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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경기도 남부에 사는 사람이 서울로 진입하는 방법은 빤한데, 크게 양편이다. 일호선이나 무궁화호를 타고 도심으로 가는 게 첫 번째다. 아침 출근길이라면 꼭 이쪽을 이용해야 한다. 대체로 노선도의 시간대로 움직여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환승 결절점 사당역에 몰려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다른 목적지로 흩어지는 것이다. 좌석이라 편하고, 생각보다 찻길이 막히지 않는다.

가끔 기차나 지하철을 놓쳐서 아무리 다음 차를 빨리 타도 지각하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사당역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는 도박을 감행하고는 했다. 그러니까,

플랜 A, 9시 교양 수업에 알맞게 도착하려면:

– 7시 33분 무궁화호로 서울역에 도착하면
– 8시 12분. 매우 빨리 걷는다면
– 8시 18분에 출발하는 4호선 상행을 탈 수 있고,
– 8시 31분에 혜화역에 도착하면 일단 안심이다. 걸어 올라가도 늦지 않고, 셔틀버스 줄은 금방 빠질 것이다.

플랜 B, 만일 기차를 놓쳐버린 7시 35분 언저리라면:

– 8시 20분에 버스로 사당역까지 도착할 수 있다, 혜화역에는
– 8시 50분쯤 도착할 거고 동대문역을 지날 때쯤 카카오택시를 불러놓는다. 예대 학부생은 출석부 맨 밑에 있으니 출석 확인은
– 9시 05분쯤에 할 것이다. 택시가 15분 안에 가 준다면 승산이 있다.

그러나 플랜 B가 성공한 적은 없다. 길바닥에서 소모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동작대교를 건널 때면 거의 9시가 되어 있었다. 1학년 때, 2학기 첫 수업을 단념하고 방향을 돌려 청계천 구경을 하던 기억이 난다. 포기하면 이렇게 평화로운 것을.

냉정하게는 행복회로에 가까운 플랜 B를 항상 쥐고 있었던 건, 사당역이라는 장소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서울 그 어떤 동네보다 많이 밟아본 곳이다. 내가 어느 곳보다 많이 배회하고 사람을 많이 만나며, 중학교 2학년 때 친하던 대학생 형에게 처음 술을 얻어 마셔 본 곳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목적이 환승이고 이방인 신분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사당역을 찾는 모든 사람이 이방인이다.

 

사당역은 복잡한 교통체증이 거의 24시간 내내 있다. 여기서는 버스든 승용차든 무슨 일로든 서울에 진입하려고 하거나, 반대로 강북에서 볼일을 보고 서울을 빠져나가려 하거나 해서 매일 굉장한 소음을 유발한다.

근처에서 끼니를 때우려 보면 패스트푸드나 프랜차이즈 카페, 해물이나 김치찌개 따위를 안주로 하는 포차, 그도 아니면 평범해 보이는 호프집이 첫눈으로 들어온다. 일식은 사시미보다는 스끼다시가 찐하게 깔리는 보급형 횟집이 좀 더 흔하다. 사당에서 이수에 이르는 대개의 식당은 일견 ‘그럭저럭’인 것이다. 그것은 여기를 지나는 많은 사람의 대개가 주민이라기보다는 스쳐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의 밋밋해 보이는 밥집들은 제법 요리를 하는 편이다. 일단 10번 출구에서 이수역으로 가는 길의 왼편 골목에는 서울 시내 3대 김치찌개집 중 하나가 있다. 알고 보면 그 가게는 한강 이남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전집을 수줍게 마주 보고 있다. 뿐인가, 경문고등학교 뒷골목의 어느 선어 횟집은 유독 덴뿌라의 맛이 절륜해 역대 동작구청장들이 즐겨 찾았다 한다. 김밥만 취급하는 태평백화점 뒤의 노포도 명물이다. 아침에 정복을 입은 자들이 가끔 줄을 서는데, 방금 당직이 끝난 방배경찰서 경사들이다. 시립미술관 근처로 가면 포항 연근해에서 잡아 올린 산오징어를 시가로 내놓는 포차도 식객을 끈다. 일설에는 영일만에 매일 방류되는 포항제철이 쇳물이 난류를 타고 나가 오징어에 철분을 더하므로 빈혈에 좋다고 한다. 그렇다. 사당은 보기보다 만만한 동네가 아니며, 상술한 주접은 다 사실이다.

그러니 이곳의 이방인들 역시 그냥 이방인들이 아니다. 지방 버스터미널 앞의, 무슨 ‘전주 식당’ ‘마산 식당’처럼 쓸데없이 차림표만 넉넉한 허접한 밥집에서 아침을 때우는 무력한 이방인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여기서 매일같이 출퇴근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아니, 그 하루하루를 ‘치러낸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그들의 구성을 정밀히 알 수 있는 통계는 물론 없다. 측정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다. 통계조사를 지시할 만한 높은 사람 중 아무도 그 비루한 인생들엔 흥미가 없을 것 같다는 것. 어쨌든 이들은 매일 아침 서울시계(市界) 직전 남태령에서 삼십 분을 길바닥에서 내버리고 온다. 그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서울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수원이나 군포 따위의 위성도시들로 밀려난 중년들이 어림잡아 절반쯤 된다. 기왕 삶터가 옮았으니 일터도 그랬다면 좋았겠으나 그것은 곧 치킨집을 창업하는 미친 짓이 된다.

그리고 서울로 통학하는 대학생들이 또 그 절반쯤을 차지한다. 항상 잠이 부족하기에 이곳에 도착할 때는 렘수면에서 갓 깨어나게 된다. 이런 모습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다시 갈아타야 한다. 청년들 어디 갔냐고, 다 중동에 갔다고… 아니다. 알고 보면 다 여기 있다.

그리고 나도 그 일군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다만 학교에 가는 것 말고도, 돈을 벌기 위해 사당역을 들르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퇴근길을 거슬러 사당역을 거쳐 한강을 건너는 것이다. 학교에 가는 날 수업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여학생은 내가 학교에 가는 날만 다른 과외가 있다고 했다.

 

*

 

그 집에 처음 갔을 때 여럿이 낯설었다.

아파트는 동부이촌동에서도 제일 동쪽 끝에 있었다. 큰길가에서 들어가려니 H 맨션을 지나가야 했다. 오래된 5층짜리 아파트가 겹겹이 늘어선 단지였다. 아주 어릴 때 살던 개포동 주공아파트의 외양이었다. 내가 너무 잘 기억하는 것이었다. 옆으로 눈질하는 것만으로 갈색 창문틀, 좀 더 연한 갈색 공동현관문, 문 옆의 녹슨 우편함, 도끼다시 바닥과 계단, 실외기가 드러난 베란다, 도색이 벗겨진 놀이터 평행봉, 아파트만큼 자란 나무들 같은 걸 떠올릴 수 있었다. H 맨션을 스쳐지나 아파트단지의 입구로 들어섰다. 강변답게 이름에 ‘리버’가 붙은 이곳도 익숙하기만 했다. 염창동과 비슷해 보였다. 여기도 가끔 집이 경매에 넘어가서 용달차를 부르는 가족이 있을지 몰라. 담이 높지도 않고, 외부인을 경계하지도 않고, 겉보기는 적당히 때가 묻어 있었다. 나중에 신사동이나 광장동의 고급 아파트에서는 단지 출입구서부터 경비원을 호출했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보안을 강조하는 유행이 신축 아파트에 반영된 까닭이다. 그러나 그런 곳들에 비해 동부이촌동이란 곳이 이방인이 좀처럼 찾아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낯익은 게 외려 생경하던 까닭은 그 동네가 부촌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해 수지의 중산층 아파트단지로 출근하거나 분당의 학원에서 유복한 미술‧무용 전공생들을 만나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 한 채의 가격이 10억을 넘는 동네는 처음이었다. (지금은 30억까지 호가한다. 그랬다. 새로운 동네에서 내 눈에 먼저 띄던 것은 공인중개사 창가에 붙은 매매가였다.) 모두 사람 사는 동네라고 치부하기에는 자격지심과 선입견이 너무 강했던 걸까? 왜 이리도 비슷할까? 배신감 들게.

강 건너 D 여고 3학년이라는 학생의 집은 8층이었다.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기분 좋은 냄새가 은은히 밀려왔다. 라일락 향이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로 낯선 것이었다. 낯익어서 낯선 것이 아니라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서민계급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는 절대 좋은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서니 여학생의 어머니가 나를 반겼다. 레깅스를 입었고 크롭탑 위에 짧은 저지를 걸치고 있었다. 맹세컨대 이걸 기억하는 건 내가 변태라서가 아니다. 그 후로 어떤 집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학부형의 복장이었고, 처음엔 그녀가 과외생인 걸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인스타그램 추천에 뜬 걸 봤더니 그녀는 여성 의류 쇼핑몰 사장이었다.

넓고 깔끔한 집이었다. 거실 통창 너머로 밤의 한강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강변북로 왼쪽으로 방금 건너온 동작대교가 보였다. 오렌지색 가로등이 파란 구조물에 비쳐 있었다. 걸을 땐 몰랐는데,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예뻤다. 지금 생각하니 좀 더 오랫동안 눈에 담을 걸 그랬다. 정말 그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면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일 것이다. 그러고 있으려니 여학생 하나가 건너편(건너편!) 방에서 파자마(집에서 실제로 파자마를 입고 생활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차림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저쪽 방으로 가면 되나요? 학생의 얼굴에서 말을 시작해 어머니를 보고 끝냈다. 아뇨 저기는 침실이고 공부방은 여기에요. 오우 쉿! 너에게 배정된 방은 최소 두 개구나. 나는 수원에 겨우 하나 있고 서울엔 하나도 없는데 썅… 물론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했다.

방에 들기 전에 어머니는 커피를 타 준다고 했다.

“딸은 아메리카노? 선생님도 커피 드세요. 쓴 거 드실래요 달달한 거 드실래요?”
“아유, 저는 그럼 밸런스 맞게 단 거 먹겠습니다. 항항항.”
“어머 선생님, 웃음소리가 되게 특이하시네요.”

이러한 주접으로 의심을 거두거나 호감을 살 수 있다면 언제든 오케이였다. 여학생을 맡을 때 남선생은 꼭 달갑기만 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고 나서 그녀가 커피를 ‘만들었다’. 카페에나 있을 법한 은색 커피머신으로 직접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미리 따라 놓은 찬물에다가 원액을 붓고 그다음에 얼음을 넣었다. 물-에스프레소-얼음. 나중에 스타벅스에서 일할 때 이 시퀀스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이때를 떠올리고 놀랐던 기억이다. 그 어머님이 커피를 내리는 솜씨는 참으로 근본이 있었다.

자, 그럼 ‘달달한 거’란 뭘까? 나는 대체 어떤 재료를 첨가한 배리에이션 커피를 대접받을 것인지 부풀었다.

설레발을 치기가 무섭게 내가 받아든 것은 ‘맥심 화이트골드’였다. 어머니가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손수 조로록 받아 저어 준 것은 물론이다.

“선생님 더우신가? 얼음 넣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면 ‘달달한’ 커피가 아니게 될 것 같거든요. 물색없이 금방 털어넣은 커피는 아주 익숙한 맛이었다.

나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커피 맛 모르는 애송이에게 주는 정당한 대접이라고 생각했던 것일지, 정말 그 집은 단 커피를 먹을 때 맥심을 먹는 것일지, 놀리거나 엿을 먹이려던 것인지를 말이다. 내가 이번 달에는 17만 5천 원으로 안분지족하는 궁한 과외선생이라는 사실이 마음 속에서 급격하게 떠올랐다. 천만 원짜리 커피머신이 있는 집에서 믹스 커피를 대접받을 때의 기분은 묘했다. 달달한 부잣집 맛을 누려보려던 심산을 안성기 씨가 놀리는 듯했다. 그래, 커피는 맥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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