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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띄엄띄엄 성기다. 워낙 거나하기도 했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깨는 듯 해 술집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오렌지색 조명 밑으로 소주병이 볼링핀처럼 쌓여 있었다. 여자 친구들은 가쁜 숨을 쉬는 나를 보고 천진하게 반가워했다. 그들은 딱 그만큼 취해 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산을 시킨 뒤, 이미 혓바닥이 꼬여가는 그녀들을 하나씩 업고 술집을 나섰다. 남자 동기들 두어 명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만 놀던 자리를 내 손으로 파투내는 사이 로컬보이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그녀들을 그다음 누군가의 가까운 자취방으로 데려갔는지, 아니면 동기들이 있던 술자리로 데려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여자애들을 어서 동기들 품으로 돌려보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우리 학과 신입생들은 연습실에서 하루종일을 지내며 가족처럼 서로를 속속들이 알았고, 매주 금요일 선배들에게 혼나는 것으로 끈끈해진 서른 명 남짓의 집단이었다. 따라서 우리들 사이의 공동체의식은 보통의 관계보다 훨씬 더했다. 그리고 그런 집단 안에 있던 여자 친구들이 낯선 남자들과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잠재적인 위험 상황(부모가 딸 걱정하는 느낌이었는데, 다소 전근대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하여 남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건 조금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녀들을 업고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은 건 과대표나 다른 남자 동기들이 아니라 내 자신이었다. 그 친구들이 가만히 서 있는 내 등판으로 몸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이십 분이 흘렀을까. 정신없이 그녀들을 전부 돌려보내고 나니 땀이 비오듯 했다. 얄포름한 코치자켓을 펄럭이며 있으려니 서늘한 기운이 등골에 엄습하며 정신이 차려졌다. 다시 과팅이 있던 술집을 쫓아갔다.

그 밤, 봄 한복판 낙산과 창경궁에서 스며든 꽃내음과 풀내음이 대명거리의 왁자한 번화가로 섞여들고 있었다. 그 사이를 뛰어갈 때의 자괴감이란. 수원의 남자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일그러져 있던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파악했다.

로컬보이들은 나에게 죄상을 따져묻지 않았다. 잘못을 깨달은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고개를 박고 미안하다, 를 연발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D의 말은 대강 이랬다. “우리하고 동기들 사이에서 곤란했겠다.” 이런 미치도록 아량 넓은 놈들을 다 봤나. 사실 곤란할 틈도 없이 너희들을 엿먹였을 뿐인데.

우리는 소주를 마셨다. 아마 나는 변명을 더 늘어놓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괜찮다며 위로해주는 모양새였을 것이다. (위로받을 자격은 없었지만.) 멋지게 뒤통수를 때린 나를 화끈하게 용서해준 친구들. 로컬보이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미안함, 자괴감, 뜻없이 차오르는 울분(이 또한 내가 느낄 자격은 없었다.) 따위를 안주로 삼으며 참이슬 후레쉬를 들이켰다. 이게 기억나는 이유는, 그들이 아까 과팅에서 처음처럼과 과일소주만 마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 원래 후레쉬만 먹잖아?”
“걔네들이 처음처럼만 먹는다더라고.”
“하, 시발…”

이 또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어느 술집에서 밤을 샜는지도 알 길이 없다. 기력을 다 소진한 친구들은 차례대로 잠들었다. 나는 누가 채워주지도 않는 술잔을 홀로 들이부었다. 어차피 막차가 끊어진 시간이었다. 수원까지 돌아갈 길은 멀었고, 통학할 때도 편도가 두 시간인 길이었다. 처음엔 첫차가 뜰 때까지 마시자, 였다. 하지만 몸을 온전히 가누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수 없는 상태란 것을 깨닫고 택시 야간할증이 풀리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광역버스가 있는 사당역까지 가는 것으로.

술집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새벽 네 시는 이미 훌쩍 지나 있었다. 지벅거리며 대명거리를 가로질러 빌어먹을 혜화역 4번출구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우리 수중에 남은 돈은 단돈 만 원. 사당까지는 아슬아슬한 돈이었지만 일단 동네 가까운 어딘가로 향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몸을 실었다. 대신 조수석에서 일이 분에 한 번 미터기를 확인했다. 삼각지를 지나 용산역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할 때 쯤, 새벽의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And we play comes and goes,
’cause we did this when we were child before,
and we play comes and goes
’cause big boys still play the game all the time…

아까는 들리지 않던 가사가 귀에 박혀왔다. 두 베이스 사이를 오고, 가고. 덩치만 큰 소년은 아직도 오고, 가고. 

그날 밤 내가 둘 가운데서 무엇을 택했는지는 너무 자명한 것이었다. 이날의 미팅을 유년기와 대학생활의 공존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생각했었다면, 그리고 주변부 로컬보이들에게는 로컬 히어로를, 서울의 여자 친구들에게는 주선자의 역할을 자임한 것이었다면 말이다. 나는 방금 오랜 친구들이 아니라 대학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의 편에 선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거칠고 투박하고 미련한 방식이었다. 동네와 대학 사이를 와리가리한 결과는 결국 이쪽.

그녀들이 아무리 취했던들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지는 않다. 로컬보이들이 술버릇이 없는 친구들이란 건 내가 잘 알았고, 더욱이 동기들이 내 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그 근처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순간 조금이라도 있을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한 것 같다.

아니, 좀 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는 대학이라는 곳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면 나는 과대표의 전화에 일단 기다려 보자거나 더 나은 대안을 생각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학이라는 세상에 설 면허가 없는 사람처럼 굴었고, 그 세상이 나를 쫓아낼까봐 전전긍긍했다. 그 결과는 어른세계와 유년세계의 일대 격돌에서 유년의 길동무들을 멋지게 배반한 것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동작대교에 돌입하자 요금은 8천 원이 넘어가기 시작했고, 이수교차로에서 9,800원쯤이 되자 택시를 세웠다. 4월 초의 새벽은 아직 추웠다. 아무말 없이 우리는 빨리 걸었다. 좀처럼 다가오지 않던 사당역. 이수교차로에서 이수역 사이는 버스로 지나갈 때보다 훨씬 멀었고, 이수역에서 사당역까지는 그보다도 더 멀었다.

얇은 코치 자켓과 그 밑 검은 반팔 크루넥으로는 충분하지 않던 날씨, 안이 솜으로 누벼진 두터운 과 잠바를 입었다면 훨씬 따뜻하고 안온했을까.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것은 유년세계에게 지킨 마지막 의리이자 속죄의 표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슴에 ‘S’가, 등판에 ‘SUNGKYUNKWAN’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진 옷을 입고 친구들에게 나타났다면, 그리고 내 친구들이 못된 놈들이라 자몽에이슬 소주병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면, 나는 내 복장 때문에라도 그들에게 진단서를 끊어다 주는 일 없이 조용히 머리를 꿰맸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J가 부럽기도 했다. 차라리 속한 집단에 절개를 지키며 외국어고등학교와 인문과학대학 잠바를 입어주던 그 모습 말이다. 녀석은 살면서 와리가리를 해 본 적이 없겠지, 아마. 왜일까.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렇게 자라오지 않았으니까. 아니면 할 친구가 없었나? 그 또한 일리가 있구만.

나는 정말이지 대학에서 멋지게 성장해 금의환향한 로컬 히어로가 되어 수원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실상은 내 유년을 배신했을 뿐이며, 그 댓가로 성장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하였을 뿐이다. 일생의 배경은 –반경 35km쯤- 넓어졌지만 영토를 넓히지는 못했다. 나는 오래된 근성을 떨쳐낼 수도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자신감 넘치고 유망한 연극학도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날의 참변은 그 복선 같은 일이었다. 사실, 나는 그곳이 두려웠다.

 

사당역에서 버스를 탄 뒤 어떻게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 늦잠을 잤다. 헐레벌떡 일어나 택시를 잡고 수지의 학원으로 향했다. 바로 지난해 나에게 시급을 챙겨주며 도와준 선생님의 아침 10시 수업이었다. 그에게 면도 안한 볼따귀와 알코올빛 낯짝으로 보답하려는 스스로가 아주 징그러웠다. 그 덕에 잠깐 전날의 일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러나 어제의 여자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앞뒤를 파악한 그녀들은, 본인들의 잘못은 조금도 없었지만, 동기들을 대표해 미안함을 표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택시 안에서만큼은 오히려 내 미안함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킬 그 전화들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내 휴대폰에서 진동이 열 번도 넘게 울려오자 택시기사가 오디오 볼륨을 높이고 음악을 틀었다. 나는 기사님이 동그란 버튼을 돌리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는 젊었고, 혁오의 노래를 틀 개연성이 있어보였다. 제발 <벚꽃엔딩>이나 틀어주기를 바랐다. 또다시 어젯밤의 기분으로 돌아간다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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