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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짙푸른 봄이 돌아오면 따가운 그 햇살 아래서
만나리라 우리들은 따분한 얘기를 나누러
학생회관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
텅 빈 운동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누군가의 열린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트럼본의 울림이

페퍼톤스, <청춘> (2014)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든 청춘의 배경은 캠퍼스다. 대학 새내기의 스무 살도 설익기야 하겠지만, 나는 입시에 실패해 아물지 않은 유년으로 스무 살을 맞은 소년이었다. 청춘이란 자리의 말석에도 못 낀 듯한 기분으로 일 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페퍼톤스 또한 유년에 사랑했던 밴드였다. 그들 초기작에 꼭 껴 있던 여성 객원 보컬의 달콤한 목소리만 좋아한 건 아니었다. <세계정복>(2005)이나 <남반구>(2005)처럼 꿈같은 가사가 소년의 몽상으로 튀어드는 발랄한 멜로디도 좋았다. 그럴 때가 있었지만, 어느새 그들의 노래는 훨씬 현실 세계에 가까워졌고 객원 보컬에 의존하던 가창력은 유희열 씨의 훈련으로 깔끔해졌다(탁월해졌다고 하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내가 갈피를 못 잡고 스물로 흘러갈 때, 페퍼톤스는 어느덧 <청춘>이란 제목으로 캠퍼스 라이프를 노래하고 있었던 게다. 아, 맞다. 그들은 –카이스트를 나온- 어른이었지. 어떤 면에서는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재수학원 통학버스에서 짙푸른 캠퍼스의 봄을 상상하는 건 너무 처량하던 것이다.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꼭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곡을 찾았다. 작년에 신보를 반가워하며 잘만 들었던 노래란 사실은 애써 외면했지만. 대신 위안이 되었던 건 당시 데뷔했던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이었다. 예전의 우상들과 달리 어쩐지 아득하던 ‘아이돌’은, 일단은 열패감의 대증요법으로 괜찮았다. 아련하고 풋풋한 걸그룹, 남자아이에게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할까. 사랑스럽고, 편안하다. 둘 중에 하나도 어려운데.

거기 마음을 맡기고 창문에 기대 잠드는 것이 스무 살의 매일 아침이었다. 서울 남쪽 위성도시에서 아이들이 모여들면 오전 7시 반이었다. 버스 창가는 스물들의 이십 년 어치 한숨으로 뿌옇기만 했다. 쏟아지는 아이들 사이로 잠에서 깨어 가방을 추스르면 꼭 이어폰이 한 짝 빠져 있었는데, 학원으로 들어서며 나는 부스스한 눈알을 굴렸다. 트와이스도 마마무도 아닌 이 애매한 그룹을 좋아하는 취향이 이어폰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아닐까?

 

노란 통학버스에서 내려 매일 출석하게 된 학원은 평촌 학원가에서 건물을 유일하게 홀로 쓰는 곳이었다. 적어도 1층 응접실은 자동차 대리점처럼 통유리로 노출되어 세련되고 넉넉했다. 교실도 첫눈에는 그랬다. 책상은 합판을 겹쳐 만든 공립학교식(式)이 아니라 매끈한 플라스틱이었고, 의자는 칠 벗겨진 데 없이 말짱한 베이지색 프레임이 더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첫인상은 채 몇 시간을 가지 못했다. 버스가 모여들고 경기도 남부 곳곳에서 온 아이들을 토해낼수록 강의실에 오륙십 명씩이 욱여 넣어졌다. 매끈하던 책상은 금세 지우개 가루가 덩어리져 날렸다. 톰보이 지우개 분진이 기침을 유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쪽 창가 여학생부터 교탁 앞 반장까지 감기가 옮는데 채 보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종종 졸음을 견디려 교실 맨 뒤 입식 책상에서 8교시를 내내 서 있었는데, 비좁은 501호를 조망하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래도 5층에서는 유일하게 창문이 있던 우리 반의 이름은 ‘A1’. 문과에서 가장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모아놓은 반이었다. 2015년 2월의 이야기다.

그해 학원가 문과 1반의 주류는 운 나쁜 외고생들이었다. 재수학원의 반배정은 보통 전년도 수능의 표준점수를 기준으로 한다. 전년도 시험은 유독 국어가 어려웠다. 영어와 수학에서 만점을 맞고도 국어에서 당황해 미끄러진 특목고생들이 많았다. 이들은 내가 추가모집을 붙들던 연말부터 일찌감치 평촌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안양, 군포, 수원, 멀리는 과천과 안산의 모범생들이었다.

우리 반의 첫인상으로 가장 강렬하게 들어온 건 그 집단 절반쯤의 희한한 복색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트레이닝복이나 후드티를 절반쯤 입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교복은 아니고 대학교 과 잠바 같은 건데, 뜻을 금방 짐작할 수 없는 이니셜을 등판에 새겼다. ‘GCFL’이 대체 뭐란 말인가? 과천외국어고등학교란다.

확실히 해두자. 절대 외고나 국제고에서 단체복을 맞추는 풍속을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도 대학에 들어가 ‘과잠’과 ‘돕바’를 맞춰 입었으니까. (솔직히 내가 지닌 겨울옷다운 겨울옷은 코트 한 벌을 빼면 학교 마크와 학과 이름이 크게 새겨진 돕바가 전부다.) 다만 그다음 문과 1반의 느낌으로 들어온 게 그런 옷을 입는 아이들 몇의 꼬락서니였을 뿐이다.

이 친구들은 이랬다. 어느 날 점심때 ‘건국’ 우유를 줬다고 정말로 성을 낸다. 그날 우유를 먹지 않은 날(다이어트 때문이었다) 유심히 관찰했는지 친근감을 표한다. 그러다가도 수업 필기 노트를 한 번만 보여달라니 정중하고 재수 없는 웃음으로 거절한다. 월간 모의고사 이틀 후 복도에 50등까지 실명과 등수를 붙여내는 빌보드에 일희일비한다. 국어 점수만은 높은 편이었던 내게 시험 후 관심을 표한다. 그리고 항상 50~60점쯤 하던 내 수학 점수를 확인한 뒤 안도하고 돌아간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필기를 못 한 것도 사실이고, 단 한 번도 ‘차트 인’을 하지 못한 내가 우스울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내 점수를 듣자마자 대놓고 실실 쪼개면서 돌아설 수 있나. 너무 노골적이라 순수할 지경이었던 이런 행동양식은 그 잠바를 입는 친구들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던 J라는 녀석이 있었다. 그는 겉보기는 –좋게 얘기해서- 완벽한 모범생이었다. 짙은 테와 훨씬 짙은 도수의 안경, 파묻히다시피 문제집에 몰두하는 모습, 무엇보다 교탁 바로 앞자리를 삼월부터 오월까지 고수하던 의지. 정말이지 공부를 못하는 친구처럼은 보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끔 영어 지문을 들고 와 질문하는 나에게 비추는 한심하단 눈빛까지도. 그래도 몇 번인가 얘기해보니 그는 나처럼 락을 사랑하고 이념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그걸 숨기는 듯 언뜻언뜻 알아주기를 바라는 눈치가 엿보였고, 어쩐지 동류를 발견한 듯한 섣부른 흥미가 났다. 필통에 전자기타 피크가 있고, 쉬는 시간에 <자유론>을 읽는다면- 호기심이 돋는 것이다. 범생이와 언더독, 둘 중에 무엇이 녀석의 정체에 더 가까울 것인가, 하는.

답은 곧장 나왔다.

– 나는 드림 시어터를 자주 들어.
– 그게 메탈이라기엔 너무 대중적이지 않나?

– 사회주의가 다 나쁜 건 아니잖아. (이런 주제를 재수학원에서 꺼낸 나도 할 말은 없다.)
– 그건 구시대의 유물이잖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화 속에서 J가 선사한 깨달음이 있기는 했다. 녀석 앞에서 내 ‘기이한 취향’이랄 것은 그저 얕은 게 아닐까 하는 것. 그러니까 데스메탈을 좋아하고 이념서를 훨씬 열심히 탐독한 녀석에게 나는 ‘매니아’ 자격조차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꿈틀거리는 짜증에 자기성찰도 호기심도 미뤄두었다. 이게 다 한국식 범생이들의 한계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긴 그들도 내가 달갑지 않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맞은 준거집단, 그곳의 주류와 동떨어지게 되었다. 지금 보면 당연하지만, 그때는 당황했다. 나도 등판에 뭐라도 써 붙여야 하나? (이건 가능했다.) 수학 점수를 끌어올려야 하나? (이건 어려웠다.)

오, 둘 다 싫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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