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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시련]의 마지막 업데이트입니다.

 

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우선 총회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그리고 그 친구 어머니와의 가교는 내가 유일했다. 그녀에게 분위기와 결과를 전해줄 필요가 있었다. 녹음을 하기로 했다. 나는 내 설득으로 그녀의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냐는 말을 대단히 의식하고 있었다. 가감 없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를 베드로로 만든 교수님들이 총회에서 정말로 사과를 할지도 미심쩍었고.

그랬다. ‘우리가 직접 공식적 사과를 듣는 자리다.’ 이것이 학과 사무실에서 전송한 문자메시지에 대한 풍문이었다. 피해자 측에다 미안하다는 입에 발린 소리 한 번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내가 고발을 운운하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대신 그쪽에다 던져진 제안이 ‘사고처리’, ‘보험처리’ 따위이던 것이다. 이것만 해도 기가 차는 것이다. 책임을 지려는 사람도 없고, 안타깝게 생각한대도 어차피 남의 일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조금도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분명한 표지였다. ‘우리 얼굴에 침 뱉기’를 운운하던 친구들도 그 사실만은 회피했다. 좋고 나쁨을 따지기에는 이미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나는 걱정 반이었다. 어딜 가나 반대편이 완고해야 강경론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교수님이 사과한다니 일단 지켜보자,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나와 대립각을 세우던 동기들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심 지금이라도 사태가 연착륙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나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었다. 이건 잊을 수 있다면 아주 빨리 잊고 싶은 일이었다.

 

7층 강의실에 교수님 두 분이 들어왔다. 교탁 바로 앞으로 최고학번 선배, 그리고 그다음 학번 선배가 앉아 있었다. 각각 기합을 줘서 고발의 당사자로 지목되는 이, 예술대학 점퍼를 납품했다는 게 폭로된 이였다. 일학년들은 맨 뒤에, 선배들은 대개 앞쪽에 있었다. 우리가 예정된 시간보다 이십 분은 일찍 왔는데도 선배들이 그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전공 수업 때는 신입생들이 앞자리를 채우는 것이 예절이었다.

교수님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대강만 되살릴 수 있는, 굳은 표정으로 들어온 두 분 중 한 분의 얘기는 이랬다.

“신입생들에게 아주 실망했다. 너희들은 어른답지 못하다. 대학생이 되었으면 스스로 일을 해결해야지, 왜 부모님 등에 업혀 뒤에서 이런 작당을 하는 것이냐. 선배들이 기강을 잡았다면 그걸 좋게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 나는 모든 일에 싫증이 난다. 수업을 맡고 싶지도 않다.”

뜻밖에도 ‘혼이 난’ 우리가 공황 상태에 빠진 사이 그는 나가버렸다. 그다음은 우리를 베드로로 만들었던 교수님이었다.

“기합, 이제 하지 말자. 좋은 것도 아니잖아….”

서너 마디도 않은 그도 나갔다. ‘총회’랄 것의 십 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최고 선배가 일어섰다. 그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 선배는 고학번들 가운데 사람이 좋은 축에 속했다. 그를 마음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우리가 고발을 주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블랙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끝까지 손을 앞으로 모은 그가 자리로 들기 무섭게 11학번 선배가 나섰다. 조교였다. 평소에 우리에게 ‘기마자세’를 가장 많이 시킨 과 학생회장이 그의 절친이었다. 물론 그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1학번의 말은 오히려 교수님과 비슷했다.

“학부모들이 고발을 운운하고 학교로 전화를 걸어오는 바람에 내 친구가 고통스러워한다. 문제가 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얘기해라. 비겁하게 뒤에서 그러지 말고.”

참 똑같은 레퍼토리들이었다. 좋게 해결하자, 앞에서 얘기하자… 그 덕에 동기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몇 명이 불려 나와 신입생들 사이의 고충을 말했다. 그러나 그래서 그걸 부모님들에게 일러바쳤느냐, 앞으로 어쩌자는 것이냐, 따위의 볼멘소리에 묻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일학년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그 11학번의 이 언급이었다.

“지금 학과 통폐합 얘기 나오는 거 몰라? 국문과나 영상학과, 그래픽디자인과하고 통합한다는 소문이 돈 게 얼마 안 돼. 안 그래도 불안한 시국에 이렇게 우리 얼굴에 침 뱉으면 어떻게 되겠어? 너희 무슨 듣고 싶지도 않은 애니메이션 수업 같은 거 들으면 좋아?”

‘프라임 사업’ 따위로 예체능 학과들이 시끌벅적하던 무렵이었다. 이름 있는 대학의 국문과 같은 곳도 ‘문화컨텐츠학부’ 같은 간판을 달아야 한다는 판국에 그건 그러잖아도 불안한 연극학과생들의 피부를 그대로 자극하는 소리였다. ‘교수님은 우리를 뽑아주신 분’과 맥이 통했다. 마지못해서라도 앞에서 싸워 준 형들은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실은 총회에서 발언할 사람을 미리 정해두었었다. 나는 대번에 손을 들었으나 거절당했다. 그쯤 나는 시한폭탄처럼 강경한 말들을 내뱉고 있었고, 그 의견이 우리 사이에서 보편적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동기 한 명이 나에게 흘긴 말이 선명하다.

“거기 나가면 너 어려운 말 쓸 거잖아.”

 

그 자리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세 시간 동안 앉아 있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세 시간 동안 녹음한 파일을 저장해 놓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진짜 세상의 이야기, 그러나 너무 잔인한 말과 말과 말들. 나는 이걸 다 듣고 충격을 받을 그녀의 모습을 조금도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누구와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다. 친하던 친구 하나가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정말 할 거야?”

대답하지 못했다.

오월 말이었다. 밤인데도 서늘했다. 노천극장을 지나 학교 정문으로, 또 혜화역까지 걸어 내려갔다. 조용하던 학교를 지나 들어선 대명거리는 밝고 흥겨운 번화가였다. 그 사이를 지벅거리자니 눈물이 났다. 큰길을 건너야 극장들이 늘어선 진짜 대학로가 나왔다. 골목골목을 이삼십 분 거닐다가 막차를 타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이제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그저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녹음본을 전달하지 못했고, 더는 전화를 붙잡지 않았으며, 고발을 진행하지도 않았다. 나는 더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고 싶었다. 알고 봤더니 나는 겁이 많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이 사건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얻을 당장의 안온을 더 사랑했다. 그것이 타고난 나의 성정이었던 것이다. 비극의 뿌리는 나의 여집합이었다. 그러나 비극을 비극으로 끝내고 만 것은 내 두 손과 성급한 가슴, 그리고 뒤늦게 식어버린 머리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일은 결국 그때의 내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날을 전후로 불면증을 얻었다. 이때부터 입대하기 전까지 4년 동안 나를 괴롭힌 병이었다. 그동안 편안하게 잠들 수 있던 날은 손에 꼽는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이 갈수록 다양해졌지만 시작은 이날의 도망 때문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나 시간을 돌려 2016년 5월로 되돌아가더라도, 나는 의자를 박차고 나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말싸움 한판을 붙거나 고발장을 진짜로 접수했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그것이 나를 눌러왔다. 자괴감을 피하기 위해 동기들을 원망하며 애써 잠을 청해보려던 밤도, 솔직히 많다.

 

유월이 되고 종강을 했다. 한바탕 도가니 같은 시련이 일단락되었다. 나는 그날 이후 많은 이들과 서먹해졌다. 말싸움을 벌이던 동기들과 조금도 개인적인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영어 교양 과제를 도와달라거나 미팅을 주선해달라는 일도 없었다. 그들에게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 보이는 어색한 웃음만이 남아 있었다. 합심해서 나를 차단한 이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따돌림을 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내 농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거기에 웃어주는 사람은 허룩하게 줄어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후일담 몇을 전해야겠다.

나는 결국 서울로 이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성화에 밀려 영등포시장이나 후암동에 방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엄마 생각에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서울 안에 사는 것이 간절했지만, 엄마 얘기를 방패삼아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를 어른답지 못하다며 호되게 혼낸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C를 받았다. 전공 수업은 학점에 플러스를 달아줘도 상대평가 비율에 상관이 없었다. C+를 줘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움직임을 배우는 아크로바틱 수업이었는데, 어지간히도 못했다. 정직하게 말해 나에게 F를 줬어도 납득했을 것이다. 다만 C라는 성적이 기억에 남는 건 교수님이 나를 불러 독대한 다음날 고지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 아니니? 너를 뽑은 뒷얘기를 다 해 줄까? 다른 강사 선생님들은 너를 뽑지 말자고 했었어.”

그 뒤로 교수님의 전화가 울렸고, 통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과 사무실에서 도망 나올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나를 뽑아주신 분이었다. C학점을 받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깟 C+학점을 못 받았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겠는가. 나는 삼수생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다음은 총회가 있고 일주일 뒤의 이야기다. 페이스북에 눈에 띄는 글이 올라왔다. 어떤 선배였다.

“학과가 한바탕 시련을 겪었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더 좋은 변화이기를. 후배들은 그 전의 학교를 모른다. 우리가 겪은 무게도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동기들 가운데 ‘좋아요’를 누른 사람은 한두 명이었다. ‘화나요’ ‘놀랐어요’ 따위가 없던 시대였다. 그 선배는 환불을 요구하는 예대생들을 공공연히 비웃고 다닌다고 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힐 일이라면서. 그 발언을 나에게 전하던 여자 선배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경멸을 참지 못하는 표정. 그는 싸구려 예대 잠바를 7만 원에 납품한 바로 그 선배였다.

다음 학기 교양수업에서 있었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논어’였다. 전공수업 직후에 있어서 함께 듣는 동기들이 몇 있었다. ‘인(仁)과 의(義)’란 주제를 가지고 발표를 해야 했다. 나는 그럭저럭 무색무취한 발표를 했다. 아마도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꺼내 간신히 적은 발표문이었던 것 같다. 몇 명이 지나 다른 동기의 순서가 되었다. 대놓고 싸운 적은 없지만 은근히 보수적 입장을 띠었던 친구였다. 그는 아주 적절한 예를 들었다.

“‘의’라는 말을 놓고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불의가 떠오릅니다. 제 친구가 다니는 모 체대에서는, 선배들에게 기합을 받던 도중 여학생 한 명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근육이 녹고 간수치가 올라가 입원까지 했는데요…”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교양 수업 PT 따위에 그 사건을 소비하다니, 그것도 동기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래도 되는 건가?’

그것은 ‘이래도 되는 게 아니잖아?’라는 확신이 아니라 내가 굳게 믿고 있던 상식에 대한 회의였다. 몇 달 전 대면했던 그 사건의 무게마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가 그다음에 뭐라고 주장을 펼쳐나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심한 메스꺼움에 입술을 깨문 것은 기억난다. 그러나 더 괴로웠던 것은 그 친구를 마음속으로 아무렇지 않게 비난할 수 없는 비겁함이라는 나의 원죄였다.

시련이란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의 선함, 악함,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버리는 가치, 도덕의 잣대 따위가 모두 내보여졌다. 도가니에 우리는 쏟아 넣고 뒤흔든 결과 나는 나자빠졌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심지어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시련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악하지 않을지언정 누가 뭐래도 비겁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 선연한 사실을 거부할 수 없었다. 부정하기 힘든 건 또 있었다. 내가 준비되지 않은 얼치기 예술대학생이라는 것. 재능, 노력, 용기. 모두 평균 이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안온한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아주 멀리, 내 유년을 받아들이고, 스무 살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하며 종종 발견될 나의 허물쯤은 감싸줄 수 있는 곳으로. 재수학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날은 다했다.1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자긍심 가득한 혜화동 거리에 더 마음을 둘 수가 없었다. 떠나기로 했다. 이제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그곳은 이제 내 세계가 아니었다.

축제의 물결, 노천극장, 경영관 앞 잔디밭, 1호선 첫차와 혜화역 1번출구, 새벽의 셔틀버스, 연습실, 봄볕 아래 거닐던 대학로의 골목, 소담한 소극장과 빨간 벽돌의 대극장, 남은 표를 팔아대는 단원들, 갈맷빛 가로수들, 붐 마이크를 들거나 슬레이트를 치며 뛰어다니던 학교 앞 골목들, 선배들 몰래 모여 들던 술집과 카페. 수백 번 앉았다 일어난 뒤에나 느껴볼 수 있었던 것들.

나는 불쾌한 기억으로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즐기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학교와, 연극과, 무대와, 많은 사람들과, 그 시절과 그렇게 일별하였음을 말이다.

 

몇 년간 학적만 유지한 채 모두를 등지고 거의 완전히 혼자서 학교를 다녔다. 물론 친한 동기나 후배들 몇과 만나긴 했지만, 강의 시간 사이에는 잠을 자거나 혼자 과제를 했다. 누구를 따로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독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자기합리화였다.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 올라타 불의한 인간이 되느니 초연하되 외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낫다는.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깨달았다.

나는 그 세계에 편입되고 싶었다.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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