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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인생의 모든 날이 내 맘 같을 리 없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말뜻을 이런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것 같다. ‘인생에는 맘대로 되는 날 여럿에 잘 안 풀리는 날이 가끔 있음’. 귀엽고 갸륵해라, 천진난만한 긍정이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사실은 거의 모든 날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걸 점점 알게 되었다.

분명히 한때는 중산층에 속했다. 서울에 아파트가 있었고, 아버지의 사업이 -겉보기엔- 무난했으므로 엄마는 벌이가 없어도 되었다. 엄마는 매일 저녁 식탁에서 노란 형광등을 켜고 가계부를 썼다. 불행해 보이는 모습이라곤 없었다. 가끔 부모님이 싸우는 날도 있었지만, 밥때가 지나면 무사히 봉합되었다.

나는 생일날 친구들과 조이랜드1에 가고 싶다고 졸라도 되었고, 아파트단지 앞 민물장어집에 가자면 두 분은 언제나 흔쾌했다. 뿐인가, 집에서 곧바로 한강공원(!)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메리트였는지. 그리고 그런 집이 겨우 3억 2천만 원(!!)밖에 안 하던 시절. 나는 모두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맨유를 좋아할 자격이 충분하던 날들이 아니었던가.

2000년대 초중반, 비슷한 이름으로 동네마다 성업하던 형태의 실내 놀이공원이다. 지금은 키즈카페가 그 역할을 완벽히 대체하지만, 그때 아이들에겐 로망 그 자체였던 곳이다. 생일날 여기서 돈까스를 먹고 명조체 자막의 노래방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 말이다. 아직도 <에델바이스>를 불러 갑분싸를 만든 친구 녀석이 기억난다. 우리가 중학생들처럼 영악했다면 다음날부터 그 친구의 평판이 떨어졌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 순수의 시대여.

 

열한 살이 되던 순간,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갔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 아파트는 경매로 시세의 반값에 낙찰되었다. 물론 그 반값마저 우리 돈은 아니었다. 뻔한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사업으로 진 빚을 갚지 못한 것 같다. 집을 비워줘야 했다. 계고장 같은 게 날아들어서 나도 그것을 알아본 기억이 난다. 새로운 집 계약이 미적거리는 동안 기한은 초초히 다가왔다.

화요일 오전이었을 것이다. 집달리(철거반)들 여럿이 들이닥쳤다. 아주 오랫동안 밉게 생각했었지만, 그날 집을 깨끗이 비우던 그네들의 수완만은 대단했다. 인부들은 등산화 같은 걸 신은 채 뒤도 안 돌아보고 안방 장롱으로 향했다. 우선 겨울 이불을 거실에 쭉 펼쳤다. 책이나 컵 같은 작은 물건을 가져와 거기에 쏟아부었다. 적당히 찼다 싶으면 네 귀퉁이를 보퉁이처럼 묶어 용달차에 끌다시피 올렸다. 책장, 식탁이나 냉장고는 그냥 그대로 실었다. 당연히 온 세간이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다. 한 시간 만에 32평 아파트가 텅 비어버렸다. 참으로 베테랑들이었다.

인부 하나가 검은 노끈으로 짐칸을 대강 둘러주었다. 트럭은 그러기 무섭게 떠나버렸다. 짐은 어딘가에 있는 창고로 옮겨졌다. 살 곳이 정해지면 찾아가란다. 집안이 싹 쓸리고 난 뒤,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서 눈물범벅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건 정말 기막힌 일이었다. 지나가던 아랫집 아주머니가 물었다. “너희 이사 가니?” 그렇게 된 것 같네요, 씨바. 역시 오랫동안 참 밉살스러운 기억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남의 재산이 된 집이었다. 거기 눌러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하는 대접치고는 그냥저냥 점잖았던 것 같기도 하고.

 

슬픔이 아니라면 해학으로 그 사건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뼈아픈 비극과 진한 해학은 절친한 친구 같은 관계가 아닐까. 물론 비극 쪽에서 좀 더 매달리는 사이겠지만.) 사실,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눈알이 쑥 빠질 듯 아프다. 그날 이후로 자라온 중산층 친구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 아니다. 십수 년 동안 월세를 떠도는 여전한 신세 탓도 아니다. 그것은 그날 내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울던, 하지만 집이 완전히 비어버리자 묵묵히 큰길가로 빠져나와 택시를 잡던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다.

우리는 외가에서 하루를 지새웠다. 그날 밤, 다락같이 좁은 주공아파트에도 창문이 있었다. 불을 끄고 있어도 달빛이 밝았다. 누런 가로등만 있던 시절이었지만 하얀 빛이 한참이나 시리게 새어들었다. 잠들지 못한 엄마의 눈가가 반짝였다. 그 찰나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응석을 줄여야 했다. 이제 우리 집은 항상 빠듯했다. 이제 어리광과 땡깡 또는 부모님의 사랑만으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뭐 어떻게 하겠나. 받아들여야지. 완전히 비뚤어져서 비행소년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그래서 은근하고 비밀스럽게 비뚤어지기는 했지만.)

집안 형편이 이토록 극적으로 피부에 닿은 이래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말하자면 슈퍼에서 주전부리를 단 하나만 골라야 하는 아이처럼. 무엇을 고를까. 그 아이는 먹어보고 싶었던 비싼 과자를 택할 수 없을 것이었다. 많이 먹어봐서 맛을 잘 알고 있는 것을 골라야 했다. 나도 양파 맛 포카칩이 지겨웠고 닥터유 브라우니가 궁금했지만, 생각처럼 달콤하지 않다면 누가 책임질 건가? 물론 내 강박적 컴플렉스는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우하향하는 자존감 곡선에 적어도 보탬은 안 되었다는 게 분명하다.

생각이 영 없는 것보다야 지나친 게 낫다고 믿기는 한다. 하지만 보통 누군가를 평할 때 생각이 많다는 것은 이런 뉘앙스를 포함한다. 의문스러우며, 속을 잘 알 수 없고, 앞뒤가 다를 것 같고 거짓말을 잘 꾸밀 수도 있겠다- 너무한 일반화겠지만, 적어도 앞의 두 개는 옛 여자친구들이 꼭 한 번씩 주었던 표현들이다. 나는 정말로 이런 사람이 되어왔다.

 

*

 

 

이런 자신을 발견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컴플렉스라는 게 배양된 시기가 7살인지 11살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가슴에서 더운 덩어리로 울컥 쏟아진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스무 살을 훌쩍 넘긴 다음에. 인생이 내 맘 같지 않다는 진짜 의미는 그런 식으로 다가오고는 했다.

가끔 불안하다. 어떡하지? 대배우가 된다는 내 계획은? 장충동 국립극장에 올라가는 희곡을 쓰겠다는 포부는? 졸부가 돼서 엄마 이름으로 된 식당을 차려준다는 상상은 정말 꿈으로 그쳐야 하나? 이대로 성취나 자랑이나 멋진 여행의 기록이 아닌, 기껏해야 귀여운 시골집 강아지나 좌충우돌 과외선생 고생담만으로 인스타그램 좋아요를 구걸해야 한단 말인가?

스물다섯은 어린 날의 횡보를 대강 마무리하고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동료들을 SNS로 지켜보는 나이다. 누군가 취업을 자축하는 피드가 올라오면, 솔직히 초조하다. 동갑내기 여자애들에게선 –썸을 탔든 그냥 아는 애든- 거의 다 그 꼬라지를 봐야 했다. 아니 얘들은 허구한 날 페스티벌이랑 풀파티나 가면서 어떻게 다 취업한 거야. 물론 매일 술 마시는 스토리나 올리는 남자애들도 인스타그램에 즐비하다. 하지만 그들도 뒤에서는 악착같이 공부하며 열심히 산다는 거, 내가 모를 것 같나. 이 가식적인 녀석들아.

물론 이런 속내는 절대 –앞뒤를 불문하고 음주에 도취하는 동지들끼리가 아니라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의문스럽고 앞뒤가 다른 사람, 바로 요기 있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 꼴일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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