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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나는 전공 입시를 <시련>으로 준비했다. 마녀사냥에서 아내를 변호하다 애비게일이란 악녀 때문에 악마로 몰려 희생당하는 농부 프록터의 이야기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데, 연기를 전공한 동기들이 애비게일과 프록터의 대사를 연습했다면 나는 어떤 메시지를 세상에 제시하는 연출가가 될 것인지를 <시련>을 통해 면접에서 보여주려던 것이다.

그때 공부한 내용을 되짚어 작가 아서 밀러의 희곡론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비극의 뿌리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나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은 비극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 앞에 놓인 것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싸워 볼 만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짓 진술을 하는 애비게일이나 권위적인 재판관 댄포스는 그리스 비극의 신 같은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종당에는 자존심이냐 목숨이냐 하는 두 갈래 길에 놓인다. 프록터는 악마와 결탁했다고 거짓 자백하는 대신 죽음을 택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백을 하고 자백서에 서명까지 하지만 그 자백서를 교회 대문에 붙여놓을 것이라는 재판장의 말에는 길길이 날뛰며 찢어버린다. 어떤 고통에도 자신의 이름을 절대 더럽히지 않겠다며.

물론, 여기서 프록터보다 훨씬 가련한 인물은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다. 프록터가 애비게일과 간통하지 않았다면 이 난리통에 엮여들 일이 없었을 테니까. 애비게일이 실제와는 달리 악녀로만 나오는 것도 문제고. (그래서 이 작품을 페미니즘을 통해 분석하면 아주 신랄하게 비판 당하고, 그럴 만하다. 다만 덕분에 역사에 남을 캐릭터가 만들어지긴 했다. 애비게일의 대사를 연기하지 않고 대학에 오는 여자 입시생들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결말이 맘에 들었다. 프록터가 생존의 욕망을 떨쳐내고 끝내 택한 것은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명동예술극장에서 <시련>을 공연하고 있었고, 정확히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자 극장을 찾았다. (입시를 준비하는 한 달 동안 연극 대여섯 편을 봤는데, 대학에 입학한 이후 극장에 간 횟수와 비슷하다.) 이순재 선생이 댄포스 판사로 나오는 공연이었는데, 사실상 대발이 아빠와 다를 바 없는 그 꼰대스러움에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하다가도 격정적인 프록터의 캐릭터에 이입해서 손톱을 물어뜯다 돌아온 나는 프록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인상 깊게 읽은 희곡이 있느냐?”란 예상질문에 <시련>을 대답한 뒤 쏟아낼 부연으로 준비한 것은 ‘매카시즘 선풍이란 극작 당시의 배경과 세일럼 마녀사냥 사이의 우화적 연관성’ 따위였다. 작품이 주는 사회적 의미를 깊게 생각해 봤다,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앞으로 나도 어떤 화두를 던지는 작품을 쓰고 연출하고 싶다, 이런 기조였던 것 같다. 그것은 멋있는 대답이었던 것 같지만, 고등학교 때 가진 장래희망 ‘기자’와 ‘사회학자’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조리 있는 대사를 만들어 인터뷰를 준비했지만 나는 시련이란 이름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었다. 스물하나에 접어들 때까지 인생에서 겪은 뚜렷한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가정사-정확히 얘기하면 이것도 민망하고 지난한 혈통사(史) 와 해를 거듭할수록 팍팍해지던 경제사로 나눠서 볼 수 있다-는 부모님이 겪은 비극이어서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어딘가 동년배들과 달라서 부드럽게 융화되지 못했던 유년은 다른 피난처를 홀로 찾아드는 것으로 회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대학에서도 그럭저럭 힘겨운 일을 피하는 것으로 임기응변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찾아본 시련의 뜻이 ‘겪기 어려운 단련이나 고비’, ‘의지나 사람됨을 시험하여 봄’인 것을 그해 겪은 일들에 비추어 보면 이 사전적 정의는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시련이란 그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똑같은 몫의 시련이 주어졌다. 누군가는 시련을 견뎌냈고 누군가는 그저 순응했으나 누군가는 불평했고 누군가는 나가떨어졌다. 시련은 테스트와 같았다. 서른 명으로 된 한 집단에서 다 같이 얻은 시련은 마치 발가벗겨지는 것과 같아서, 서로의 악함과 선함, 인내심의 무게, 시야, 사고방식 같은 것들을 모조리 내보이도록 만들었다.

*

나는 아르코예술극장의 붉은 벽돌을 쌓는 데 조금도 이바지한 바가 없다. 거기서 연극을 본 일은 2학년 때 교수님 할인으로 본 한 편이 전부이기 때문이고, 다른 곳도 비슷하다. 학교 중앙도서관과 예술대학 건물의 대리석이나 천장 석고보드를 쌓는데도 기여하지 못했다. 입학금 말고는 등록금을 지불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소득 1분위이기 때문에 등록금의 반액은 국가장학금으로, 나머지 반액은 학교의 가계곤란 장학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학하기 전 다섯 학기 동안 이에 감격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누가 이재용을 구속할 수 있단 말인가? 벽돌 한 장짜리 지분도 없이 대학로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의 연극영화과 학생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고분고분히 대학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혜화역의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느껴진 것은 자기성찰보다는 야릇한 자부심이었다.

연습실에 들어선 첫날, 우리는 점심을 먹을 때까지 관등성명과 인사하는 법을 연습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학과의 살벌한 분위기에 적응해야 했다. 촬영장 스태프 일이나 연극 무대 작업에 성실하지 않으면 줄지어 혼이 나고, 선배들의 얼굴을 아직 잘 모를 때 캠퍼스를 지나가며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 혼이 나는 일들이었다. 별의별 일로 다 혼났다. 아침 일곱 시 스터디에 늦는 것, 전날 보고를 하지 않고 지각한 것, 여자 동기들이 귀걸이를 차거나 양말을 신고 연습실에 들어온 것 따위였다. 매주 금요일마다 일주일간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두고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우리가 쓰는 1층에서 기합을 받고 계단을 오르다 보면, 또 2층과 3층의 같은 학번 무용과 친구들이 비슷하게 어기적어기적 계단을 내려오고는 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예술대학의 풍경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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