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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쯤 뒤 다시 모이기로 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두 번째 회의’를 준비하러 부산히 움직였다. 나는 어떤 마음에 휩싸여 그랬을까. 용기를 얻고 싶었던 것 같다. 인권변호를 하는 사촌누나로부터 민변에서 일하는 변호사의 전화번호를 얻었다. 뉴캐슬 팬 사이트를 통해 알고 지내던 형에게서 H일보 기자를 만나볼 수도 있었다. 그밖에 학교 바깥의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소연과 넋두리를 쏟아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깥의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당연히 하나같았다. 그리고 그 시기 SNS에서는 다른 학교의 무용과, 체육학과, 간호학과, 항공운항과 같은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는 폭로가 잇따랐다. 남은 것은 우리뿐이었고, 내가 그 중심에 서 있는 방아쇠인 것만 같았다. 그때 내가 확신에 가깝게 믿고 있던 것은 절대선 같았던 도덕이란 잣대였다.

또 하나는 분노와 거기서 나온 승부욕이었다. 나는 논쟁에서 이기고 싶었다. 고발을 하자는 결론이야 뜻밖이었겠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같았던 나의 발언이었다. 거기 곧바로 동의해준 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때는 이미 교수님과 선배들이 아니라 보수적 입장의 동기들로도 분노가 향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은근히 지니고 있던 선민의식을 굳게 해 주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믿음의 눈빛을 보내던 몇몇만이 여기서 객관적으로 사고할 줄 알고 이성적이며 ‘깨어 있는’ 사람이구나. 그러면서부터 나는 더욱 흐릿한 말을 머릿속에 훨씬 많이 채워 넣게 되었다. 막연하고 현학적이고 어렵고, 이성적인 듯 사실은 내 화와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종국에는 거부감을 돋우거나 이해하기 힘든 말들. 그것은 그들과 다르다는 지적 허영의 산물이었다.

 

거칠게 얘기해서 1차 회의의 결론은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자’였다. 당사자의 의사를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하여 회의가 있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연락한 이는 피해입은 친구의 모친이었다.

우리 동기들의 어머니들로 이루어진 단체 카톡방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생 학부형 단톡방이란 존재 자체가 조금 말이 안 되는 것이다. 2월 말쯤엔가 초대된 엄마가 말해줘서 알게 되었는데, 나는 그냥 웃고 말았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어머니회 같은 일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괜히 전교 회장을 했었다가 대책 없이 손이 큰 엄마가 큰 돈을 들여 운동회 간식 따위를 준비하는 걸 보고 낭패감을 겪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 뒤로는 내가 학교 대표나 임원을 하는 일이 없었고, 엄마가 중고등학교 시절 입시설명회 같은 데를 가볼까 하는 것도 내가 말렸었다.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엄마의 말로는 회비를 걷자고 한다던, 고등학교 때도 없었던 단톡방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마시라고만 일러드렸었다.

피해자 어머니의 번호는 거기서만 찾을 수 있었다. 엄마의 휴대폰을 빌어 보니 이미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아서 [300+]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읽지 않았던 한 달 전쯤부터 톡방을 내려다봤다. 그들은 물론 우리가 받는 얼차려 따위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화가 나지만 아이들도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할 입장이니 어찌할 바를 몰라 답답하다는 얘기가 일반을 이루고 있었다.

어머니들의 의견이 갈리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이것을 문제 삼아 항의하자는 이들이 있었다. 실제로 학과 사무실이나 학생처에 전화를 했던 일도 있는 것 같았다. 신입생 캠프의 어느 날, 갑자기 우릴 모아놓은 교수님이 “선배들이 너희를 체벌하거나 폭행했니?”라고 물었던 일의 전말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때 우린 “아닙니다.” 라고 했었다. 선배들이 ‘기마자세’나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켰지 때린 적은 없었고, 그네들이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네.” 또는 “때린 건 아니지만…” 이라고 발화할만큼 담대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교수님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는 건 뻔했다. 그러자니 교수님이 말했다. “세 번 물어볼게.” 그는 “있었니?”라고 거듭 물을 때마다 소파 팔걸이를 쳤다. 우리는 세 번 부정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베드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자식들 얼굴에 침 뱉기일 수 있다.” “선배들 몇몇이 벌인 일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것도 부모로서 못할 일이다.” 라던 엄마들도 있었다.

그쯤 카톡방을 보니 허탈감이 찾아들었다. 동기들과 그 부모님들이 이 사건을 대하는 경향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톡의 시점이 사건 이후로 와도 비슷했다.

양쪽에서 목소리가 큰 것은 각각 서너 명쯤이었다. 입원한 그녀의 병실을 벌써 일주일 넘게 오가고 있다는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여러 차례, 오랫동안, 때로는 밤늦도록 그녀와 전화했다. 나름대로 계획을 설명했다. 민변의 S변호사에게 얘기해놓았으니 통화를 해 보시고, H신문의 J기자도 만나보니 우리 얘기를 가감 없이 써 준다고 한다. 내가 직접 고발인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 주저하던 그녀는 내 설득에 마음을 돌려 마침내는 고발을 부탁한다고까지 얘기해 주었다.

통화를 거듭할수록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들을 듣게 되었다. 여기에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을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살 것이라고 짐작했던(예체능을 오랫동안 배우는 것은 오늘날 어지간한 중산층이 아니고서는 어렵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서 놀랐던 것 가운데 하나는, 많은 친구들이 아르바이트를 거의 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집의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 배려 없는 말 잔치가 오가는 단톡방과 입원한 그녀의 딸을 겹쳐보며 서글퍼했다는 담담한 어투, 그러나 때로는 격해지고 코를 시큰거리던 그녀의 목소리… 쉽게 대면하기 어려운 사실들이자 함부로 직면하기 괴로운 진짜 감정들이었다. 이것은 만들어진 세상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점점 이 사건을 외면하고 싶어졌다.

 

스물아홉 명이 다시 모인 자리는 내가 먼저 말하고 다른 동기들의 의견을 묻는 꼴이 되었다. 그동안 기자와 변호사를 만나고 어머니와 통화해서 고발 승낙을 받아냈다는 것을 전했다. 그녀와의 통화를 녹음한 것을 들려주기까지 했다. 그토록 중요하다면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누구도 구하지 않던 ‘당사자의 의사’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확고한 동력이 될 것 같았던 음성은 오히려 언쟁만 키웠다. 사실상 최초이자 최후의 말다툼이었다. 이때껏 ‘고발 찬성파’와 ‘반대파’는 이 문제에 대하여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네가 어머니를 설득한 것 같은데, 이러면 의미가 없지.”

“용규 오빠가 설득을 한 것도 맞아. 하지만 고발 이후에 있을 일들에 대한 어머님의 걱정을 덜어드리려고 한 거 아니야?”

“어쨌든 이 사건을 빌미로 일을 키우고 모든 걸 뒤집으려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중요한 건 OO이 일이지 그게 아니잖아?”

“이게 다 뭐 때문에 일어난 건데? 우리가 겪은 게 다 OO이 일이야.”

“기합을 받고, 선배들 사이의 문화가 좀 빡빡한 것들이 문제는 문제지만, 결국 키워봤자 우리 얼굴에 침 뱉기야. 그리고 누구를 고발할 건데? 교수님이야, 아니면 XX 선배야? 교수님은 그래도 우리를 뽑아주신 분이고, XX 선배는 교수님한테 지시받아서 (얼차려 지시를) 한 것뿐인데.”

“그럼 정말 사고로 보험처리 하고, 이렇게 유야무야 덮어? OO이는 그냥 입 다물고 살아? 내년에는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아? 모르는 거야. 지금은 우리가 피해자 입장이지만 선배가 되면 가해자 입장이 될지도 몰라, 이대로라면. 지금 문화를 완전히 바꿔 놔야 피해자 아니면 가해자가 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래, 고발해서 어떻게 누가 처벌을 받게 됐다 쳐. 그럼 OO이는 어떻게 학교 다녀?”

“우리랑 다니면 되지, 어떻게 다닌다는 게 무슨 말이야? 우리 동기 아니야? 도대체 왜 그런 생각부터 하는 거야.”

이같은 대화가 이삼십 분 오갔다. 당연히 우리는 서로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어쩌면 이미 설득에는 관심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고발 찬성파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은 내가 거의 유일했는데, 설득을 통해 나를 이겨먹은 사람은 없었다. 반대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사실 탓에 오랫동안 심리적 위안과 도덕적 우위를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들이 나를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단념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답답해 견디기 힘들어진다.)

결국 고발 여부에 대해 익명으로 투표를 했다. 기억이 맞는다면 ‘반대’ 12명, ‘모르겠다’ 7명, ‘찬성’ 10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열 명씩이나 찬성을 했다는 것이 감동이다. 그러나 나는 건방지게도 결과에 대단히 실망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미 온몸에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마주하기 싫은 사실들, 봉합되지 않는 논쟁들… 그러나 열 명이란 숫자는 아주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날 이를 악물고, 누구와도 더 대화하지 않은 채, 학교에서 혜화역까지 내려오던 길이 선연하다.

 

그다음 날,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교수님들의 주재로 학과 긴급총회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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