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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점심시간의 음악방송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영관으로 가는 길 끝 즈음부터 늘어선 가로등에 스피커가 높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예술대학에서 경영관까지는 급한 내리막이었고 낮에는 응달이었다. 그 탓에 벚꽃이 늦게까지 피어 있었고, 덕분에 예대 신입생들은 봄이 다 가도록 꽃구경을 했다. 개강으로부터 한 달, 그리고 축제까지 한 달. 강의실을 빠져나오면 어디선가 묻어나오는 캠퍼스의 들큼한 공기는 그때만의 것이었다. 오후 수업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남았었고, 점심을 먹으러 혜화역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이따 동향의 로컬보이들을 만날 친구들과 함께.

스피커가 혁오의 <와리가리>를 흘려보내는 가운데 나는 들떠 있었다. 정작 바로 지난주 출전한 과팅에서 비록 어떤 소득도 얻지 못했으나 (두 명의 번호를 받아냈지만, 연락은 나흘도 못 갔으니 냉정하게 보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만은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았다. 여덟 시간 남은 일전을 친구들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 것인지. 길어 가는 봄 햇살과 대학로의 건조하고 달콤한 봄밤을 부드럽게 들이마시는 시기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 마음을 낮추지 마요
저기 다가온다 기대했는데
또 한 편 언젠가는 떠나갈걸
이젠 슬쩍 봐도 알아
And we play comes and goes,
’cause we did this when we were child before,
and we play comes and goes…

재단이 삼성인 주제에 돈이 없나. 왜 맨날 멜론 일 분 미리 듣기인 거야. 학교 음악방송은 항상 전곡을 틀어주는 법이 없었다. 노래는 일 분 남짓 재생된 뒤 페이드아웃 되었다.

“오늘 첫 곡이었습니다. 어릴 때 동네에서 ‘와리가리’ 한 번씩 해 보셨나요? 공격과 수비로 편을 나누고, 공격하는 쪽이 공을 쫓아서 베이스 두 개를 왔다 갔다 하는 놀이였는데요.”

저는 16학번이라 잘 모르겠네요 DJ 형님, 저는 PC방 가서 놀았던 세대라서요. 왜 피곤하게 양쪽을 왔다갔다 할까, 목적이 확실한 게임을 해야지. 골을 넣거나, 공을 멀리 날리거나. 방송부 양반은 목소리가 얇았다. 13학번쯤 되었을 그에게 가질 우월감의 근거라곤 하루씩 꼬박꼬박 소진되던 젊음과 모든 게 확고하다고 믿던 자신감이었다. 복학생이 될 뒷날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이제는 개강 전 유튜브로 술 게임을 예습해 가야 하는 입장이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오혁의 노래. 노래가 끊어지건 말건 마음을 달게 만드는 노래였다. 단 간결하게 짤강거리는 기타와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베이스로만. 애당초 혁오의 노랫말들은 이해가 되다가도 갸우뚱해지고는 했다. 혁오란 밴드는 지나치게 힙하고 무균실처럼 세련되어서 오래 묵은 근성 같은 거부감이 솟기도 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이라면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경영관 앞 한켠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인파가 불어났다. 음악방송의 멘트는 봄볕의 캠퍼스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뒤로 혜화역 1번출구와 성균관대 사거리, 학교 정문에서 사람들을 거둬온 버스가 기우뚱거리며 들어왔다. 앞줄이 아득해 다음 차에 타야 할 듯했다. 움직이는 머리들을 따라 한 발짝씩 딛으며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몸을 구기다시피 해서 앞문으로 내리는 무리 가운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168cm쯤 되는 키, 모범생 안경과 마크 주커버그 같은 곱슬머리. J잖아. 재수학원의 그 J. 드림 시어터를 팝 밴드인 양 멸시하고(이건 분명 잘못된 것이다), 나를 자본론 한 권에 취한 얄팍한 딜레탕트인 양 취급해서(이건 일리가 있다) 대화를 단념하게 만든 그 녀석. 그러나 학원에서 느꼈던 그 짜증은 온데간데없이 반가움만이 떠올랐다.

“J, 진짜 오랜만이다!”

J는 내가 다가옴을 느끼자마자 벙찜으로 입을 벌렸다. 내가 대답을 재촉했다.

“무슨 과 갔어? 학원은 끝까지 다녔어?”

그는 나와 내 옆의 동기들을 몇 번이고 번갈아 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어… 네가 여기 어떻게 왔어?”

아 이 개새끼.

실은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경실색하다시피 얼굴이 하얘진 J의 추론은 합리적이었다. 세 달만에 학원에서 도망간 그 날라리 같은 놈,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어영부영 혼자 공부하다가 고만고만한 학교에 갔겠지. 이런 것 아니었을까. 내놓고 무시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기분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멘트를 날리냐 이 새끼야, 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마침 이해심이 넓어져 있던 날이었다.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다음에 보자.”

어깨를 쳐 주고 헤어진 뒤, 사라져가는 J의 등을 확인했다. 과잠은 아직도 과천외고니. 아니네, ‘인문과학대학’.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날 과 잠바가 아니라 누런 베이지색 코치 자켓을 입고 있었다. 집 근처 번화가에서 샀던 도메스틱이었다. 과 잠바는 드라이 클리닝을 맡겼던가 했을 것인데, J의 파란 신상 과잠을 보자마자 그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 굿
– 너무 좋음 ㅋㅋㅋ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라 쫌, 흐름이 끊기잖아.

아홉 시쯤 보낸 카톡에 로컬보이들은 삼십 분쯤 뒤 차례로 답장을 보내왔다. 이것은 분위기가 좋다는 증거. 연락이 바로 되지 않는 게 긍정적일 때는 이럴 때가 유일할 것이다. 미팅에서 휴대폰을 쳐다보는 빈도가 높다면 그건 반대로 실패의 증거. 역사적인 3:3 과팅이 혜화역 4번출구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느낄 수 있던 말할 수 없는 뿌듯함. 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박지성이나 손흥민이 골을 넣었을 때 드는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손흥민이 토트넘이나 한국 대표팀의 승리에 기여한다는 건 우리 삶에 아무런 연관도 없다. 리그 우승이나 월드컵 16강을 확정짓는 골을 넣는다고 해서, 심지어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다고 해서 강박증 어린 내 기구한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흥민의 70m 원더골에 기뻐하는 것을 단순히 애국심이나 국뽕으로 설명하는 것은 게으른 일이다. 그때 차오를 벅찬 자부심과 솟아나는 아드레날린은 근거가 없는 게 전혀 아니다. 적어도 우리 90년대생 남자들은 그와 함께 적어도 15세에서 25세까지의 대부분을 보내왔다. 그의 성장기를 지켜봐 온 것이다. 처음에는 청소년 대표 경기에서 질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애에서, 2015년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넣고 관중석으로 달려가 “꼭 이길게요!”를 외치던 혈기방장한 청년으로, 이제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선발 출전하는 노련한 월클(월드클래스)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아마 우리 세대 여성이 대부분일 BTS의 팬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다만 넘겨짚어 단정할 수는 없다. 나는 방탄소년단의 초기 모습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른다. 솔직히 지금의 모습도 잘 알지 못하고. 그러니 연말 가요제에서 큰 기획사에 밀려 천대받던 RM이나 지민을 바라보던 소녀들이, 스무 살이 넘은 지금 그들의 웸블리 공연을 목도하는 감정을 영원히 체험해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손흥민에게서 남자애들이 느끼는 감정을 깊이 알 수는 없다. 애국심, 자부심, 자긍심, 자랑스러움, 동경, 저려오는 아릿함, 머리 끝까지 올라왔다 내려가는 테스토스테론, 소년 시절의 로망, 학창시절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었을 때의 기억 따위가 모두 섞여 있는 것 말이다.

마찬가지다. 나는 무난한 동네지만 사연 많은 집구석들에서 자란 오랜 친구들과 유년의 결정적인 삼 년을 함께하다 온 것이다.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은 귀하다. 그들은 내 열일곱에서 열아홉까지의 사실상 전부였는데, 그들이 다름아닌 서울에서 진면목을 펼치는 것을 확인했다면 어찌 자부심을 위시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다. 나의 컴플렉스는 정말로 심각한 것이어서, 이렇게나 그 심정을 비약할 정도다. 친구들아, 내가 쪽팔리니! 하지만 진심이야!

 

어쨌거나 나는 마음을 놓으며 술에 취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수지의 논술학원에 출근해야 했지만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금요일 밤이었고, 그것도 단맛이 도는 봄밤이었고, 로컬보이들에 대한 자긍심에 더더욱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나해진 열한 시쯤, 그 자리에는 없었던 과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과팅하는 애들한테 전화 왔었거든. 얘들이 너무 취한 것 같은데,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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