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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그런데 선생님, 동안이세요?”

“예? 동안이요? 얼굴요?”

“나이도 그렇고, 대학생이셔서 전문 선생님이 아니라는 이미지다 보니까요. 일단 너무 어려 보이면 엄마들이 좀 가볍게 본다고 할까요?”

“아~ 저 절대 스물둘로 안 보여요. 어떻게 면도라도 좀 덜 하고 갈까요? 한 서른마흔다섯 살 같을 텐데. 으항항항.”

“어유, 웃음소리가 아주… 호탕하시네. 사진으론 그렇게 안 생기셨던데. 그러면 내일 한번 방문하세요. 그 집에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주소 보내드릴게요.”

어리숙한 비즈니스용 웃음으로 그해에 얻은 첫 수업은 동부이촌동의 고3 여학생이었다. 중개업체가 알선해 준 것이었다. 지금은 ‘김과외’, ‘프람피’ 같은 앱을 쓰겠지만, 그때는 네이버 카페에 프로필과 연락처를 올려놓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었다. 면접은 밤 열한 시쯤 불쑥 걸려온 전화로 갈음하는 것 같았다.

전화는 참으로 별안간 온 것이었다. 선풍기 앞에서 감은 머리를 말리며 애꿎은 카페 게시판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건 인정해야겠지만 그 시간에 온 전화를 유쾌한 기분으로 받을 수는 없다. 내일 출근하라는 일방적 통보도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첫 달 50% 수수료? 겨우 35만 원짜리 일에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휴대폰 요금과 교통카드 대금 납기일이 임박한 것을 상기하면 겸허해졌다.

그리고 이 시장에 발을 담그다 보니 그것이 이 업계의 습성 보편이란 것을 알게 됐다. 과외 중개업체, 학원 원장, 때로는 몰상식한 학부모들까지도. 누군가를 ‘을’로 취급할 때 나올 수 있는 첫 번째 행동 양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안을 처음 밀어내는 순간 수업이 성사될 확률은 현저히 낮아진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밀고 당기는 수 싸움을 하자니 나를 대체할 자원이 널려 있었다.

 

*

 

재수생 시절부터 운 좋게 시작한 과외였다. 하지만 과외와 강사 일은 어쩌다가, 또는 권태로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우연히 시작했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매우 만족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할 수 있는 다른 아르바이트- 캐셔, 서버, 스타벅스 파트너, CGV 미소지기, 쿠팡 물류센터보다는.

과외로 수입을 얻기 전에는 그 평범한 노동이 아무렇지 않다. 그러나 인생의 법칙은 안타깝게도 역체감에 민감하다. 유선 이어폰을 쓰다가 에어팟을 써 보면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에어팟을 쓰다가 유선 이어폰으로 돌아가려면 불편해 미쳐버릴 것이다. 다른 아르바이트 노동과 과외의 관계도 유사하다. 과외는 물류센터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낫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시급이 세다. 나의 구직 철칙은 항상 ‘박리다매’였다. ‘한국지리’란 비주류 과목이 주력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영어 수학도 아니고 사회탐구에 돈을 쓰겠나? 그런데도 항상 한 시간에 25,000원~30,000원꼴을 받았다. 다만 두 번째가 ‘불러주면 어디든 감’이었으므로 교통비를 생각하면 조금 적게 계산해야겠다. 집을 경기도 남부에 두고 서울과 신도시 곳곳을 쏘다녔으니까. 하지만 최저임금이 6,030원이던 2016년에도 그만큼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큰돈임엔 분명했다. 과외비 시세가 몇 년 동안 제자리걸음이기는 하지만.

두 번째,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일은 거의 없다! 인턴이나 사무보조가 있지만 둘 다 구하기 힘들다. 일단 인턴은 경쟁률이 높고 스펙이 필요하다. (스펙 쌓으려고 하는 게 인턴이거늘 염병할 그럼 어디서 스펙을 쌓으란 말인가? 그러나 일찍이 공모전과 다양한 대외활동을 해놓은 친구들은 잘도 인턴을 구한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다 노력의 결과다.) 사무보조는 그보다 허들이 낮지만 취준생이나 대학원생 등으로 경쟁자 집합이 넓어지며 통상 3개월 이상의 근속을 요구하므로 이것도 어렵다. 과외가 최고다. 나는 연차가 쌓일수록 요령만 느는 선생이었다. 수업 때 삼십 분은 잡설과 고민 상담, 삼십 분은 기출문제 풀이를 시켜놓고 휴대폰을 만지작대고는 했다. 정말 과외가 최고다. 늘 짜릿하고 새롭다.

세 번째,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며 일하는 시간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 이건 약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생각 외로 과외는 학생만 대하는 일이 아니다. 학생, 학부모, 중개업체, 학원에서 일한다면 원장이나 상담실장 같은 이해당사자들과 맞부딪힌다. 그리고 수업 때 하도 많이 말하다 보니 (반대로 학생이 하는 말이라고는 네, 모르겠어요, 엄마랑 얘기해볼게요, 숙제 놓고 왔는데요, 뿐이다.) 다른 자리에서 입을 열기가 피곤해진다. 처음 과외선생을 하던 스무 살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내 수다는 많이 억제되었다. 그렇지만 일하는 시간의 유동성은 큰 장점이다. 일주일에 두 번이 계약 조건이라면 요일이 어떻든 두 번만 채우면 된다. 수업은 대부분 평일 밤이기에 대학생의 일정에 끼워 맞추기도 수월하다. 학교 일을, 나중에는 주말에 동아리 활동을 했었던 나는 이 같은 유연함이 꼭 필요했다.

 

그러나 정직해져야겠다. 지식노동자의 말석을 꿰찬 느낌, 그것이 무엇보다 맘에 들었다는 걸 말이다.

그건 (말이나마) 선생님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 아무것도 모르는 고등학생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태어난다. 슬랙스에 니트, 코트를 입은 채 브리프케이스 비슷한 가방을 주워들고 가정을 방문하거나 오른팔 소매를 걷은 채 학원의 칠판 앞에 서 있다 보면 그런 허영심이 샘솟지 않을 수가 없다. 순진한 고등학생들의 동경 어린 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위치라는 것도 이유다.

나는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같은 과목을 가르칠 때, 등장하는 사상가들의 이력을 줄줄 외워주고는 했다. 이런 식이다.

“존 롤스. 1921년 미국 발티모어에서 태어났어. (볼티모어가 아니다. ‘발’티모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있어 보인다.) 1943년 프린스턴을 졸업해서 공군 장교로 입대하지. 이 사람은 계속 군인을 할 수도 있었어. 그런데 시대가 그렇게 놓아두지 않았다는 거야. 당대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병폐가 뭐였을까? 그렇지 인종차별이지. 이 문제의식에서 롤스는 정의론을 발전시켜나가게 된 거야…”

출처는 가끔 읽던 교양서, 나무위키, 복수 전공하던 정치학 수업에서 주워들은 것들이었다. 내용을 뜯어보면 허울 좋은 관상용 잡지식이다. 사상의 핵심이나 출제 포인트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러나 중산층과 상류층 아파트의 공부방에서 쫄지 않는 방법은, 이렇게 지적 우월감과 심리적 보상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년들은 현학적인 설명과 풍부한 지식으로 무장한 선생에게 쉽게 매료된다. 물론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자신에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제였지만.

넉넉한 동네에서 돈을 버는 가난한 지식노동자.

70~80년대 문학의 사변적 주인공처럼 스스로를 설정하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자기연민이었다.

 

*

 

시급을 제외한다면 몇 년 동안의 과외와 학원 강사 생활로 얻은 건 별로 많지 않다. 고등학생들의 동기를 부여하는 얄팍한 기술이 조금, 그리고 어떤 편견이 있었다. 갈수록 견고해지는 서울과 그 주변부 지역 각각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었다. 물론 표본은 매우 적다. 내가 만난 학생들이라야 동네마다 두셋이고 많으면 열 명이나 될까 말까할 것이다. 나의 선입견이 먼저 작용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들의 동네를 꽤나 닮아 있었다.

중계동 주공아파트에서 만난 학생은 수더분하지만 나에게 직접 전화해 한 시간 넘게 상담을 할 만큼 절실했다. 위례신도시는 장난기 많고 밝고 구김살이 없었다. 그러나 수업 외 시간의 소통은 부모님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내곡동과 세곡동은 대체로 부모님들이 너무 바빴다. 오히려 아이들이 나를 붙잡고 수업과 상관없는 여러 상담을 청해 오는 통에 연민이 생기기도 했다. 분당은 구도심 이매동과 판교에 가까운 정자동이 달랐으며, 같은 목동이라도 바깥쪽 신정동에 가까운 빌라촌과 하이페리온에 가까운 아파트단지의 아이들은 달랐다. 전자 쪽의 아이들이 좀 더 순박하다. 상대했던 부모들로 논하자면 전자는 얼굴이 꺼멓고 잘 맞지 않는 셔츠와 무릎이 바랜 바지를 입은, 의지는 있는데 요령이 없어 조그만 학원 원장의 감언이설에 귀가 팔랑이는 아버지로 묘사할 수 있다. 후자는 집에 상주하며 조금도 화장하고 꾸미는 법이 없지만 봉투나 휴대폰을 꺼내는 가방만은 최소 MCM이나 프라다이며, 하루가 멀다 하고 카톡을 보내 다음 모의고사 점수를 운운하는 어머니로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말로 가끔이나 있던 우리 동네 수원의 고등학생들에게서는, 내가 친구들에게서 보던 능글맞지만 착하고 꾸밈없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해 눈물이 날 뻔도 했다.

지금 설명하려는 동부이촌동은 어땠을까. 꼭 그 동네가 어떻다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이것은 계급에 관한 얘기다. 그것은 내가 강 건너편 사당역에 훨씬 더 익숙한 인간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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