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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사건은 축제를 즈음해서 일어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신입생의 첫 축제. 그때의 기억은 대개 밝은 낮이 아니라 저녁에 머물러 있다. 학과 기말 공연이 임박한 시기였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 학과 주점과 극장을 오갔다. 낮이면 더웠지만 밤이 될수록 쌀쌀했다. 솜이 누벼진 과 잠바가 일찍이 없어졌었기에 (야외촬영 과제를 나가 잠깐 벗어둔 사이 잃어버렸었다.) 그보다 얇고 긴 예술대학 단체 점퍼를 걸치고 다녔다. 입어놓으면 축 늘어지는 옷이었다. 7만 원이란 가격치고 박음질이 너무 잘 풀어져 낭창거렸고 원단도 고급은 아닌 듯 했다. 다만 촬영 스태프를 나갈 때나 무대 작업복으로 대강 입고 다니기엔 적당했고, 그런 문제에 소모할 여력이 없기도 했다.

어두워질수록 무르익는 혈기는 먼빛에도 뜨거웠다. 무대에서부터 묵직한 베이스가 멀리까지 쿵쿵 울리고 네온 톤의 조명이 높이 뻗었다. 경영관을 뒤로 잔디밭에 설치된 무대 양편 가장자리에 대형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직육면체 꼴 스피커 여럿을 세로로 길게 매단 것이라 옆에서 보면 J자 모양 비슷하게 보였었다. 그 밑에 서너 구(口)짜리 LED 파 라이트 조명 여러 쌍이 여기저기로 쏘아졌다. 하늘은 이미 거멓게 되었었다. 하지만 사납게 뻗은 불빛 근처는 보랏빛으로 보였다. 무대를 중심으로 파란 차양막 밑 왁자한 주점들이 캠퍼스 곳곳에 늘어서 있었다.

축제 한가운데인 경영관 오른편에는 노천극장이 있다. 경영관 옆을 한눈에 보면 깎아지른 듯한 경사와 옹벽, 그리고 정문으로 내려가는 차도뿐이다. 하지만 자세히 톺아 나가면 그 사이 야트막한 언덕을 뒤로 작은 노천극장이 물러앉아 있다. 햇빛이 그대로 내리는 잔디밭과 달리 은근한 응달인데다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오래 있으면 조금 춥고, 다홍색 벽돌도 많이 바랬지만 그 나름대로 멋진 야외 극장이다. 거기서 공연 같은 걸 하는 일은 없어서 그저 경영관에서 예술대학으로 올라가는 계단 노릇만 한다는 게 실상에 가깝기는 하지만.

경영관 지하 출구에서 여기로 돌아오면 예술대학 1층으로 갈 수 있다. 그곳을 처음 본 건 개강도 하기 전이었다. 아침 7시 반까지 가야 하는, 그리고 매일 그렇게 가야 했던 신입생 캠프에 출석하려던 아침이었다. (말하자면 신병교육대 같은 프로그램이다. 단과대 OT까지 2주 동안 우리는 인사 예절과 학과 시스템을 배우고 OT에 올릴 25분짜리 공연 연습을 했다.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안다.) 정문서부터 거듭된 오르막때문이었겠지만 가슴이 턱없이 뛰던 기억이 난다. 무대 뒤쪽 반원형 담벼락에 담쟁이가 올라온 숨겨진 극장으로부터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무대가 어디라도 좋다는, 설비가 갖춰진 그럴듯한 극장이 아니라도 좋다는 열정적 연극학도들이 내뿜는 거친 숨결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심상이었다. 막연히 동경하던 ‘진짜 대학’의 모습과 예술대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이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물론 그 노천극장을 이용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없었다. 오가는 사람이 적었기에 가끔 조용히 숨어서 낮술을 하기엔 좋았지만. 우리의 주무대는 노천극장이 아니라 연습실이었다. 방학 공연 때 쓰는 경영관 원형극장, 학기 말 졸업 공연 때 빌리는 경영관 소극장도 가끔 있었다.

학과 주점과 무대 설치 작업에 번갈아 투입되던 축제 동안도 우리는 노천극장을 지나다니기만 했다. 기말 공연은 경영관 지하 3층 소극장에서 열리기로 돼 있었고, 예술대학 주점은 예대 건물 밑 농구장에 있었다.

나는 잘하는 게 별로 없었다. 앙상블로 공연에 참여하기에는 몸을 너무 못 썼다. 무대를 주도해 설치할 셋업 크루에 들기에는 톱질이나 망치질을 해 본 역사가 없었다. 하여 축제 내내, 수업이 끝나고 하지도 못하는 망치질로 못을 좀 박거나 서툰 페인트칠로 작업복에 물감을 묻혀 생색을 낸 뒤 무대 바닥으로 쓰일 덧마루 몇 개를 나르고 밤에 주점으로 가고는 했던 게다.

얼마 쓰지도 못한 목장갑을 ‘예대 잠바’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극장을 빠져나와 노천극장 가운데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땀이 났다. 축제 중에 반원형 벽돌계단 사이를 채우는 군상은 대강, 밤하늘이 거뭇해질수록 주점을 벗어나 수선 없이 술을 마시는 학우들, 취해 널브러질 데를 찾아온 학우들, 열 시도 못 넘기고 나자빠진 너무한 술꾼들 따위였다. 실은 이미 과거 완료된 인상이다. 그로부터 다음다음 해부터인가 캠퍼스에서 술을 파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단과대학에서 사천오백 원씩 소주를 독점 판매하는 작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공연을 일주일쯤 남겼을 때였다. 주점을 마감한 다음 날인가 별안간 ‘집합’이 떨어졌다. 학교에 있는 모든 인원이 연습실에 모이라는 것이었다. 수업을 다 듣고 무대 작업이 예정된 시간까지 학생회관의 휴게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연습실 옆 탈의실엔 언제 선배들이 들어올지 몰라 불편했기 때문이다. 여섯 시까지 연습실로 집합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노천극장을 뛰어 올라갔다. 이미 몇 달 전의 첫 감흥은 사라졌을 때였다.

이번 연극의 주연들은 일고여덟 학번쯤 높은 고학번들이었다. 모두가 모였을 때 들어와 허리에 손을 얹고 나직이 기합을 준 것도 그들이었다. 정확히 지시한 건 그들 중 최고학번 선배였다. 그들로부터 밑 후배들이 모두 얼차려를 받았다. 여느 기합처럼 ‘앉았다 일어났다’를 했다. 한 400번쯤 되었을까? 주연들이 나가고 다음으로 높은 선배들이 남았다. 다행히 그들은 아무 벌도 추가하지 않고 연습실도 나갔다. 그다음 선배들도, 맞기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우리가 공연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차려 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때 선배들은 “셋업(무대설치)에 한 번도 안 나온 사람 손 들어.”라고 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능력이 좀 모자랐기에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배우들과 메인 스태프를 빼면 나도 다른 이들과 비슷한 시간을 들이부은 것은 사실이었다.)

공연이 바짝 다가오면 한 번은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다고 했다. ‘분위기를 잡으라는’ 지시는, 연출을 맡은 교수님의 몫이었다. 그 한마디가 오륙십 몇 젊은이들이 줄지어 스크럼을 짜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광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고학번 선배무리가 나가고 나서 맨 아래 학번의 우리를 더 나무라는 선배들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좋고 나쁨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그쯤 와서는 나도 (그리고 듣는 동기들도) 선배들을 욕하는 데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갈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동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착하기만 한 여자애라 거의 모든 일에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친구였다. 그녀와 친한 동기 말로는 입원을 했다고 했다.

“왜?”

“그때 줄집합 한 거 때문에. 다음날 걷지를 못했대. 근육에 문제가 생겼나 봐.”

그랬다. 이런 일에 좋고 나쁨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이 모든 걸 바꾸지 않을 거라면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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