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재수학원 블루스 (3)

→ #6. 모르지만 알았던 (2)

 

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두 차례 암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격통에 시달리고 있을 중병환자들에게는 면구스러운 소리지만, 그 연세에 찾아든 암을 그렇게 넘긴 것은 다행이었다. 그해 아버지는 우리 나이로 딱 일흔이었다. 첫 번째 수술은 쉬웠다. 대장에 용종이 있었고, 초기에 발견된 것이라 배를 열지 않았다. 두 번째도 어려운 건 아니었다. 암세포가 간으로 옮았다. 20%의 간을 잘라냈지만 그뿐이었다.

다만 그 뒤가 좀 길었다. 아버지는 24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치료제를 투여받고 며칠은 손바닥이며 얼굴까지가 꺼멓게 바래가곤 했다. 일찍 진압된 암이니 그렇게 강한 약이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느낀 건 칠십 노인의 백발이 낯빛과 너무 세게 대비되었기 때문일까. 원래부터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유독 새하얬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2003년 이래 일 년의 절반 이상 검게 염색을 했다. 조백(早白)하는, 그러니까 머리가 일찍 세는 게 집안 내력이었다. 1997년 아버지가 53세였던 내 돌잔치 사진을 보면 머리칼이 날카로울 정도로 새하얘 보인다. 그때쯤의 모습이 담긴 KBS ‘뉴스광장’ 비디오테이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재생하기도 어려운 VHS 테이프엔 염창동 일대 재개발을 보도하는 뉴스의 한 꼭지가 담겨 있다. 아버지는 재개발 구역 보상과 아파트 신축을 담당한 건설사 상무로 인터뷰를 했는데, 머리는 역시나 하얬었다. 시간이 흘러 다섯 살, 일곱 살쯤 들어서의 사진첩을 넘겨봐도 비슷했다. 경조사에 참석하거나 말거나 텔레비전에 나오거나 말거나 사업상 사람을 대하거나 말거나 하얀 머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사진첩을 넘겨보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해서 머리가 까매지고 있다. 여쭤본 일이 없으니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있다. 학교에 찾아오시는 날엔 친구들이 아버지를 가리키며 반드시 “너 할아버지 오셨어!”라고 천진하게 말했던 기억 말이다. 더러는 선생님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다가 이내 얼굴이 빨개져 당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었다. 아이들은 내가 “우리 아빤데?”라고 하면 “머리가 하얀데??”라고 되묻고는 했다. (그 어리둥절함을 물음표 하나로 묘사할 수 없다.) 이해한다. 솔직히 말해 뭐가 상식적인 추론이겠나? (그나마 선생님들이 그렇게 되물으신 적은 없었는데, 그건 행운이었다. 어른의 자제력을 시험하기에 아버지의 머리는 지나치게 하얬다.) 아버지도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지만 야릇하게 앳된 눈과 둥그런 얼굴형 덕분에 좌우지간 염색만 했을 때라면 그는 전국의 1945년생 가운데 외양이 가장 젊은 축에 들었다. 꼭 아들로서의 콩깍지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동창들 여럿을 만나보고 나서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고 또 다행스럽게 여겼었다.

아버지는 치료를 받으러 한 달에 한 번 서대문 삼성병원을 오갔다. 그 무렵 부모님은 완전히 따로 살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수원 집에 살았고,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영주의 과수원에 있었다. 엄마도 나도 그러자고 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물리적인 별거가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러지 말자고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 생각이야 좀 다르긴 했지만.

우리 가족이 쫓겨난 한강 변 아파트가 염창동에 있었다. 아버지가 건설회사 현역에 있을 때 직접 짓고, 관련해서 뉴스 인터뷰를 했던 그곳이었다. 쫓겨간 곳은 수원이었다. 수원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건설용역업체, 쉽게 말하면 인력사무소가 있었다. 건설사업을 완전히 접고 인맥이 닿아 있는 현장에 인력을 알선하려던 것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어느 날 인부 몇을 보내 달라고 전화하면 사무실에 등록된 인부 가운데 적합한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옆에서 들은 아버지의 통화 시퀀스는 이런 식이었다.

– 박 소장, 오랜만입니다… 16일에 목수 셋? 요새 사람이 많이 없는데. 전화 드릴게요.
– 김씨, Y 인력인데 목요일에 일 좀 볼 수 있소? G동 R 아파트에서 와달라네. 안된다고?…
– 아 박 소장, 16일에 목수 셋, 셋은 안 되고 둘밖에 안 되겠는데.

비슷한 통화를 너댓 번은 해야 하나가 성사되는 꼴이었다. 이밖에도 일하러 나간 인력이 펑크를 낸다거나 임금이 밀리는 일도 많았다. 거칠게 살아온 십장들을 상대하는 일 역시 버거운 일이었다. 아웃소싱이 사실 모두에게 버겁다. 뭘 책임진다고 하기는 애매한데 신경 써야 할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원래가 수수료를 떼어야만 이익이 나는 일이니 양쪽에서 좋은 소리를 듣기도 어려웠다. 건설현장에서 평생 현장소장을 했으니 공사판 밥을 먹을 대로 먹었겠지만 이렇게 중간자적 입장에 끼어보는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수원 사무실에 십 년을 있었다.

아버지는 그러는 동안 꾸준히 머리에 검은 물을 들였다. 내 친구들 볼 일이 있을까 봐 그러셨을지, 아니면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해야 하니 그랬을지. 타인에게 비치는 모습 때문이니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이유지만, 부디 그나마 후자였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 일들이 질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시골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과수원은 할아버지 평생의 업이었다. 농림부 공무원이었던 할아버지는 은퇴한 이후 40년 가까이 사과밭을 일궜었다.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이걸 물려받기로 했다. 귀농이었다. 주중에는 수원의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시골로 내려가 땅을 다지고 나무를 관리했다. 아버지는 내가 재수를 시작할 즈음 두 번째 수술을 받았고, 몸을 추스르자마자 마침내 인력사무소를 정리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영주에서 홀로 지냈다. 한 달에 한 번 항암치료를 겸해 수원 집에 들러 하루를 자고, 볼일이 더 있으면 하루 이틀 더 머무르다 돌아가고는 했다. 엄마는 함께 내려가지 않았다. 이미 완전히 지쳤고, 아버지와 더 대화할 의지를 상실했다. 생활은 나아질 것이 없었고 아버지는 사업을 정리할 때쯤엔 살림에 의미있는 보탬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나에게 가끔 엄마의 경제 관념을 믿지 못한다고 토로하기도 했는데, 그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주는 생활비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여차저차 아버지는 엄마가 영주로 함께 내려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연고도 없고 환영받은 적은 더더욱 없는 그 땅에서 살 마음이 없었다. 

나는 시간이 나면 가끔 아버지를 보러 갔다. 나를 제외하면 부모님을 잇는 끈은 거의 끊어진 것이었다. 서로 ‘동거인’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아니었다. 사실상 따로 살게 된 이후 엄마에게 지급된 양육비는 없었지만, (월세 보증금이 아버지 돈이긴 했다.) 나는 의무 반 자의 반으로 아버지의 과수원에서 며칠을 보내고 왔다. 미국 드라마에서 보던 아빠와의 주말 같은 것이었다. 드라마의 아빠들은 다양한 컨텐츠를 준비할지 몰라도, 우리 부자는 점심 겸 반주로 모든 것을 퉁쳤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아버지의 동안(童顔)도 제 나이를 찾았다. 매달 병원 일로 올라오는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머리 색깔이 쭉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골집에는 이제 기력이 모두 쇠하신 할아버지만 계셨다. 더는 검은 머리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의 머리 색깔은 이내 완전히 하얗게 돌아갔다.

수술을 마친 이동형 침상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나 항암치료로 갈라진 손바닥을 보여주며 웃던 얼굴은 그냥 말문을 막히게만 했을 뿐이다. 아버지가 정말로 늙어간다는 것이 좁아진 어깻죽지나 지벅거리는 걸음걸이, 이제 조금도 거뭇거리지 않는 머리에서 느껴질 때가 정말 눈물이 날 뻔하던 순간들이다.

내가 우격다짐으로 재수학원을 뛰쳐나온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늙어가던 시절이었다.

*

아버지가 나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영주로 내려가셨다는 건 부자 관계가 최악이 되었다는 것 말고도 다른 의미가 있었다. 우선 적어도 한 달은 연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독학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학원을 나오면 아버지가 독서실 등록금 정도는 내밀어 주시지 않겠냐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던 게다. 왜? 대학 등록금도 아닌데. 나는 일요일 아침에 한 시간 반씩, 고3이었던 친구네 동생의 과외선생으로 한 달에 10만 원을 받고 있었다. 독서실 등록금도 안 되는 돈이었다.

이 때 안온한 길만 찾는 여행자가 다음으로 의지할 방법은 하나였다. 구원 요청하기. 나는 주변에 광고를 돌렸다. “야 오랜만이다, 나 학원 때려치웠다!” “선생님! 저 학원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자못 유쾌하고 호탕한 전화 속 음성이나 카카오톡 메시지였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도움받을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이기도 했다.

 

계속


 

목록보기  using_kyu

Comment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