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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나는 2학년이 되자마자 전공을 떠나 광고 기획을 공부했다. 스물한 살, 로빈 윌리엄스라는 환영을 쫓아 연극과 신입생이 되었다. 그러나 준비 없던 내게 연극이란 고되기만 했고, 로빈 윌리엄스라는 우상, 창작이라는 꿈, 연극무대라는 환상… 이런 것은 잠깐 버려둔 것이다. 그래도 마케팅이란 재미있는 공부였다. 적성과는 조금 멀다는 걸 깨닫는 데 2년이나 걸린 게 문제였지만.

마케팅 기획서에는 타겟 연령을 분석하는 내용이 꼭 필요하다. “삼성 노트북 펜S의 주 타겟인 2025 Z세대 대학생은…” “서브웨이의 잠재적 소비자 후기 밀레니얼은…” 같은 식으로. 시장 분석이나 제품 소개 같은 것보다 어쩌면 훨씬 중요한 일이다. 1990년대 중반 출생인 우리 세대는 밀레니얼 세대, 또는 Z세대라는 집합 안에 들어가 있었다.

‘가볍고 휘발되는 관계가 훨씬 편안하니 누구나와 친구가 될 수 있는 후렌드(WHOriend)를 만나며’, ‘콘텐츠에 직접 참여하는 능동적 판플레이’를 즐기면서 ‘모르는 노래라도 차트에 있으면 들어보지만’,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순 없으니 구독형 소비를 추구한다’. 이를테면 전문가들이 분석한 우리의 특징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트렌드 코리아>나 <대학내일>의 팩트북에서 이런 표현들을 찾아내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나는 낯선 이를 사귀는 데 능란하지 않다. 카톡은 한 시간마다 몰아서 답장한다. 인스타그램을 하지만 태그는 달지 않는다. 옛날의 아이스버킷챌린지부터 오늘의 아무노래챌린지까지도 나에게는 늦게 도달하는 유행이었을 따름이다. 뿐인가, 나는 애플뮤직 월 9.99달러에도 손을 벌벌 떨면서 무료체험 한 달이 지나자마자 구독을 해지한 전력이 있다. 넷플릭스도 왓챠플레이도 유튜브 프리미엄도 다 그런 식이었단 말이다.

무엇보다, 멜론 TOP 100에 코웃음을 치며, 마음에 드는 뮤지션을 찾으면 디스코그라피째로 음원을 사 모으는 것이 아주 오래된 습관이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대도 음악만은 소유해야겠어, 이런 것이었을까.

하지만 김난도 교수나 <대학내일 20대 연구소>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물론, 기깔나는 CF를 만들어 보겠다는 혈기는 광고 동아리에 들어가자마자 시무룩해졌다. 신입생들의 막연한 꿈은 광고 천재 이제석이었지만, 우리를 맞이한 건 현업에서 쓰는 전문용어들이었다. ‘BTL’1이나 ‘USP’2가 다 뭐란 말인가?

1Below The Line. TV CF나 인쇄 광고처럼 전통적 매체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현장 프로모션이나 SNS 바이럴 마케팅처럼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는 전략을 말한다. 이걸 개발하는 게 오늘날 광고 제작 흐름의 거의 전부인데, 멋들어진 TV CF만 생각했던 나는 대단히 당혹했다.
2Unique Selling Proposition. 해당 상품만의 차별적 장점.

하지만 AE(광고기획자)의 길을 접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자아 성찰의 결과였다. 우리 세대의 특성과 내가 조금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것. 글재주 칭찬은 좀 들었어도 카피는 안 와닿는다고 했고, 열심히 분석해 내놓는 인사이트란 터무니없이 뜬구름만 잡는 얘기들이거나 ‘인디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세미나 도중 책상 위에 올라서야만 직성이 풀리는, 키팅 선생의 철딱서니 없는 제자였던 게다.

*

그것은 당연히 켜켜이 쌓여온 내 유년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박명수와 뉴캐슬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크리에이티브한 광고기획자가 되기 위한 가망을 살릴 수만 있다면, 하련다. 딱 10년 전인 2010년으로. 일곱 살에도 열 살에도 기회는 아직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날 선택한 길이 완전히 굳어져 버린 터닝포인트는 바로 그때였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2010년이 벌써 십 년 전이라고 하면 굉장히 놀랍다. 그러나 그 시절은 내 머릿속에서 벌써 어떤 세련됨 가득한 시기로 미화되었으니, 옛날은 옛날인 것 같다.

그랬다. 2010년은 박지성과 기성용의 지휘로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했고, <무한도전>은 여전히 재미있었으며, 영화 <아저씨>가 흥행하던 시대였다. 집권 여당의 이름은- 일단 이름이 멋지기로는 정치사에 손꼽힐 ‘한나라당’이었다. 사마귀 같은 내 사랑 뉴캐슬은 강등된 지 1년 만에 승격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갓 승격한 언더독의 결기와 흘러간 명문 팀의 바래져 가는 자부심이 아직은 적당히 조화를 이뤄서, 처절보다 치열이란 표현이 좀 더 어울렸다.

물론 원빈이 그 이후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한나라당이 그 쿨한 이름을 버리고 ‘자유한국’이나 ‘미래통합’ 같은 보급형 관념어를 선택하는 퇴행을 보일 줄도 몰랐다. 뉴캐슬이 한 번 더 2부리그로 떨어질 줄도 -정말- 몰랐고. 이 모든 것이 별달리 관계없는 사실들 같다면, 이 분석을 김난도 씨나 대학내일 20대연구소가 내놓았다고 생각해보면 그럴듯해질지도.

아직 인구의 절반이 피처폰을 쓰긴 했지만, 돌아보면 21세기의 새로운 십 년으로서는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촌스러운 구석이 있었고 지금보다 덜 진보하기는 했다. 하지만 모두가 좋아할 잔나비, BTS, 또는 손흥민이 등장할 토양으로서는 충분했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혐오는 덜하고 낭만은 더했다.

*

이런 시기가 흘러가거나 말거나, 나는 평행우주처럼 다른 것들을 탐닉하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그때는 유년기가 대충 정리되어야 하는 시기였다. 취향과 사고는 물론 학업성적과 미래가 결정되는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조금쯤 안타까운 일이다. 그 무렵에 심취한 건 일단은 학업이 아니었다. 소설과 사회과학을 읽고 로큰롤과 홍대 인디밴드를 찾으며 음원을 모았다. 낮에 캐치볼을 했고, 새벽마다 축구 시청에 열중했다.

공부마다 재미있는 다른 유희에 빠져드는 것은 어린 날의 누구에게나 있는 일일 테다. 문제는 그 학업과 맞바꾼 유희라는 것이, 하나같이 어설픈데 단단한 어떤 근성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야구는 축구와 농구처럼 함께 할 친구를 찾기 어려운 운동이었고, 두세 달에 한 번씩 팔꿈치나 다쳐오도록 했다. 여전히 축구를 좋아했지만 나는 이제 그럴듯한 팀의 팬이 아니었다. 나의 팀에서 내세울 것이라곤 블랙 앤 화이트의 예쁜 유니폼과 가끔 강팀과의 경기에서 활약하는 (그래서 큰 구단으로 이적할까 불안해지는) 군계일학의 선수 한두 명뿐이었다. 내가 닳도록 좋아한 소설이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란 소설이었다. 마치 내가 승률 1할 8푼의 꼴찌팀 같은 삶을 사는 듯 이입한 것이다. 기왕 사회과학을 공부하려고 했다면 눈높이에 맞는 것부터 배워야 했다. 그런데 나는 <미국민중사>, <정치경제학>, <자본론>처럼 지금 읽어도 어려운 책을 집어 들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 느껴지는 비주류적 혈기가 내 지적 허영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Movement’나 ‘혁명’ 따위의 단어에 가슴이 뛰고 마는, 텍스트와 관념으로 얽힌 엉성한 이념가 지망생이 되어버렸다.

이런 기이한 취향으로의 이탈은 의미심장하다. 바로 우리 또래 집단의 정상적 궤도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누구나 공감하는 것과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이랑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텐가?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농담에 소질이 있었다는 것인데, 아마 무의식에서 만들어낸 고육지책이었던 게 아닐까 한다. 지금도 머릿속 아싸방지위원회를 담당하는 뉴런과 테스토스테론들은 내 오래된 근성에 대항하느라 온통 고생일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근성은 그대로 정체성이 되었다. 그 정체란 방어기제, 비주류라는 자각, 언더독이라는 자의식이었다. 열심히 살기보다는 질투를 배우고, 치열하게 살기보다는 계급의식을 앞세우며, 더불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탓하기에 익숙해질 20대를 살게 될 운명을 스스로 찾아들었다는 것이다. 솔직하자면, 나는 몰래 농구 연습을 했고, 일부러 맨유와 첼시의 경기를 챙겨보려고도 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끝까지 읽으려고 노력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던 것이고, 결국 누구의 이해를 구하는 대신 함께할 목소리를 발견했다. 달빛요정3의 목소리는 투박하고 묵직했고, 윌 헌팅을 치유하는 숀 맥과이어와 윌튼 아카데미의 영문학 선생 존 키팅4의 그것은 나지막했다. 다른 우주에서 온 이방인이 2010년의 한국에서 붙들고 울먹일 수 있는 대사는 ‘It’s not your fault’였고, 이어폰으로 밖을 거닐 때 들어온 것은 ‘스끼다시 내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의 제일 심각하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컴플렉스가, 그대로 변하지 않는 우상이 되었다.

3원 맨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1973~2010).
4각각 <굿 윌 헌팅>과 <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엄스(1951~2014).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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