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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문학이나 적어도 문학에 가까운 상업적 예술을 하겠다는 자가 주인공의 심리를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만큼 가망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단편소설을 쓰든 시나리오를 쓰든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극작가 지망생이기 전에, 표현이 서툴고 표현의 출처가 될 머릿속은 더욱 부박한 남자일 뿐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그때를 회상할 때 이것 말고는 다른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아, 시발.”

때로 인생은 단말마 탄식만을 요하는 것이다. 궂고도 오묘한 사건을 내놓고 두말없이 가버리는 아주 얄미운 놈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전부 다 내 탓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잘못을 돌릴 타인을 찾기엔 궁하고 이리저리 따지다 보면 비난할 것은 자신뿐이며, 그래서 결국은 고개를 저어 잊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그런 사건들 말이다. 스물한 살을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혜화동 미팅 대타 참변”이라고 불리는 일이 그러하였다.

 

나는 택시 안에서 부재중 전화가 십수 통째 울리는 휴대폰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어져 다음날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일도, 역시 과음한 다음 날 늦잠을 자 수염이 삐져나온 얼굴로 택시를 잡아타는 일도, 그렇게 출근한 학원이나 월요일 1교시 수업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못한 세수를 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숱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그 전날 밤의 일을 뼈아프게 후회하고 있다. 택시에서 지나치는 토요일 아침은 노곤한 난춘(暖春)이었다. 흐린 날 탁한 햇빛이 가물거리던 사월, 어떤 무력감이나 좌절이 섞여들지 않은 오롯한 후회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분명히 출발은 좋았었는데.

 

봄의 신입생들에게 쏟아지던 건 이런 것들이었다. 선배 무리들, 낮에는 어색했다 밤에는 둘도 없어지는 동기들, 매일 보는 얼굴들이라 고등학교 같기도 한 전공 수업과 타과생들로 붐비는 교양 수업, 새로 맞출 과 잠바 디자인 후보군,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만 학생회비가 부족한 탓에 소주 8:맥주 2 정도의 비율인) 수많은 술병들, 마침 철 따라 흐드러지는 벚꽃과 마음처럼 부풀어 오른 목련 같은 것들. 그 가운데 특별히 우리에게 특히 밀려오던 것은, 물론 다소간의 군기나 얼차려도 있긴 했지만, 조금 다른 것도 있었다.

연극영화과란 누가 있는 곳인가. 보이는 대로 몇 마디만 해보자면, 잘 생기고 예쁘고, 재미있고, 목소리가 울리고,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단 겉으로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 (물론 어느 정도는 고정관념이기 때문에, 이런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는 일부는 쉽게 제물이 되기도 하고. 이거 내 얘기다.) 그래서인지 그 봄 단톡방에 쏟아지던 ‘과팅’ 제의들. “OO대 OO과 3명, 할래?” 이런 제안을 너무나 많이 받아와주던 것이다. 특히 남자 쪽에서 여자 쪽에 제안하는 일이 더 많았다. 이성 사이에 시장 같은 것이 형성되면 양상은 비슷한 것이리라. 남자보다 여자 쪽이 훨씬 인기가 많고, 높은 가치의 수컷임을 자임하는 남성들이 달라붙는 것. 학과 동기들에게 들어오는 상대편 학과는 특히나 명문대 의대와 치대가 많았던 기억이다. 이것은 마치 결혼중개업 시장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신입생의 1학기는 정말 바빴고, 그 와중에 한두 번 참석해야 한다면 신중해야 했다. 매일반이었다. 프로필 사진의 얼굴, 또는 학교 간판을 따지는 것 둘 중에 무엇이 덜 세속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건은 그 가운데 시작됐다. 경찰대학에 다니던 친구가 나에게 과팅을 요청했다. 3대 3. 물론 이 친구도 남자였다. 하겠다는 여자 친구들이 있어 단톡방을 만들어주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며칠 뒤 동기들 편에 잘 되어가냐고 물었더니, 남자들이 너무 말이 없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와 잔기술들을 전부 끌어다가 어떻게든 건덕지를 만들어 보려는 것이 남자들의 본능이어야 하거늘. 곧장 예비 경찰(지금은 의경 기동대장이 돼 있다.) 친구에게 연락했다.

– 이게 무슨 소리야 이 멍청이들아.
– 용규야, 네 친구들이 너무 예뻐. 그래서 부담스럽대…

이 또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 카톡을 본 순간 어떤 함의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뜻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이 정말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난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묘한 공감에 그 친구의 애잔한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책임감 있는 주선자로서 이대로 판을 엎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D에게 연락했다. “모아보자.” 그들이라고 미인 앞에서 작아지는 평범한 남자가 아닐 수 있으랴. 하지만 자신 있었다. 박명수를 제외하면 나를 인생에서 가장 많이 웃긴 친구들이며, 외모로는 나보다도 훨씬 더 연극영화과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바로 그해 겨울 시베리아를 다녀온 오랜 길동무들이었다. 영하 삼십 도를 넘는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왔으니 어떤 시련이건 멋지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었다.

서울 깍쟁이 여자애들과 대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수원 노동계급 대표 로컬 보이들이리라. 물론 그녀들도 우리처럼 수도권 위성도시가 고향이었으며 깍쟁이는커녕 털털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었고, 수원의 남자아이들이 자기들을 그렇게 규정하지도 않았지만, 이 프레임을 머릿속에서 짜 맞춘 나는 어딘가 형언할 수 없이 벅찼다.

 

나는 동네의 친구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서울로 대학을 왔었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고, 얄팍한 신분을 이용한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 학교시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 싫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머리 위에 대학과 학과 이름이 떠다니기를 바랐다. 과 잠바는 날이 더워져서 못 입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좋은 건 그런 무의미한 것뿐이었지만.) 어느덧 고등학교 친구들의 연락을 뒷전으로 하고 대학 동기들과 친해지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성대생들에게는 성대생들만의 공감대가 있었고, 원래의 친구들은 그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서울에 소재한 4년제 사립대학교에 왔다고 내 유년을 다 변명해서는 안 되었다. 그건 정말 못난 짓이다. 나는 집안이나 동네를 대표하는, 마치 시골에서 법대에 합격한 아침 TV 소설 주인공처럼 로컬 히어로(Local Hero)같은 존재이길 바라기도 했지만, 떠다니는 기분 아래 묘한 죄책감 역시 지녔다. 지금 내가 하는 짓거리들은 무엇인가. 이것은 배반이 아닐까. 재수학원의 범생이들을 질투하고 개인사를 부끄러워 하는데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당당하지 못했던, 그리하여 변비처럼 심란한 잡생각에 의존하고 소중한 우상들에게 의지하던 유년에 대한. 무엇보다 성적에 따라 ‘지방’으로 흩어진 사랑하는 길동무들에 대한 배반. (일단은 그런 궁리마저 대단한 오만일지 몰랐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나의 컴플렉스도 유년도 우상도 친구들도 대학보다 훨씬 일찍 만났다는 것이었다.

2016년 봄, 수도권 주변부와 중산층 미만 계급을 대표해 출전하게 된 길동무들은 말 그대로 그러한 내 죄책감을 보상하는 대표선수가 되어 있던 것이다. 깍쟁이 역할을 자기도 모르게 떠맡은 여자 친구들은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나는 어둡게 가라앉은 내 유년과 어두워도 밝아서 파릇한 봄밤 같은 서울의 대학 생활이 서로 잘 지내기를 바랐다.

다행히 일은 일사천리였다. 카톡부터 활발할 줄 알았던 친구들이었다. 여섯은 만날 날짜와 장소를 정했다. 친구들은 그녀들을 만나 진가를 보여주고 활약하고 돌아오면 될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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