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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그 알량한 속내를 다 알면서도 나를 도운 이들이 많았다. 과외를 하던 친구네는 사정을 듣자 선선히 과목과 시간을 늘려주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두 과목을, 월 사십만 원이나 되는 과외비를 대학도 못 간 초짜 선생에게 안겨준 것이다. 친구네 어머님은 동네에서 순댓국집을 했다. 찬이며 뚝배기가 다 넉넉하기로 특히 이름난 곳이었다. 수업으로 방문할 때마다 차려주던 다과마저 너무 푸짐해서 그걸로 한 끼를 때울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학생이 문제를 푸는 옆에서 빵과 우유를 부스럭부스럭 까먹었으니 선생치고는 참으로 처량했다. 하지만 밥값은 그대로 굳는 것이라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선심에 보답하려고 애썼다. 조금은 둔하던 녀석의 성적 상승세를 어찌할까 고민하는 것으로. 지금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순댓국집에 들러 밥값으로 돈뭉치를 턱, 내놓는 객쩍은 상상을 해보고는 하는 것이다.

고3 시절 잠깐 논술을 배웠던 강사 선생님은 조교 자리를 제안했다. 항상 혼자 수업을 하던 분이었고 오롯이 나 때문에 만들어 준 자리였는데, 나는 체면이랄 것도 없이 달려가 모범답안을 작성하거나 답안지를 첨삭하며 꼬박꼬박 시급을 챙겼다. 투입된 반의 여학생에게 과외를 의뢰받는 행운도 있었고, 수능이 끝나고도 선생님은 나를 노량진 M스터디 같은 큰 학원에 데려가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다음 해까지 수지나 분당의 이곳저곳으로 나를 태우고 가서 좋은 ‘조교 자원’이라며 쇼케이스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 덕에 몇 년간 과외나 학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통로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주된 구직 방법은 새벽녘에 혼자 전단지 삼백 장을 붙이거나 중개업체에 전화를 돌리는 거였지만.

마지막으로 D와 J를 포함한 오래된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내가 연락할 무렵은 대학가가 중간고사에 한참이었던 시기였다. 그때는 내 전화에 기꺼이 모여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새로운 준거집단에 들어가 있기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물론 즐겁다. 하지만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을 붙여야 하고, 믿을 만한 사람인지 살펴야 하고, 분위기에 맞춰야 하고, 어떤 날엔 광대 노릇을 하며, 또 적당히 말을 아껴야 한다. 길쭉한 주점 테이블의 모두가 귀를 기울일 농담과 말하면 나보다 앞사람이 거북할 내밀한 얘기 사이에서 중도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맨정신으로, 때로는 취중으로 이런 고민을 하거나 다음 날 아침 후회하는 일은 스무 살의 우리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스물 언저리의 나날, 우리는 사람을 미련토록 쉽게 만나고 쉽게 믿어버리고는 했다. (그러다가 상처 입은 경험이 모두 있었으니, 후기 밀레니얼들이 ‘가볍고 휘발되는 관계를 지향하는 WHOriend1 2를 추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랬다. 새내기로 두 달을 보냈다는 건 그런 고민을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찾을 때라는 것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내 연락에 “그래?” “일단 모여보자.” 따위의 반응을 전화 너머로 들려주었다. 시험 기간이라는 걸 전혀 개의치 않고, 학원을 관뒀다는 소식에 의외라는 기색도 없는 흔쾌한 미적지근함이 나는 전혀 놀랍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만큼 뻔한 친구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슷한 부류가 아니라도 절친해질 수 있던 시대의 친구들이니, 그런 통찰쯤은 가지게 되는 걸까. 이 길동무들은 내가 공부할 돈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자마자 십만 원씩을 송금해 주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돈을 빌려달라거나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직접 꺼낸 적이 없다. 뭐라도 얻어볼 수 있을까 하는 영악함이 분명 있었지만, 술을 홀짝이다 보면 알량한 의도와 무관하게 진짜 한숨과 넋두리가 새어 나오고는 했다. 혼자서 재수를 시작하던 오월 무렵, 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던 주변의 호의에 어리둥절했다. 왜들 이럴까? 몰랐지만, 적어도 그게 부끄러운 것임은 알고 있었다. 말은 독학이었지만, 사실 여럿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 역시 알았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까지 먼저 연락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

 

아버지가 사과밭을 일구시겠노라고 했을 때 나는 반가웠다. 산촌의 농군이야말로 내성적인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다. 단순히 ‘경상도 어른’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물론 아버지는 무뚝뚝했지만, 생각이 많기도 했고 우유부단하기도 했으며 사람들이 다 그렇듯 바깥에서 외향이란 가면을 쓰는 것을 고되게 여겼다. 내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우리 집의 민망한 가정사와 그것이 초래한 일들은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그 문제로 아버지 탓만을 하기엔 그를 오늘날까지 떠밀어 온 것이 없지 않다. 나의 존재는, 아직은 나보다 그의 인생을 훨씬 더 많이 헝클어놨다. 일단 서자가 들어서게 된 건 그의 오롯한 의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1945년생이었고 장남이었으며 1919년생의 할아버지는 장남에게 아들이 없는 걸 마땅찮게 여겼다. 1990년대 중반의 지연된 시대상보다 몇 세대 이전의 인물들이었다.

그런 식으로 장손을 만드는 것은, 다소간 민망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려운 시절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육 남매를 다 서울로 올려보낸 할아버지에게 장남인 아버지는 깊은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1958년생의 엄마는 호적에 오르지 못했고, 그보다 몇 살 더 많은 ‘큰엄마(언젠가 아버지는 누나 쪽의 어머니를 이렇게 부르라고 했다. 나는 물론 거절했다. 엄마가 아니니까. 이건 어느 쪽의 기분이라도 나빠지게 하는 호칭이다.)’와 1978년생의 누나(누나는 누나니까.)가 기막힌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21세기에 살아갈 1996년생의 내가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가족사에 약점이 잡혀 상무에서 사장으로 승진하지 못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감당하느니 사업으로 뛰어들었지만 십여 년 동안 벌인 일들은 하나같이 망했다. 그는 이십 년 가까이 누나와 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누나 쪽에서 항상 거절했다. (나는 누나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가해자 측에 선 것 같아서 뭘 어쩌지는 못했다.) 인생이 끝을 향하는 아버지는 이 간단한 일조차 성사시키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는 회사에서 벌어진 고도의 ‘정치’나 사업할 때의 사정이나 할아버지나 누나를 탓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바닥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환경 탓을 하는 성정일 수가 없었다. 자기연민이 적다는 건 좋았다. 하지만 반대로 무엇이든 홀로 삭여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건 좋은 게 아니었다. 그의 스트레스는 대신 집에다가 곧잘 분출되고는 했다. 객관적으로 바라본 아버지의 가장 나쁜 성질이었다. 좋게 말하면 역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폭력이었다. 어릴 때를 지배하는 기억 중 하나는, 내가 방에 있을 때 부모님이 싸우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조마조마할 때도 있었으나 보통은 언제 다툼이 끝나나 지루하게 기다렸다. 아주 가끔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방문을 살살 열었다. 분노하면 물건을 집어 던지는 건 아버지의 버릇이었다.

 

아버지가 누구를 때린 적은 없었다. 거기에 대거리하는 엄마 성깔도 보통은 아니어서 큰일이 난 적은 없었지만, 엄마가 몰래 울었던 적은 가끔 있었다. 싸움의 도화선은 두 분이 비슷하게 제공했지만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엄마에게 성질을 부릴 자격이 없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식당 일로 늦게 퇴근하는 것이 싸움의 주된 원인이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아버지가 내는 월세 말고도 생활비가 절실했다. 아버지는 집안 살림에 들어가는 돈을 상세하게 알지 못했고, 단지 엄마가 씀씀이가 크다는 선입견으로 역정을 냈다. 결국은 그가 돈을 충분히 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여느 가정이 그렇듯 대부분이 금전과 관련된 갈등이었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건 살림을 따로 차린 아버지의 책임이었다. ‘큰엄마’와 누나 집에 어정쩡한 부채의식으로 금전을 보태면서 정작 엄마는 내 급식비와 수학여행비를 걱정하게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이십여 년을 살았다. 그래서 엄마가 영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을, 다시 말해 아버지와 같이 살기를, 아니 그와 무엇이라도 함께하는 것을, 포기한 걸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버지에게는 분풀이할 대상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홀로 곱씹고 삭여버리며 흘려보낼 시간이었다. 분출이 아니라 해감하듯, 조개가 모래를 뿜어내듯이. 힘없는 체념이라면 슬프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나도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물건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과 싸워서 이겨야 하며, 성나는 일이 생기면 별수를 쓰지 못하고 몇 시간 동안 걷다가 돌아오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

 

삼백 그루나 되는 사과나무를 혼자 관리하는 일이야말로 분노를 가장 잘 삭일 수 있는 일이다. 나뭇가지를 치고 밭에 비료를 뿌리고 이따금 발에 마당개가 채이면 밥을 주고… 그렇게 지나가는 하루 나절이 그럴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농군으로 지내는 동안 속을 가라앉히며 나를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아들놈으로 생각했을지, 서울로 다시 올라와 나를 마주할 때까지 그 심경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한 달 뒤 치료를 겸해 올라오셨다. 과수원에서는 사과꽃 만개하는 철을 이미 지나쳤었다. 파란 풋사과를 칠월 말에 딸지 팔월까지 농 익혀 딸지를 가늠하는 시기였다. 나에겐 홀로 하는 재수 생활이 어느 정도 정립되었을 때이기도 했다. 아침 일곱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하는 독서실을 구해놓았고, 인터넷 강의도 결제했고, 주말에는 학원 조교와 과외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영어와 수학 같은 취약한 과목의 공부를 중심으로 다시 짠 계획은 아직 그런대로 순조로웠다.

우리는 그 무렵 조용히 다시 만난 것이다. 과외를 마치고 오랜만에 저녁을 집에서 먹으려던 주말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흘긋 보더니 시선을 허공 어디에 두고 입을 열었다. “나가서 밥 좀 먹자.” 그는 반주 없는 맹탕 식사가 머릿속에 없었으므로 술을 마시자는 얘기였다. “너 여기 좀 앉아봐라.”, “너 아빠랑 얘기 좀 하자.”처럼 어릴 적에 두려워했던 그 어떤 발화(發話)보다 두근거렸다. 그래도 차라리 반가웠다. 어차피 술 없이는 오디오가 텅 비어버리는 게 그와 나였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집 근처의 화상(華商)에 갔다. 깐풍기와 125ml짜리 초록색 이과두주를 먹었다. 술병이 작은 김에, 그리고 우리가 거의 말을 하지 않은 통에 비우기가 빨랐고, 접시를 반도 못 비우고 불콰해졌다.

아버지는 다만 열심히 하라는 말을 붙일 뿐이었다.

정치토론도, 넋두리도, 불교 얘기도 우리는 하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대화보다 침묵이 더 길었던 최초의 기억이다.

 

계속

1 <2020년 소비 트렌드는 ‘클라우드 소비’… 밀레니얼-Z세대 트렌드 5가지> 2019.11.13, 대학내일 20대연구소.

2  #3. 우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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