직함까지 쥐어준 ‘Amanda’는 팝과 록, 록과 대중의 거리를 일거에 허물었다. 그리고 보스턴을 아련함을 불러내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이 곳은 후삼국 말 천마산 암굴 속에서 수양에 정진하던 바우란 현자께서 사시던 곳이며 후일 고려를 세울 태조 왕건께서…”라고 안내문을 옮기려다 중략한다. 안내문은 밥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것처럼 읽어보는 편이 좋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있다는데,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것 같다. 이 아리송한 안내문을 지나면 보이는 진입로가 일품이다. 속세에서 내세로 가듯 밖에서 안으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길이다. 낭떠러지와 산자락 사이로 난 굽은 길을 한 걸음씩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예전, 그러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처음 온 봄날엔 개나리와 진달래, 그들이 지고나면 피는 자목련이 어우러져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사찰에 식물의 성기인 꽃이 만발하는 것이 묘하다 싶으면서도 그들은 성행위를 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질투하지 않으니 더 잘 어울린다고 해둘 요량이다.

눈 내린 사찰 마당에 서는 건 차 앞에 차분히 앉는 것과 같다. 원래 건축물 자체가 마음가짐에 영향을 준다. 성당도 마찬가지여서 조각물과 스테인드글라스에 둘러싸이면 누구든 오래 전부터 보관해온 경건함이 마음의 함을 열고 스며 나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그러한 신앙을 만든 근원에 관계한다. 그래서 손과 책상은 먹물로 엉망이 되어도 마음을 가다듬는 서예시간이 필요하고, 그래서 산을 찾는다. 대지의 봉긋한 가슴인 산(山)을 사람(人)이 만나면 선(仙)이라 했다. 물이 차올랐다면 섬이었을 산처럼 섬은 바다 속에 몸을 감춘 산봉우리다. 섬 또한 갇혀 있다기보다는 벗어나있는 기분을 준다. 또 그래서 빙하가 녹아 물에 잠기기 전에 섬을 찾는 모양이다. 산사는 또 다른 섬이다.

여름엔 무성한 잎들에 가려 있던 시야를 찬바람이 터놓았다. 멀리 보이는 길은 조지훈 시인이 만년을 보내고 묻힌 마석으로, 혹은 물이 돌 틈에서 떨어져 종소리를 냈다는 수종사가 안긴 운길산으로 이어진다. 수종사는 고생대부터 살아온 은행나무의 후손이 나무가 되어 천년을 살고 있는 곳으로 정약용의 추억이 서렸으며, 역시 다산이 성묫길에 배를 탔다는 (4대강사업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물머리를 굽어보고 있다. 남양주 팔당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다. 한때 두물머리에는 훌륭한 음악인들이 모여 개발에 반대한 적이 있다. 그중에는 윤영배도 있었다.

견성암도 반쯤 언 샘물에 표주박을 띄워놓고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산신당으로 가는 108계단에도 인적이 없다. 인간이 만들고 바람이 연주하는 악기인 풍경(風磬)만이 소리의 풍경(風景)을 그릴 따름이다. 책을 음독한 옛날엔 밤에도 소리풍경이 일었을 것이다. 낙타는 마두금 연주에 눈물을 흘리고 개도 피리에 반응하는 걸 보면 이런 심상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다.

이성계, 임꺽정과 많은 현자, 도인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산이 천마산이다. 법당 뒤 석굴에 그 중 한 분인 바우, 즉 풍영 조씨의 시조인 조맹의 흔적이 있지만 그가 피웠을 촛불의 온기는 식은 지 오래다. 마당으로 나와 침묵을 응시하며 바람소리를 경청했다. 이 리듬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의 한 부분처럼 새로 지은 건물에 의해 약간 깨어진다. 아무도 뭐라 못할 명작을 보며 네모난 집이 어색하다고 느낀 건 나뿐인가? 하지만 기행문이나 다큐에서 유목민의 생활상과 고향이 현대화의 바람 속에 변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는 장면이야말로 안타깝지 않은가. 자기는 변한 삶을 살면서 그들은 그대로이길 바라기는 것은 이기적이다. 현명한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이 실제에선 현명하지 않게 산다. 물론 그 현명한 책을 쓴 사람도 마찬가지고, 이 나이든 철부지도 그 대열에 동참 중이다. 이런 괜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새로 지은 건물에서 튀어나온 방정맞은 핸드폰 소리가 적막을 흩어놓았다.

그 다음해엔 같은 장소에서 더 극적인 사건을 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적막한 암자에 붉은머리오목눈이 새떼가 찾아와 관목과 법당의 난간에 자리를 잡았다. 이 때 가벼운 몸으로 층계를 소리 없이 오르는 녀석이 있었다. 고양이의 특권으로 난간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고 새를 향해 안광을 발사하고 있었다. 어찌나 완벽한 부동자세였는지 그러다 잠이 들 것만 같았다. 구경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성의를 다해 가만히 구경했다. 나는 고양이를 훔쳐보았고, 고양이는 새를 노려보았으며, 새는 한눈을 팔았다. 침묵과 긴장이 팽팽했다. 곧 불교사원에 살생의 참극이 벌어질 참이었다.

“우당탕 쨍그랑”

움츠렸던 몸을 날리려던 고양이의 앞발에 스테인리스 그릇이 걸려 요란하게 엎어지자 새들 역시 자신들의 특권을 행사하여 날름 날아올랐다. 멋쩍게 허공을 바라보던 고양이는 고개를 돌리다 사건의 전말을 지켜본 불청객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머쓱해진 고양이가 계단을 내려갈 때엔 몸이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 스스로 고요를 깨는 노래가 다른 누군가의 고요를 깬 적이 있다. 오묘한 상황이었다. 감마 레이(Gamma Ray)‘The Silence’(1990). “Silence라더니.” 새벽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곡이 끝나자 혀를 내둘렀다. 들어보지 않은 음악을 작가가 골라준 대로 소개하는 DJ가 당연시되는 방송 현실 속 에피소드. 헬로윈(Helloween)을 그만둔 카이 한센(Kai Hansen)이 메탈의 기법을 집대성하여 낳은 이 명곡의 또 다른 주인공은 제프 테이트(Jeff Tate)와 함께 가장 뛰어난 메탈 보컬리스트인 랄프 쉬퍼스(Ralf Scheepers). 1995년에 카이 한센이 다시 불러 EP [Silent Miracle]에 실은 버전에도 정겨운 맛이 있지만, 잠실대교는 스무 살의 내게 원곡을 불러 달라 청했다.

비슷한 시기, 헬로윈이 하강기로 미끄러지던 무렵이지만 미하일 키스케(Michael Kiske)의 작곡과 보컬이 최고점에 이른 곡은 다름 아닌 ‘Your Turn’(1991)이다. 차분히 문을 열어 스케일을 크게 펼치고 다시 어쿠스틱으로 문을 닫는 대곡의 전형이며 사회성과 종교성의 중의를 읽어낼 수 있다. 하나둘 흩어지던 헬로윈과 왕따가 되어가던 키스케가 마지막으로 일구어낸 찬란한 순간이었다. 아직도 샤워할 때 흥얼거리곤 한다.

 

 

반동의 동반자 1편 : http://2-um.kr/archives/5991
반동의 동반자 2편 : http://2-um.kr/archives/6027
반동의 동반자 3편 : http://2-um.kr/archives/6054
반동의 동반자 4편 : http://2-um.kr/archives/6087
견성암 가는 길 1편 : http://2-um.kr/archives/6123
견성암 가는 길 2편 : http://2-um.kr/archives/6132
견성암 가는 길 3편 : http://2-um.kr/archives/6144

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입니다.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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