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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분명한 선의에 뒤통수를 맞는 기분, 그것을 여기서만 느껴본 건 아니다. 그다음 해 겨울 평창동에서 한 달 동안 윤리를 가르칠 때였다. 내 역할은 말하자면 과외교사 권한대행이었다. 다음 교사가 구해지기 전 한 달 정도 수업을 해주면 됐다. 그 집은 교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 정식 과외교사로 채용한다는 것이 중개업체의 귀띔이었다. 믿어지는가, 고작 사회탐구 과외선생 자리에? 그러나 그곳은 범인(凡人)의 가늠을 아득히 뛰어넘는 부촌이었다. 안 그래도 가정부를 쓰는 집에서 못할 게 뭐란 말인가? 내가 여덟 번의 수업을 하고 받은 보수도 상상 초월이었다. 후불로 받았지만 시급 5만 원. 4주 만에 80만 원이 찍히던 휴대폰 팝업 메시지. 입금이 되자마자 점심으로 연어뱃살덮밥에 연어를 추가해 먹었었다. 입가심으로 들이켠 미소시루는 얼마나 달콤했나. 그립다. 다만 새옹지마라, 그날 집에 오며 휴대폰을 떨어뜨려 액정 교체에 25만 원을 날려야 했다.

그 집은 <기생충>처럼 아주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어도 생경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버스에서 내려 오르막을 십 분쯤 걸었다. 내려갈 때는 삼 분도 안 걸리던 길이었다. 사람 키만 한 담과 그에 걸린 초록빛 나무, 그보다 좀 더 연한 녹색의 마당. 다만 초인종은 여느 아파트와 비슷했다. 드라마는 역시 드라마일 뿐이었다. 20년 전이었으면 아아아악- 하는 부잣집 벨이나 사자 아가리에 걸린 문고리를 마주칠 수 있었을까.

세 번째인가 네 번째 그 집에 갔을 때였다. 수업이 끝나니 밤 열한 시였다. 버스는 끊겼고 택시도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 동네였다. 이미 짐작한 것이었다. 서울로 출퇴근하며 막차 시간조차 계산하지 않는 이방인은 없다. 이런 일은 익숙했다. 나는 가능하면 하루에 많은 수업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쉬는 날을 하루라도 더 만들려고 했다. 어차피 택시비도 없었다. 수중에 2만 원 정도가 있었을까? 일하던 학원이나 가정에서 돈이 들어오려면 며칠이 더 남았었다.

대강 광화문까지 걸어간 뒤 근처 카페에서 밤을 보낼 작정이었다. 엄동 속이었지만 열을 낼 겸 빨리 걸으면 한 시간이면 될 것 같았다.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방을 나섰다. 어머님이 뜻밖에 코트를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밍크였다.

“늦게까지 고생하셨어요.”
“아유, 아닙니다. 하하.”

이때쯤 내 웃음소리는 별로 특이하지 않았다. 물색없고 가벼운 웃음이 별로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워낙 내려가기 힘든 동네라 콜택시를 불러놨거든요. 저희가 자주 부르는 데에요.”

일이 그렇게 된 순간 내일모레 점심은 거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 섰다. 내심 다행이기도 했다. 날이 너무 추웠다. 경복궁역까지라면 칠천 원 안쪽으로 해결될 것이었다. 운이 좋다면 사당역 막차를 탈 수도 있었다. 밖에 나가보니 정말 택시가 서 있었다. 밤이라 택시가 잘 안 보이는 것 같았는데, 바로 보니 도색이 까만 모범택시였다.

택시비는 만 원을 훌쩍 넘게 될 것이다. 밖으로 나오는데 어머님이 어느새 총총 따라 나와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코트 섶을 바짝 당긴 그녀를 두고 택시를 보내기도 뭣했다. 택시에 오르면 묵혀놓은 버거킹 기프티콘 따위가 없는지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 어머님.”

제발요, 를 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택시에 오르니 룸미러에 환하게 웃는 기사님의 치아가 보였다.

“수원 가시죠?”
“예?”
“장거리 콜 부르시길래 어딜 가시나 했는데 사장님이 수원 간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시간에 이 동네 잘 안 올라오는데, 멀리 간다고 하셔서…”
“아 그런데… 수원 가면 안 되는데요.”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조심히 가세요!”

아말감 어금니만큼 환한 어머님을 뒤로 택시가 미끄러져 갔다.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나는 화를 내는 기사님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경복궁역에 세워 달라, 목적지가 아닌데 잘못 알고 예약하셨나 보다… 실은, 아니 시발 제가 불렀습니까? 왜 저한테 그러세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 수원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요금이 10만 원은 우습게 넘어섰을 것이다.

평창동은 차원이 다른 부촌이므로 막차가 끊어지면 택시로 귀가하는 게 당연한 상식이었으리라. 8천 원과 10만 원의 차이 역시 별 것 아니었으리라. 택시를 타는 김에 모범택시를 부르는 풍모도 당연했으리라. 나는 아직도 그 집의 선의를 의심치 않는다. 그들과 내 ‘상식’의 차이를 절감하는 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동부이촌동은 평창동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내가 ‘맥심 사건’의 저의를 조금이나마 의심하는 이유는 그 동네를, 고작 두 달간이긴 하지만, 겉핥아 보았기 때문이다. 평창동을 관찰할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내가 그 동네를 오가며 본 건 사람보다는 차량들이어서 제대로 뭘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부이촌동도 잘 사는 동네지만, 그나마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외부인에게 무람없이 노출되는 ‘인간미’가 남아 있다고 할까?

*

동부이촌동은 사는 사람은 많지만 조용하고 한적해 별 사건이 없는 동네다. 중년의 고관들이나 그들 비슷한 나이의 연예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까닭이다. 서울에서 강남 3구와 함께 전직 대통령을 가장 많이 뽑아준 곳이다. 그건 그 아버지의 신화가 낳은 그녀의 가장된 신성성을 진지하게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부동(不動)하며 안정을 좇는 중산층 이상의 보수적 본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거기서 수업을 하던 2017년 무렵에 적어놓은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그 동네 아파트 가격이 갑절은 뛴 걸 생각하면 이제 얘기가 좀 다를 것 같다.) 그리하여 논현이나 청담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동부이촌동에는 오피스텔 성매매나 시끌벅적한 번화가가 없으며, 젊은이들이 올 고급 편집샵이나 프라이탁 매장이 없다.

조용하고, 평화롭다.

이것이 내게 가장 먼저 들어오는 인상이었다. 그건 내가 이방인의 천국 사당을 거쳐 오는 평범한 동네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칭하긴 싫지만, ‘서민 동네’에서 익숙한 풍경이나 군상과 동부이촌동이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사실 사소한 것들이다.

먼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여성들이 많다. 산책하기 좋을 만큼 길이 잘 뻗어있고, 조금만 걸으면 한강공원이 나온다. 반면 서민 동네의 개 주인들은 좀처럼 산책할 여유가 없다. 스트레스로 왕왕 짖어서 옆집의 항의와 드잡이의 도화선이 되는 개만 존재한다.

더불어 중년 이상 남성들이 대단히 멋지다. 솔직히 ‘남자는 와인’이라는 표현이 아저씨들의 개수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동부이촌동의 아저씨들은 대체로 넥타이를 매는 법, 수염을 정리하는 법, 얼굴형에 알맞은 안경을 고르는 법 따위를 아는 게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좋은 스타일들을 갖고 있었다. 런닝 바람으로 아파트 공동현관을 출입하고 그 앞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광경을 여기서는 볼 수 없다.

그들은 아이들과도 잘 놀아준다. 나는 대개 퇴근 시간이 지나고 수업을 하러 갔다. 그러면 아파트단지마다 아빠와 배드민턴을 치거나 함께 스케이트를 타는 어린이들을 볼 수 있었다. 건전한 중산층 가정의 표본 같아서 보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난다. 아버지가 늦게 퇴근한대도 엄마와 있으면 된다. 여기라고 맞벌이의 비중이 마땅히 낮은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본인의 자녀에게 쏟을 시간을 분배할 수는 있는 것 같다. 흙수저 동네는 그것이 어렵다.

모두 밝고 친절한데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기는 있다. 이런 동네에서 표정이 다르거나 퉁명스러운 사람들은, 대체로 부자가 아니라 부자 동네에서 일하는 서민들이었다. 내가 동부이촌동에서 겪은 불친절이나 거기에 준하는 태도는 그러했다. 편의점, 아파트 경비실, PC방, 테이크아웃 전문 커피숍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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