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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처음에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삼 개월동안 많은 것에 지쳐가던 나는 여기에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 나의 세계에서 유난하던 것은 학교생활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부모님 사이의 관계는 거의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과수원에서 계시다 한 달에 한 번 올라오는 아버지와 집에 상주하는 엄마는 조금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 사이의 유일한 임시공동연락사무소 같았던 나는 말하기 어려운 피로를 느꼈다. 두 분 사이가 데면데면한 것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명절에도 친가와 외가를 혼자 오가는 것이 벌써 몇 년 되었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 되자 현실적인 문제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그때 내 온몸을 지배하던 기저질환은 통학의 피곤이었다.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4시간씩을 오갔다. 그러잖아도 잠이 많은 성질에 과중한 학과 일정이었다. 아르바이트할 시간도 없이 새벽부터 한밤까지를 모조리 소진하는 일과에 기진해 항상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다녔다. 부모님에게도 그랬었는데,

“그러니까 여러모로 힘든 데로 학교를 가서 그래. 가까운 데로 가라니까.”
“네 엄마도 영주에 안 내려오면 혼자 힘들텐데, 서울로 이사를 가야지. 방을 좀 구해봐라.”

자취가 힘들다는 뻔한 집안 사정 속에 두 분이 내놓는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엄마의 안타까움 어린 타박도 달갑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해결책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엄마는 서울로 이사를 할 수 없었다. 떠나온 지 벌써 십 년이 넘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말 그대로 ‘일’이었을 뿐이다. 아버지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미 일흔을 넘긴 아버지가 제시하는 아주 서투른 화해, 또는 여생을 정리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영주로 갈 마음도, 아버지와 다시 뭔가를 할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나를 만날 때마다 엄마와는 대면하지 않고 나를 통해서만 당신의 말을 전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듣는 서로의 입장은 전혀 합의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쯤되면 괜히 응석을 부린 꼴이 된 것이다. 피곤을 호소했더니 더 큰 피로가 몰려오는 꼬라지였다. 집의 오랜 갈등에 비하면 통학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내가 감당하면 되는 거라면 그냥 그렇게 하기로 하고 입을 다무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가 학교에서 하루종일을 보내거나 스태프 일로 밤을 샐 때 아버지는 나에게 집 구하는 일의 진척을 물어보고는 했다. 집을 보러 다닐 시간이 있을리 없던 나는 얼버무렸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일처리가 지지부진하다며 화를 내셨다. 하지만 도리어 화가 나는 건 나였다. 이유도 퍽 정당했다. 하지만 그러면 아버지는 (엄마에게 화를 냈다면 엄마도)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내게 미안해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더 싫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 선배들에게 용감하게 대거리 한 번 내 본 적이 없었다. 만만한 부모님에게만 화풀이한다는 느낌으로 괴롭고 싶지 않았다.

또 한몫을 한 건 비어있는 주머니였다.  나는 안정적인 아르바이트를 구할 여건이 안 됐다. 정말 가끔 있던 과외와 주말 아침에 있던 학원 조교 자리가  유일한 일자리였다. 거기서 가져오는 돈은 생활비 실질의 절반이나 될까말까였다. 그래서 휴대폰 요금이나 교통카드 대금을 제때 내는 법이 없었다. 요금이 이체되는 날 하루 전에 계좌에서 돈을 빼두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월급의 절반이 한 날에 날아가곤 했다. 그때 생각하기론, 그 시절만 좀 견디면 상황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까지 그러지 않은 달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등록금은 면제였지만, 인생 수업료는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이러는 사이 우리는 동기들과 그 사건에 대해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예전처럼 공강 시간의 학교 앞 카페나 늦은 밤 혜화역에서 술로 모이지 않았다. 너무 바빴다. 공연 제작 지원과 촬영 스태프는 물론 수업, 학기말 발표회 준비가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듣는 수업이랄 게 비슷했고 촬영 현장에 나가도 동기들 투성이였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는 시간은 그전보다 더 많다면 많았다. 하지만 모두 그전처럼 무람없이 재잘댈 의욕이 없었다. 그리고 분명히,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 없는 동기들과, 감히 그 사건을 “어떡해”나 “안타깝다” 이상으로는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가 반갑기도 했다. 이것은 처음엔 분노스러운 일이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운 일이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지하철과 버스에 일단 타기만 한다면, 그 안에서라면 부족한 잠에 빠져들거나 휴대폰을 탐닉하며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걸을 때라면 그렇지 못했다. 예술대학에서 정문까지 내려가는 기나긴 내리막길과 학교 앞에서 혜화역으로 돌아가는 대학로, 동대문역이나 서울역의 붐비는 환승통로, 사당역 광역버스 정류장의 인파 속에서라면 그럴 수 없었다. 무의식중의 배덕감과 죄책감이 틈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이 지시해서 선배가 준 기합 때문에 동기가 다쳤다.

그것도 열흘씩이나 입원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었다. 모두 그랬겠지만, 사실 확신할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 사건은 내 머릿속을 줄곧 맴돌게 되었다. 답은 확실했고,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시간은 며칠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나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교수님이 입원한 친구의 부모에게 ‘사고’ 보험처리를 제안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와중에 최고학번 선배와 같이 기합을 주었던 10학번 선배가 그 7만 원짜리 ‘폐급’ 예대 잠바를 납품한 업체의 대표라는 소문도 들려왔다. 부디 풍문이기만 했다면 좋았을 징그러운 얘기들이었다. 그러나 사실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결국 나를 포함한 두셋의 강력한 주장으로 우리가 오랜만에 한데 모였다. 연습실에 서른 명이 동그랗게 모였다. 아니, 스물아홉 명이었다. 모두 모이기가 무섭게 내가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지금 OO이가 다쳤고, 몸도 마음도 금전적으로도 피해를 봤잖아. 분명히 피해자야. 그리고 가해자도 분명해. XX선배가 줬다지만 지시한 건 교수님이잖아. 뭐가 더 필요해?”

이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건 악습이고 폐단이야.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우리 이렇게 안 해도 연기하고 연출할 수 있어. 이런 문화는 모두 없애야 해. 하지만 안에서는 바꿀 수 없어. 우리가 다 같이 호소하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항상 에브리타임1에서 우리 과 욕 먹잖아. 크게 인사하고 쓸데없이 군기 잡는다고. 밖으로 이 사건을 꺼내서 우리가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해. 이제 인간의 얼굴을 한 예술을 해야 한다고.”

여기서부터는 누구라도 반박하기 싫어지는 말이었다.

나는 버릇대로 작지만 분명한 얘기를 하다가 별안간 거대하고 흐릿한 얘기를 했다. 피해 입은 여학생에서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이 나라의 뿌리 깊은 군사문화를 꺼내든 것이다. 이런 큰 주제를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 앞에서 대놓고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이제 뾰족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필요로 했다.

“그러니 고발을 하자. 고소는 당사자가 하니까 부담일 거야. 고발장은 제삼자가 제출할 수 있거든. 내가 고발인이 될게.”

이쯤까지 이야기하자 열 명쯤은 아연했고, 열 명쯤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고, 예닐곱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두에게서 당황 반 미지근함 반이 뒤엉킨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다소 성급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나 동기들의 절반쯤은 예고나 작은 극단을 거쳐와 이런 문화에 익숙하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동기들에게 내놓은 해결책은 내 자신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처럼 운 좋게, 또는 우연히 이 학교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일 년, 길면 몇 년 동안 기약 없는 입시를 준비하며 백 대 일에 준하는 실기 경쟁률을 뚫고 나서 어렵사리 들어온 학과였다. 어딜 가나 거의 영(0)에 수렴하는 것이 연극영화과의 추가합격률이다. 이 일이 아니고라도, 그러지않아도 석연찮은 점이 적이 있었던 교수님을 이야기할 때 항상 “그래도 우리를 뽑아주신 분인데…”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쁘게 해석하면 주휴수당을 못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사장님도 힘드실 텐데”라고 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이었고, 좋게 말하자면 이 길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친구들 특유의 간절함이 낳은 소산이었다.

나도 그것을 알았으나, 그때의 나는 그게 ‘안타깝지만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던 건 진심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동의를 구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꼭 나오게 되던 어렵고 현학적인 말과 막연하고 큰 논리. 그것은 내가 예술에 대한 진정성으로 가득찼지만 단지 ‘을’의 입장에서 ‘병’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도덕적 결함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우월감을 확보할 수 있는 하나의 편안한 방편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얼굴색이 하얘졌던 이들이 나에게 내놓은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당사자 의사도 모르면서 함부로 고발을 하는 건 위험하다. 일단 그쪽 입장부터 들어보자.” 

나는 답답했지만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내 하나둘씩 아르바이트와 공연 연습 따위로 흩어졌다. 다음을 기약한 채 어렵사리 모인 우리끼리의 회의는 일단락되었다. 

회의가 그렇게 끝나고 나자 다시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움직일 방법을 찾았다.

 

1 학교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모바일 플랫폼. 2000년대 초반부터 유행하던 대학 고유의 커뮤니티는 이 플랫폼으로 거의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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