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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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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아무튼, 그날도 훨씬 편안한 존재였던 할아버지에게 여쭸음이 옳았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글쎄, 할머니는 대체 왜 명절날 나와 안방에 단둘이 있었을까. 아마 전을 부치고 문어국을 끓이는 일에는 은퇴하실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가 숙모들의 부엌일을 도울 만큼 눈치가 영민했다면 얘기는 또 달라졌겠지.

안방에는 배가 불룩한 정방형 테레비 옆으로 아주 오래된 재봉틀이 놓였었다. 내게도 텔레비전 앞을 차지해선 안 된다는 눈치는 있었다. 나는 페달도 없는 미싱 앞에 앉아 있다가 불쑥 물었다. ‘OO’이 ‘뭐에요’? 나는 ‘OO’이, 어쩌면 이름이 아니라 무슨 올케, 시숙, 도련님…처럼 인명을 달리 부를 수 있는 호칭일 수도 있겠다고 여겼나 보다. (스물세 살 무렵 심리테스트 사이트에서 측정한 나의 객관성 지수는 94.3점, 사고력 지수는 75.8점이었다.)  

너한테는 사실 누나가 있고, 그건 네 누나 이름이다. 할머니는 내 물음에 너무 쉽게 대답해버렸다. 훗날 아버지는 할머니가 참 주책이셨다… 라고 혀를 차셨다. 하지만 당시 내 반응은 그 나무람이 무색했다. “아, 진짜요?” 나는 그게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어쩐지 뭐가 이상하드라. 누나는 몇 살인데요? 누나는 나와 열여덟 살 차이가 난다고 했다. 오우 졸라 많네, 라고는 생각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별 질문을 잇지 않고서 천진하게 안방을 나온 것 같다.

 

그게 다였다. 내게 누나가 있다면, 누나의 엄마도 있을 것이었다. 그쪽 엄마가 당연히 먼저 아버지를 만났다가 헤어졌을 것이고, 아버지가 다른 살림을 차리고 늦둥이를 얻을 때까지 숨겨진 곡절도 있을 것이었다. (그건 할아버지가 장손 욕심에 강권한 전근대적 무리수였다.) 무엇보다, 누나 모녀와 ‘내(우리- 라는 표현이 여기서 성립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겠는가?) 엄마’의 입장도 묵묵히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역을 일곱 살이 해내기는 쉽지 않다. 가당한 일이었겠나, 자전거도 제대로 못 타는데.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건 피부에 와닿았다. 영주에 가서는 되도록 가만히 있는 편이 좋다는 것. 작은 과수원에 딸린 외딴집에서 나는 티 나게 자리를 꿰찬 티끌이었다. 누군가는 그 존재를 원했겠지만 달갑지 않은 사람이 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돌아앉기는 뭐하고, 반갑다기도 뭐한, 사마귀나 점처럼 있는 그런 존재. 그러니 나대지 않는 편이 모두에게 좋았다. 내가 먹을 꾸지람이란 아버지 욕도 되었을 거고, 그 자리에 없던 엄마 탓은 더 크게 되었을 테니까.

 

물론 주체 없이 수다스럽고 쉬이 언성을 높이는 게 내 성깔이었다. 명절마다 설화(舌禍)를 만들어 곤욕을 치른 일이 많았다. 혼나고 깨지고 타박을 얻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자니 앞사람들 눈치에 대단히 민감해질 수는 있었다. 습관이 드는 만큼 눈치가 빨라지지는 않았으니 불행한 일이었지만.  

나는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 잠자코 말을 아끼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중간은 간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리고 영주가 아닌 서울에서도, 사람들과 만나는 어느 집단에서건 그리하는 게 적어도 ‘안전’하다는 것, 역시 시나브로 깨달아갔다.

 

*

  지금 나는 맨유가 아니라 ‘뉴캐슬 유나이티드’1라는 전혀 엉뚱한 팀의 지지자가 되어 있다. 맨유는 전성기가 지나 그럭저럭한 중상위권 팀으로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승리감을 쫓았다는 것은 이유가 아니다.

얼마 전까지 기성용 선수가 소속되어 있던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잉글랜드 북동부의 뉴캐슬을 연고로 하는데, 영화 <빌리 엘리어트> 클라이맥스의 처절한 탄광 파업이 일어난 곳이다. 도시 중심부에 성당이나 교회가 있는 유서 깊은 동네들과는 달리, 이 도시 중앙에 자리 잡은 건 시 인구 1/6을 수용하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거대한 홈 경기장이다. 으휴, 철 없는 사람들. 

얘네들은 더하다. 매년 2부리그로의 강등이나 걱정하는 구질구질한 팀이다. 이 클럽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쯤 우리 집은 갑자기 이사를 떠나 다른 동네로 정착해야 했었다. 그 탓에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잃어버렸고, 두발자전거를 배우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럴 적에도 우승은커녕 잘해봐야 20개 팀 가운데 8등쯤 했던 팀이다. 그 뒤로 두 번씩 2부리그로 떨어진 끝에 간신히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고 있다. 가끔 강팀과 경기할 때 TV 중계를 해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기가 더 많다.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날이 훨씬 더 많은 건 물론이다.

나는 이 클럽을 열렬히 지지한다. 몇 년째 BBC 스포츠 앱에 업데이트된 뉴캐슬의 소식 -그러니까 신임 감독이 6개월 안에 잘릴 것을 예측하는 도박사들의 배당, 최하위권에 함께 있어 생존을 경쟁하는 다른 팀들의 경기 결과들- 을 뇌에 동기화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왔다. 경기를 보기 위해 해외의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스트리밍 링크를 찾고, 감탄사나 겨우 알아듣는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밤을 새운 적도 있다. 해외에서 구해 사들인 유니폼도 서너 장씩이나 된다. 강박증처럼 어떤 팀을 사랑하다 보면, 코듀로이 셔츠나 세미 와이드 슬랙스 같은 정상적인 옷이 아니라 쓸모없는 유니폼 레플리카를 사느라고 돈을 들이게 된다.

하필이면 저런 팀을 응원하게 되었는지, 나도 이유를 모른다. 피상적인 계기는 있다. 엠앤캐스트2에서 본 로랑 로베르와 오바페미 마르틴스 선수의 멋진 골 모음 영상 같은 것들.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런 장면들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웨인 루니가 더 ‘센세이셔널’하게 만들어냈었다.

2 지금은 사라진 국산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유튜브의 전성기 이전 우리나라 인터넷에 올라오는 동영상은 대부분 여기를 거쳐 업로드되었다.

 

나는 분명 맨유의 팬이었다. MBC ESPN만 틀면 나오던 맨유 경기를 보다가 승리에 취해 늦게 잠들었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집 근처 수원 삼성의 팬일 수도 있었다. 시즌 티켓을 끊어 홈 경기에 개근한 해도 있었고, 그해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하는 것을 직접 관전하며 환호했었다. 그 모든 걸 버리고 엉뚱한 팀에 이토록 빠져든 근거 없는 애정이야말로, 어쩌다 생겨난 점이나 사마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추측해볼 수는 있다. 그런 팀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고. 잘나가는 응원팀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건 내 운명이 아니었다고. 내가 시즌 끝까지 우승을 다투는 팀의 팬이었다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챔피언스리그 4강전 승리나 소속팀 공격수의 득점왕 수상 같은 걸 자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축구 이야기를 할 때 한발 물러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별로 객쩍지 않게 느껴졌다. 그건 두발자전거를 타는 인싸들 앞에서 네발자전거를 타는 소심한 아이가, 그리고 일가 어른들 앞에서 호적에 없는 어머니를 둔 장손이 응당 찾아가야 할 포지션은 아니었을까.  

 

한국에서 유럽 축구란 마초 문화와 힙스터 문화의 경계에 있어서, 종종 여름날 길거리에서 바르셀로나 같은 유럽 챔피언의 저지를 입은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저 사람들과 나의 인생은 얼마나 다를지를.

고작 시즌 준우승에 그쳤다거나 더블(2관왕)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감독 교체를 검토해야 한다거나 수천억 원짜리 선수를 사지 못했다며 부루퉁해지는 것, 그리고 매년 강등을 우려하고 가끔 오는 승리에 까무러치면서 앞으로 남은 10경기에서 요행히 3승쯤은 따낼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확실히 생존할 수 있는 걸까 머리를 굴리는 처연한 패배주의 사이만큼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

오늘 순위표에서 응원팀의 이름을 찾으려니 쭈루룩 스크롤을 내려야 했다. 도전자라기도 뭣한, 생존이 더 급한 초라한 팀.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 그렇지는 않다. 덤덤히 인정할 뿐이다. 그게 어쩌다 내 유년에 올라탄 운명이라면 말이다. 물론 여태껏 자전거를 못 탄다는 쪽팔리는 진실도 마찬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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