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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비아냥대자면, 걔네들과는 출신성분부터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나는 공립고등학교 출신에, 수학과 영어에서 깎인 점수를 국어로 메운 덕에 턱걸이로 문과 1반 커트라인에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학원이었다면 2반에 가야 했을 것이다.) 특히 들어가자마자 치른 사설 모의고사에서 수학 ‘47점’, 그다음 달에는 OMR카드 마킹을 잘못해 ‘8점’을 찍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3월에도 4월에도 반에서 꼴찌였다. 교무실에서 듣기로는 학원 역사에 남을 화려한 데뷔였단다.

나도 내가 꼴등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수능 점수란 정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4등급이 1등급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우연히 전 과목 만점을 맞은 친구는 있을 수 없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연기를 못해도 끝내주게 잘생겨서 주연을 따내는 배우, 맞춤법도 안 맞는 감성 글귀로 인스타 팔로워들에게 책을 팔아먹는 작가, 아버지를 잘 만나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논문과 표창장을 첨부할 수 있는 고3 따위는 적어도 수능이란 판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싼 사교육으로 성적을 올리는 부자 아이들이 있겠지만, 돈이라도 쓰는 노력이 가상하지 않은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천재가 아니란 사실은 진작 알았지만 어디서 꼴등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잖아도 한참 떨어진 자존감이 나락으로 향하고 대신 열패감이 솟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재수학원에 들어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 나는 학교에서 학원으로 옮겨 온 것이었다. 이야기에는 목적이 필요하며, 목적은 대학이었고,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필요하지 않다. 반에서 꼴찌인 나는 대화해봤자 얻을 게 없는 친구였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과목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단과 목적이 지배하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것은 꼴찌에게 슬픈 일이었다. 학교는 아무런 공통점 없이도 모두와 친해질 수 있었던 전인격적 공간이었다. 학원은 달랐다. 친해지자면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갈 꼬투리를 찾아야 하고, 다가가려면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Show&Prove. 이러하지 않은 곳이 서울 하늘 아래 없다는 진리를 깨닫기까지는, 이때부터도 한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어쩔 줄 몰랐다. 이 또한 적응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침착한 어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유년을 졸업하지 못했다. 자꾸만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두 내 이름을 알고, 어둠의 남학생회장이자 S고 신동엽이었던 내 진가를 알아주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약아빠진 스무 살 모범생들 말고, 아직 열일곱에서 열아홉에 머무르고 있을 유쾌한 녀석들이 그리워진 것이다.

*

길동무들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약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학군이 좋거나 학원가가 번성한 지역이라면 그렇지 않았으리라. 순진하게 십대를 흘려보내지 않게 재촉하는 풍조가 만연했을 것이다. 생존의 방도란 경쟁뿐이며, 성적이 올랐다는 건 옆자리 누군가를 밟고 올라섰음을 뜻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려줬을 거란 얘기다. 그러나 고3이 다 되도록 우리는 그냥… 어떻게든 될 줄만 알고 해맑게 열아홉을 흘려보냈다.

환경 탓을 하자는 건 아니다. 학교 주변은 무난한 동네였다. 서울 아닌 수원이고 경기도 남부 기준으로도 중산층이 사는 곳은 아니긴 했다. 그렇다고 문밖 판자촌이나 달동네냐면 더더욱 아니었다. 주변의 주공아파트들은 손님 맞기 남루하지 않았고, 골목길 주택가는 정돈이야 안 되었어도 구색은 넉넉했다. 학교 앞 독서실도 충분했고, 술집들과 뒤섞인 게 문제지만 근처에 번듯한 학원가도 있었다. 여느 동네처럼 빛바랜 금색 알루미늄 창틀과 비닐도 덜 뜯은 플라스틱 샤시만큼의 차이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졸부도 마음 아픈 가난뱅이도 없는 동네의 주민들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한데 섞일 수 있는.

무난한 동네의 사람들이라 하여 사연까지 무난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 남루까지 다 감출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동네의 친구들 역시 크고 작은 유난에 둘러싸인 녀석들이었다. 우리가 비슷하게 가진 건 사는 곳과 공립고라는 출신성분, 그리고 뭐라고 형언할 수 없고 어떻게 만들어진 줄도 모를 우정뿐이었다. 취향이 달랐고 시험마다 받아오는 점수도 제각기였지만 조금도 객쩍지 않게 길동무가 되었으며, 나만 뭔가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줬다. 내가 동네보다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고부터는 유독 그들이 지친 밤공기에 떠올리는 정든 집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지금 얘기하려는 D와 J는 모두 그런 친구들이다.

 

우리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고등학교 1학년의 급우였다. 학교는 집에서 제일 근처였으나 그 동네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역전 번화가에서 온 뉴캐슬 팬이라는 정체성으로 이미 서로를 아는 베드타운 남자애들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나만의 USP(!)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어른들의 세상에서 주워들은 19금 음담이며 능글맞은 농담, 가끔 농담의 내용이 빈약한 걸 가려줄 거친 입심이었다. 학교로 가는 시간은 버스로 20분, 또는 걸어서 30분. 그날 써먹을 농담을 떠올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컴플렉스의 방어기제로 발달한 거겠지만, 아무튼 우리 반 남자아이들의 취향에 꼭 들어맞았다.

보통 점심시간마다였다. 나는 매일같이 칠판 앞에 아이들을 동그랗게 모아놓고 궤변을 설파했다.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시발>은 왜 욕인가?’ ‘어떤 야동은 왜 나쁜가?’ ‘올해 5위를 차지한 뉴캐슬이 다음 시즌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이유’ ‘한 층 아래 여학생들을 제치고 매점 줄을 일찍 서는 방법’ ‘체육대회 때 입을 티셔츠 디자인이 자기들과 비슷하니 바꿔 달라고 찾아오는 여자 반 애들을 물리치자’… 그때는 열광에 취해 의기양양했지만, 적어놓고 보자니 참으로 심란스럽다. 교실에는 마흔 명 소년들의 호르몬이 머릿내로 진동했다. 짓궂은 소년들의 성깔들이 함께 퍼져 있었고, 나는 그 성깔을 효과적으로 선동했다.

환호성 속에 한바탕 열을 올리고 자리로 돌아오면 어딘가 공허했다. 연극이 끝난 배우의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모두의 호감을 살 수 있었지만,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새 학기부터 여름이 다 되도록 우리 반의 MC 같은 존재가 되긴 했지만, 정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을 구하지는 못했다. 솔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해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대화들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그게 거북스러운 데가 있었다. 누군가 “형제 있어?”라고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고, 돈이 없을 때 친구들과의 약속을 조용히 취소하는 이유를 똑바로 댈 수 없었다.

 

내가 토하는 열변 중에는 ‘학교 축구대회에서 사용할 우리 반의 4-4-2 전술’도 있었다. 우리 반엔 이미 무리 지어 축구를 하던 친구들이 예닐곱 있었고, 축구를 매개로 나도 끼어들게 되었다. ‘4-4-2’는 우리가 첫 경기에서 패배했으므로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이들과 3년 내내 함께하게 되었다. 사라진 강제 야간자율학습 대신, 수업이 끝나고 비는 집에 놀러 가거나 돈을 모아 치킨을 사 먹던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친해진 건 D였다. D는 나 같은 노력이 없어도 이미 누구나 인정하던 인싸였다. 축구에 능하고 노래방의 에이스였으며 춤을 잘 춰서 축제 때 학교 댄스팀의 파트너 제안을 받기도 했다. 우리 가운데 노는 것을 가장 좋아했고, 잘했고, 또 거기 익숙했다. 나야 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친구들하고만 있어도 즐기질 못했다. 못하기도 했고. 축구는 해설에나 능했고 노래방은 녹록한 곳이 아니었으며 춤으로 가면 말할 것도 없다. 해서 D를 만나고 한 달이 될 즈음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것이었다. ‘나와 반대편에 있는 류(流)의 인간: 4-4-2에서 가장 덜 친해질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았다. D는 나와 급격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함께 수학 과외를 받으면서부터였다.(과외 선생님은 염가에 나를 도와준 실력자였지만, 나는 결국 숫자와 친해질 수 없었다.) D의 형은 축구 선수였고, D도 잠깐이나마 축구를 했었다. 체육대학을 가려고 준비하기도 했지만, 무릎이 상하는 바람에 그만두고 입시를 준비하려던 거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이면 같이 학교에서 나와 우리 집으로 향했는데, 걸어가는 대신 버스요금으로 주전부리를 까먹었다. 집으로 가는 30분은 길었다. 홀로 농담을 떠올릴 때보다 함께 나눌 수 있는 얘기가 많았다. 나는 내 모든 친구 가운데 최초로 D에게 내 가정사를 털어놓게 되었고, D 또한 마냥 즐겁거나 별일 없이만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J는 처음부터 나와 동류(同流)라고 느꼈다. 남성 호르몬이 가득하던 우리 반에서 그는 가장 조용한 축이었다. 드물게 성당을 다녔고, 쉬는 시간엔 주로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말을 걸어보면 대화에서 배려와 선함이 묻어나는 친구였다. 내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순수한 선(善)이기만 한 게 아니라 ‘상처 입고 싶지 않으니 상처를 주지 않겠다’라는 일종의 방어기제로 느껴졌다. 내가 성깔을 숨기기 위해 거친 표출을 택했다면 그는 훨씬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녀석이었고, 고등학교 생활은 J와 함께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친밀함으로만 따지자면 그는 분명 내 동심원의 정중앙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있었다. 웃고 떠드는 건 4-4-2와의 몫이었다면, 그런 뒤 돌아와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건 그와의 몫이었다. 그러나 4-4-2와 몰려다닌 날이 오래될수록 J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방과 후 어딘가로(아마 우리 중 누군가의 집으로) 몰려가는데, 그가 하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부럽네, 나도 그런 애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잠깐 녀석을 쳐다봤고, 그 순간 J는 그 독백을 후회했다고 한다. 내가 느낀 건 측은함이었을 것이고, 그는 동정받기를 싫어하는 성격이다. 나는 그 친구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겠지만 당장은 훨씬 유쾌하고 편안한 무리 속으로 다시 들어갔을 것이다. 얼마 전 그가 일러준,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화다.

나는 나중에 서울살이가 괴로워질 때마다 J에게 거의 모든 넋두리를 했는데, 그럼에도 항상 J는 내 일방적인 얘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때까지 J 역시 내 의뭉스러운 속내의 감을 잡지 못했었고, 내가 가끔 불쑥 찾아와 한탄을 쏟아내자 오해를 풀고 나라는 인간을 믿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들에게 그랬던 만큼, D와 J가 마음속 불안과 상처를 나에게 털어놓았을 때는 나도 눈물 나게 고마웠다. 내가 남에게 믿을 만한 존재가 된다는 느낌은 형언할 수 없이 벅차다. 우린 서로에게 위로일 수 있었다. 다만 함부로 공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취향도 성격도 다른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냥 담담한 일상을 함께 보냈고, 오늘의 안온에 묵묵히 머물러주었다. 그것만으로, 고맙고 그리운 얼굴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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