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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재수학원이란 게 원래 별일 아닌 것에 민감해지는 곳이다. 벌점을 부여하는 사감 선생이 돌아다니는 복도와 남녀 간 대화를 금지하는 비좁은 교실에서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상처 입은 전직 고3들이 거기서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다. 우중충하고 예민한 공기가 떠다녀 나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게 되는 곳.

그래 봐야 재수생들은 스무 살이었다. 청춘은 캠퍼스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절망적인 공기에 비길 만큼의 활기쯤은 있었다. 무엇보다 삼월이었다. 성급한 아이들이 꾸던 한낱 봄꿈이라기엔 창문이 모자란 학원가에도 이미 파릇한 설렘이 건너와 떠돌았다. 나도 계절에 은근히 응하고 있었다. 아직 옛날의 친구들이나 익숙한 동네로의 향수에 젖어있긴 했어도. 그리워하거나 들뜨거나,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모순은 꼭 봄에 두드러졌다.

우리 반에도 재수 없는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보다 조금은 온건해진 농담으로, 항상 어울려 다니는 여섯 명쯤을 만들었다. <프렌즈>처럼. 마침 나처럼 거의 다 일반고 출신의 친구들이었다. 출신을 가린 적은 없지만 어쩐지 그렇게 나누어지게 됐다. 물론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는 (사감이 없는 유일한 공간인) 학원 옥상에서, 토요일이면 (평촌 재수생들의 대학로) 범계역 번화가를 함께했다.

문제는, 우린 정말 프렌즈처럼 남자 셋 여자 셋의 혼성그룹이었다는 사실이다. 남녀가 함께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우리 말고는 없었다. 짝지어 입식 책상에서 졸음을 깨고 소리 죽여 장난을 치고 옥상에 몰려다니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면학 분위기를 흐리는 날라리 그룹으로 찍혀 있었다. 분위기 흐리지 말라던 반장과 말다툼을 한 것도 여러 번이다. 당혹스러웠다. 학교에서는 내가 –표면적- 모범생들 가운데 가장 날라리쯤이라고는 할 수 있었겠지만, 여기 이 너드들 사이에서 쌩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니 조금은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 범생이 새끼들이 정말!

그러나 웃어줄 뿐이었다. 반장이 전화번호를 물어봤던 (그리고 바로 거절당했던) 여자애가 바로 우리 그룹의 일원이었다. 어른이 덜된 남자애의 우월감이 베푼 아량이었다. 요컨대 입석 버스에서 좀 시끄럽게 통화하는 밉상이 있어도, 내가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게 뭐 큰일이겠나?

 

나는 그녀와 특히 친했다. 입식 책상에서 함께 수업을 들으며 흘긋 훔쳐보면, 집중한 시옷 자 입매가 세모나게 마중 나오는 것이 귀여웠다. 그래서 그 여자애를 가끔 ‘김세모’라고 불렀다. 겉으로는 놀리며 부르던 별명이었지만.

…그랬다. 이내 그토록 동경하던 <세 사람> 뮤직비디오를 찍게 된 것이다. 캠퍼스가 아니라 경기도 제1 학원가 평촌동이었고, 녹음 우거진 잔디밭이 아니라 합성 도료가 깔린 옥상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세모와 만난 것이다. 삼월 늦게 돋아난 달뜬 공기에 나도, 그 친구도 취해 있었다. 우리는 제대로 된 데이트도 하지 않고 손을 잡았다. 화창한 날 옥상 한편이나 통학버스에서 내려 함께 뒷골목 편의점에 들렀던 잠깐이 비슷한 순간들이긴 했지만.

내 취향이란 꼭 이성에게만은 너른 보편성을 띠어왔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꼭 다른 누구도 이미 그녀를 좋아했다. 매일 밤 전화로 서로의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기, 프렌즈의 다른 남자애도 세모를 좋아했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우린 매일 저녁 통학버스 대신 손잡고 지하철을 탔다. 교통카드를 찍으며 세모는 그 남자애의 티 나는 행동을 얘기했고, 플랫폼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여섯 명의 (두 달짜리) 우정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그냥… 도착한 지하철 문이 열릴 때까지 그녀를 안아줬다.

이내 그 남자아이는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벗어났다. 남자아이 둘을 뒤로하고 우리는 좀 더 당당히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모를 안아주고 고백을 나눈 다음부터 겁이 났다. 서로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면, 내년에 우린 정말 행복할까?

오래지 않아 설익게 만나왔던 우리 둘이 헤어졌다. 한 달도 안 되어 이별을 고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쓰레기’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무겁게 인정했다. 잠복하던 불안을 어쩌지 못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고도 여전히 좋아해를 속삭이던 건, 욕심이었다. 세모는 곧 학원을 떠났다.

이 모든 게 두 달 사이에 일어났다. 우리 날라리 혼성그룹 ‘평촌 프렌즈’는 두 달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세 명쯤 되는 나머지 아이들이 여전히 한 교실에 있었지만, 여전할 수는 없었다. 나는 레이첼 없는 로스였고, 조이는 이미 떠났다. 챈들러가 있었겠지만, 친구들이 없다면 누가 싱거운 농담에 웃어주겠나? 이제 아무도 수업시간에 장난을 치거나 옥상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학원을 나오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월이었다. 봄기운에 홀려 있다 눈을 떠 보니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있었다. 슬슬 반팔이 몸에 익었다. 점심때 자다 깨어보면 모두가 그 시간을 쪼개 문제집을 풀고, 뭘 하다 이제 일어났냐는 듯 나를 한둘씩 쳐다보고는 했다. 낮잠은 나른하지만 야릇한 우울과 환멸도 주는 것이었다. 문과 1반 꼴찌의 열등감이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걸 억지로 감내하던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수학문제집을 붙들고 있었는데, 막혀버린 문제를 데면데면하지 않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없었다’보단 ‘없구나’가 어울리겠다. 깨달음이었다. 나지막이 탄식하며 일어섰다. 나는 옥상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시, 봄 햇살이 유난했고 계절은 시리도록 파랬다. 학원가의 간판과 인서울 진학비율이 내걸린 현수막에 햇빛이 부서졌다. 큰 숨을 한 번 쉬었다. 이윽고 빈 교실을 찾아 내려왔다. A4용지 상자를 주워 곧장 책들을 옮겨 담고, 교무실로 가서 퇴원 신청을 했다. 아버지와 상의한 일이라고 했지만 거짓이었다. 나는 버티지 못했다.

5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그 볕이 외곽순환도로 고가에 가려질까 무서웠다. 뛰듯 내려오는 동안 백팩도 종이상자도 무거웠지만, 다행히 햇빛은 여전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훤히 트인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졸며 익숙한 정류장에 도착했다. 유년이 아로새겨진 동네로 돌아오는 낮기운에 잠깐, 눈물 나게 행복했던 기억이다. 나는 정말 내 인생의 영토를 조금도 넓히지 못하고 스무 살 다음을 맞으려던 걸까?

2015년 5월, 봄이 여름을 향하고 있었다. 명도의 지렛대가 끝까지 당겨지는 계절이었다. 재수학원 삼 개월 만에 나는 승려와 사제에게도 어렵다는 독학 재수를 시작했다.

*

하지만 그것은 내가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 궤란 성공적 대입을 조력하는 누군가로 둘러싸여 있다. 대형 학원의 정치한 커리큘럼과 강사진, 졸음을 깨우는 사감 선생, 당장 눈앞에 보여 몸이 달게 만드는 경쟁자들… 이런 게 없어도 수능을 잘 본다는 건, 즉 그 모든 좋은 조건 속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선다는 건, 불가능하다. 천재이거나 정말 비상한 각오를 악물었거나 학원 밖 다른 유희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을성이 있지 않다면.

물론 내가 수재를 자임하던 시절은 열두세 살 언저리에 끝났다. 연애에서 도망갔지만 이를 악물 각오까지는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돌아보자면 결말은 예정된 일이었다. 학원을 나왔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인내심의 빈곤, 조금이라도 고된 것은 피하고 당장 안온한 길로만 찾아드는 습성. 아무리 변명을 쥐어짜 봐도 학원 생활을 못 배기고 도피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적응하지 않고 회피하기. 이것은 놀랍도록 비슷한 패턴으로 내 이십 대를 지배하게 된다.

 

기이한 취향들을 제외하고도, 내 딱한 컴플렉스는 다양한 측면에서 뿌리박힌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유독 셈에 약했다. 이를 일찍이 간파한 아버지는 수학 교육에 매우 공을 들였다. 그는 공대를 나왔는데 아들은 주먹구구도 틀려먹으니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당신이 직접 공부를 시키려고도 하셨다. 하지만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때려봐도 벽창호였다. 학원이나 과외선생님 같은 전문가의 손에 맡겨진 중학교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놀랍지만 당연하게, 단 한 번도 수학문제집을 끝까지 풀어본 일이 없다. 내 세계관에서는 신기하게도 끈기와 고집이 반비례해왔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떠나면 역시 돌아섰다. 수학을 잘하는 유전자를 물려줬어야지, 그건 엄마랑 아버지 몫 아닙니까? 이렇게 변명하기엔 나는 회피한 게 너무 많았다.

그 봄날, 나는 집에서 오랜만의 고요를 누리고 있었다. 퇴근한 아버지는 나를 보고 놀랐다. 학원은? 내가 채 몇 마디를 하기도 전에 그는 사태를 모두 파악했다. 그는 질리고 말았다. 어릴 때 투정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저놈의 고집이 기어이 사단을 내는구나- 이것이 내가 애쓰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당시 아버지의 심경이다. (함께 술을 먹다 그때를 입에 올리면, 너 그냥 도망 나왔던 거 아니냐! 라고 성을 내신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아유 소리 좀 줄이세요… 라고 하는 수밖에는.)

학원에 돌아가라, 그럴 수는 없다… 고성을 내며 저녁나절을 싸웠지만, 아버지는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는 나와 대화를 그만두었다. 다음 날 아침 시골로 내려가 버리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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