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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나는 다른 모든 곳에서 떨어진 다음 조금의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한 건 실로 행운이었다. 그때 성균관대학교는(솔직히 말해 학교의 실명을 거론하는 게 조금은 거북하다. 내가 쏟아내는 말들이 학교에 누가 될까 두렵기도 하고, 명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라 어쩐지 자랑처럼 보이진 않을까 해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명륜동이나 혜화역, 안국역 같은 지명들을 학교 에피소드에서 얘기하게 될 텐데 그 근처의 학교란 서울대 의대와 여대뿐이다. 나는 의학도도 아니고 여자는 더더욱 아니니, 꾸역꾸역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수능 점수에 높은 비중을 두고 연극영화과의 연출 전공을 선발하고 있었다. 실기 시험이 있었지만, 시놉시스 작성과 면접을 합해 40%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줄거리를 써냈고 2분 40초밖에 안 되는 인터뷰에서 덜덜 떨었지만, 국어와 영어 점수가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예술대학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게다. 

그런 사실들을 알기 전, 그러니까 합격하기 전, 나는 결국 여행을 떠났다. 새벽녘 편의점의 담뱃값과 분당 중산층 학부모들의 쌈짓돈이 시급 6,000원으로 가공되어 온 것을 박박 긁어모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내가 실기 시험을 보러 학교로 가던 날은 우리의 돈을 모두 환전하는 날이기도 했다. 아침에 시험을 보고 점심쯤 서소문 외환은행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D는 이렇게 메시지를 남겼다.

– 시험 잘 볼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생각 좀 줄여라, 넌 잡생각이 너무 많아.

이 시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말 수가 줄어든 내 모습을 오랜 친구인 D는 다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가열한 웅변으로 먼 동네 출신이란 약점을 극복하고 친구를 만든 나였기 때문이다. 카톡을 보며 어느 한 편으론, 얀마, 아침에 일어나면 눈앞에 삼수하는 내 모습이 어른거려서 다시 잠들려다가도 이 개 같은 처지가 한 번 로딩되면 멈추질 않아서 늦잠도 못 잔다, 고 대꾸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속에 든 얄포름한 생각을 매번 주체 없이 쏟아냈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D의 지극히 상식적인 일침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내 처지는 계속 로딩되고는 했다. 여행을 가서도 같았다. 3주 동안 시베리아를 건너서 모스크바에서 3박 4일을 지내니 대강 10일이 흘러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열차 창 너머로 끝없이 늘어선 침엽수와 그다음 며칠을 흘러가는 설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를 떠나는 날 문자메시지가 하나 왔다. 등록 여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합격 통보를 받아봤어야 그것이 합격을 의미하는지 알았을 텐데, 나는 멍청히 1분 동안 문자 내용을 뜯어보기만 했었다. 2년 동안 수험번호와 이름을 친 다음 본 것이라곤 ‘귀하 같은 훌륭한 인재를 모시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같은 예의 바른 거절부터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냉담밖에 없었던 게다. 후자가 정확히 우리 학교가 불합격자에게 내미는 대사인데, 나는 이 대사를 두 번이나 보았던 바 있었다. 합격자 명단을 다시 조회해본 다음에야 내가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합격 축하 화면에는 Queen의 <We are the Champions>가 흘러나와 얼마나 난데없었는지. (잔인하리만큼 냉엄한 놈들, 하지만 장학금은 잘 받고 있습니다.)

 

*

 

검색창에 ‘상상 변비’란 병명을 검색해보는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초록창을 아무리 뒤져도 결과는 빈곤하다. 대개 ‘상상 초월, 임산부 변비’, ‘만성 변비에요 상상할 수 없는…’처럼 가슴 아픈 질문 글이 보일 뿐이다. 물론 ‘변비가 심해지면 야릇한 상상도 못 해’처럼 흥미로운 기사도 있지만 찾는 내용은 아니다. 혹시나 ‘환상 변비’나 ‘습관성 배변 요구 증후군’ 같은 것을 검색해도 역시 존재할 리가 없다. 자기 전 고구마나 해조류를, 가끔은 변비약을 먹은 다음 날 아침 화장실에서 그 효능에 감탄하지만 실은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12시간 뒤 장이 조응했을 뿐이다. 더없이 정직한 그의 ‘아웃풋’.

이 가련한 친구는 스스로가 변비에 걸려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불행히도 실제 그의 장운동은 너무나 활발해서 먹는 인풋 대비 아웃풋이 이보다 올곧을 수 없을 만큼 정직하다. 스스로 역시 그 사실을 잘 알며, 이 모든 게 가벼운 정신병 같은 짓거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다만 바랄 뿐이다. 본인의 장에 아직 몇 kg의 숙변이 가득하다고. 물론 이건 내 얘기다.

이게 다 강박증의 합병증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건전한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나는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센 편이다. ‘음식’이 아닌 ‘먹는 것’이라는 이유는, ‘음식’이란 ‘개체’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허기를 느끼면 애타게 먹을 음식을 고르고 식당에 갈 것인가 아니면 포장해서 집으로 갈 것인가 정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도착해 식탁에 정갈하게 음식을 놓고 가끔 정방형으로 사진을 찍은 뒤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 해치우고 나서 맞는 나른함, 이마저도 아주 많이 압축한 것이지만, 이 모든 과정을 포함해야만 ‘먹는 것’이란 행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이 정도였던 것은 아니었으나 재수 시절부터 점점 의존이 심해졌다. 이후에도 마케팅 기획서 공모전 제출이 임박했을 때나 글을 쓸 때(마감이 필요하지도 않을 때!) 증상은 특히나 심해진다. 남들은 과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러 나가지만, 나는 근처의 김밥천국이나 편의점을 찾는 것이다.

살이 찔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도 민감하다는 게 문제다. 다이어트의 정도는 식이요법과 운동이지만 나는 그보다 편하고 시원하고 유쾌하게 몸무게를 줄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일 킬로그램이 줄어 있고(코끼리냐? 라는 것이 이 얘기를 듣는 이들의 반응이다), 성욕과 식욕과 수면욕 다음가는 인간의 4대 욕구 배설의 쾌감이 충족되며 개운한 마음으로 빈 창자를 채울 음식을 찾으면 되는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뭐겠나? 그러나 이런 습관이 짙어질수록 몸무게는 좀처럼 줄지 않았고, 나는 변비 환자를 자임하며 어떻게든 ‘배출’의 빈도를 높여보려고 한 것이다.

 

스물다섯 해 동안 스트레스가 없었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즐거웠다. 좋은 구석을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었다. 뉴캐슬이 시즌 막바지까지 상위권에 있으면서 돌풍을 일으킨 해가 13년 동안 2~3시즌은 있었으며, 그렇지 않았을 때는 기아 타이거즈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거나 무한도전 내 박명수의 컨디션이 좋았거나 종종 사랑스러운 음악을 찾아냈으므로 거기서 위안이나 자부심을 얻을 수 있었다. (의존할 다른 구석이 없을 때 나는 어떻게든 취향에 부응하는 뮤지션을 찾아내고는 했다. 마이 앤트 메리나 나루, 피터팬 컴플렉스나 더 핀 같은 밴드가 그들이다.) 가계가 좀 많이 기울긴 했지만, 불우하다고 할 만큼 벼랑 끝에 내몰린 것도 아니었다. 한 달에 두 번은 치킨을 시켜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BHC 핫후라이드와 교촌치킨 허니콤보라면 무엇이 더 부러우랴. (그러나 1인당 GNP는 3만 달러를 넘었다는데, 역시 25년 동안, 우리 3인 가족의 소득을 합쳐 9만 달러의 절반이나마 되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항상 속내를 터놓을 친구들이 한 명 이상 있었고 많은 경우 못해도 남학생 몇 명은 따르게 만들 수 있었다. 어쨌든 부모님이 두 분 다 있었고, 모두 건강하셨다. 엄마와는 TV 속 맛집을 보며 다음 주 주말을 기약할 수 있었으며, 일부러 현직 대통령 칭찬을 통해 아버지를 자극하는 것으로 아직 생생한 기력을 확인하며 안도할 수 있었다.

누군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이나 스무 살이 넘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요즘 어떠냐고 물으면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객관과 이성의 회로로는 말이다. 요새 꽂혀서 듣는 노래도 있고, 그제 본 축구에선 뉴캐슬이 아스톤 빌라에게 6-0으로 이겼고, 보면서 먹은 치킨 맛은 대단했고, 배달이 늦어서 후반전에나 먹긴 했지만, 어제는 ‘무도’ 보면서 빵빵 터졌으니… 대강 좋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삶에 울적한 일이 없을 순 없다. 특히나 유년부터 목격해온 여러 가지 지랄 같은 장면들–집달리들이 털어가는 집, 부모님의 싸움, 누나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알게 된 것 등등-은 트라우마 같은 것으로 남아있었다. 외면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일들이었다. 누군가 엄마는 일하시냐, 아버지는 영주에 계시냐, 같은 말로 계속 찔러 봤다면 “아, 사실 요새 피곤합니다.”라든가 “몰라, 짜증나. 요즘…”으로 말을 줄줄이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을 차단했다. 사실 할 말은 많았지만, 내 얘기는 어쩐지 보편성이 덜한 것 같았다. 공감의 개연성이 별로 없는 배경의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로 얻어낼 건 최악엔 동정 차선은 연민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하자면 신체적 변비는 상상이지만 말의 변비는 실재하는 셈이다. 생각은 분명 무리 지어 오는데 말은 목구멍에 턱 막혀 있으니 변비라 함이 참으로, 더러운 비유지만, 옳다. 공공연하고 건강하게 울적함을 배출할 곳이 절실한데, 건전하게 그러할 곳을 못 찾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울적한 속마음을 꺼내 바람을 쐬어줄 어딘가가 된장국 그릇이 저절로 미끄러지는 김밥천국의 테이블이거나 GS25 쇼윈도 안쪽 구석의 전자레인지 앞이라는 건 좋은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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