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사당역과 동부이촌동 사이의 페이크 지식노동자 (3)

→ #11. 세상과 불화하는 자, 멋지게 젊음을 허비하다

 

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부인네들이 한가한 낮에 모여 차를 마시는 데는 이디야나 빽다방이 아니었다. 대체로 스타벅스와 폴바셋, 그리고 프랜차이즈보다 고급스러운 로컬 카페들이었다. ‘파리바게트’에서도 빵을 사지만 케이크를 살 땐 반드시 ‘파리 크로아상’이나 곳곳에 숨겨진 수제 케이크 전문점이었다. 밤에 모이는 곳도 달랐다. 호프집은 없고 이자까야가 많았다. 종합시장에 있는 오래된 포차 같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들마저 요새는 인스타그램으로 유명해졌다. 동네의 ‘바이브’ 때문일까?

강 건너 잠바떼기 아저씨들은 자취가 없고 반테나 무테안경의 직장인들이 대개였다. 꼭 정종으로 회동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소주를 먹더라도 좀처럼 국물을 마시지 않았다. 참치 오도로나 새우 머리 튀김, 치킨 가라아게는 가격을 떠나 재료 맛을 살리는 훌륭한 안주다. 그 동네의 술꾼들은 내일 멀쩡히 가야 할 직장이 있으며, 덮어놓고 술을 먹는 사람들이 아닌 거다. 교양인들이라 이 말이다. 무엇보다 내일도 입을 기지 바지에 국물이라도 튀어서는 곤란하다. 아, 그분들은 집에 다 스타일러가 있을 것이다. 장롱 옆에 옷을 ‘씻어 입는’ 기계는, 누구에겐 사치품이지만 누구에겐 생필품이다. 그렇지만 좋은 안주로 적당히 취하는 건 솔직히 부러운 일이었다. 빈곤한 대학생 입장에선 그랬다. 으레 술집에서 15,000원쯤 되는 간사이 오뎅탕이나 나가사끼 짬뽕에 그날 밤을 완전히 의탁하는 것이 우리의 술자리였다. 누구나 졸아든 짬뽕에 물을 들이부은 뒤 가스버너를 다시 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첫차 시간은 오지 않을 것만 같고 숙주나물도 홍합도 국물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빈정댄 건 미안하지만, 나는 이촌동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런 걸 관찰했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 동네를 좋아했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품위 있고 조용한 한강 이북 부촌 특유의 공기를. 과외 말곤 인연이 없는 곳인데도 굳이 찾아가 술을 마신 적이 많다. 수업이 끊긴 뒤에도. 참치는 무리였지만 가라아게나 연어샐러드 정도라면 비빌 수 있다. 만날 학교 앞에서 대취하는 기분과는 술맛이 달랐다. 과외가 있는 날에는 일찍 출발해 커피를 마시다가 사위가 어둑해질 때쯤 한강변이 보이는 아파트로 걸어가고는 했다. 동부이촌동의 폴바셋은 태평로나 강남역 지점보다 훨씬 조용했다. 부인들은 부드럽게 얘기하고 움직였다. 작은 웃음에도 입을 가리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노트북을 펴고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노라면 노력하지 않아도 여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여유라는 건 애초부터 작정하여 얻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테이블을 둘러싼 주민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는 걸 좋아했다. 그들은 일단 부촌답게 보수적이었다. 몇 년 전 용산 택지 개발이 좌절된 것을 매우 한스러워해 이제는 고인이 된 현직 시장을 극히 싫어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탈모나 노안을 흉보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더욱이 그때는 대통령 보궐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였다. 집 근처 역전 순댓국집에 앉아서 느끼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놈 저놈 하며 대선 후보들을 씹는 취한 아저씨들 중에 그들의 인신을 공격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건 정치 성향의 호불호와는 다른 얘기였다. 선거에서 2위를 한 후보의 외모를 조롱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또 이들은 대부분 중학생 이상 청소년의 부모이기도 했다. J고교와 Y고교의 면학 분위기를 종종 비교했다. 드물게 있는 강 건너 D여고의 학부모는 한숨이 잦았다. 나는 조금 께름칙했다. 누구도 수능특강을 끝까지 풀지 않는 변방의 일반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는 것 같았다. 나 같은 대학생에게도 기회를 주는, 투자에 인색하지 않은 학부모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말이다. 몸 편히 벌어먹는 일은 실로 감읍할 일이었다.

드러나는 건 분명했다. 계급의 차이였다. 어떤 동네는 왜 어떤 동네보다 잘 살까, 이런 물음에 대답이 되어주는 것이다. 물론 돈 많은 부모를 지닌 자식이 보통 더 잘 살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건 재산만이 아니다. 동부이촌동에서 여의도나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부모들과 경기도에서 사당역을 거쳐 뿔뿔이 흩어지는 부모들이 진정 상속하는 것은 각각 다른 세계관이다. 그것이 계급 차이의 진짜 의미다. 왜 어떤 동네의 아이들은 어떤 동네의 아이들보다 구김살이 없을까? 여유로울까? 자신감이 넘칠까? 따르는 친구가 많을까? 예의범절을 잘 지킬까? 이러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유력한 독립변수라는 것이다. 수업하러 다니는 내내 그걸 실감하는 건 슬펐다.

계급의 격차는 아주 단단한 바위가 양편을 가로막는 것과 같다. 학력위조 과외선생 최우식이 줄기차게 들고 다니던 수석처럼. 사실, 평창동 집집의 담벼락은 차라리 우리를 단념하게 만든다. 하지만 동부이촌동을 출입하는 동안에는 정말로 동네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내가 두 달 동안 과외선생을 할 때 그 계급의 차이는 매우 깨끗한 유리 같았다. 마치 없는 것 같더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는 건 불가능하다.

 

“경비 아저씨 나한테 혼나는 꼴 보고 싶어요?”

이것은 전 법무장관의 아내인 J교수가 기자들에게 던진 신경질이다. 기자들은 물론 기다렸다는 듯이 그 발언도 기사화했다. 많은 사람이 충격적이라는 투로 댓글을 달았다. 보통 사람들은 경비원에게 시비를 걸거나 욕을 할지 몰라도, ‘혼을 낸다’라고 발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식이나 강아지, 또는 하인에게 그럴지는 몰라도.

하지만 정경심 교수의 반응은, 아 실명을 적어버렸네, 당연한 거다. 그것은 그녀가 악하고 표독스러운 사모님 캐릭터라서가 아니다. 그녀는 ‘혼내는’ 편이며, 경비 노동자는 ‘혼나는’ 편이다. 그것이 그들의 상식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주인은 하인을 혼낼 수 있다. 주인이 하인에게 채찍질을 좀 했기로서니 주인네의 매너와 성품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스턴트맨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면 욕을 먹지만 주연 배우는 모공 하나까지 잡아내야 한다. 부자가 가난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여도 빈자가 부자가 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나는 손톱만치도 놀랍지 않았다.

어느 날은 수업이 일찍 끝났다. 주전부리나 몇 봉지 사서 집에 갈까 했다. 용산역 쪽으로 걷다 지하에 있는 큰 식료품점으로 들어갔다. 젤리와 수입 과자를 골라 계산대 앞에 줄을 서고 있을 때였다. 캐셔의 손이 조금 느려 줄이 길어졌다. 앞에 서너 명이나 있을까 했는데 나도 십오 분은 족히 기다린 것 같다. 주부들이 그악스럽거나 성질 더러운 아저씨들이 좀 있는 동네였다면 욕이 날아들 법도 했다. 내 앞에 팔짱을 낀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아주 교양있는 말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일을 좀 빨리 못 하시겠어요?”

욕을 들어먹는 것과 ‘일을 빨리 못 하냐’는 말을 듣는 것, 무엇이 더 모욕적일까? 모르겠다. 어쨌거나 충격은 그때 다 받았다. 그래서 정경심 교수의 그 말은 전혀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그날 그 동네가 지닌 세계관의 정체를 새롭게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자에 대한 그 교양있는 지청구는 그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첫 수업 때 받아든 뜨거운 믹스커피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뒤에도 나는 꾸준히 맥심을 대접받았다. 적어도 내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과외에서 가장 어색한 순간은 수업을 다 마치고 돌아갈 때다. 몇 초의 침묵이 필연적일 때가 있다. 닭갈비를 먹을 때, 직원이 마주 앉은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 철판에 밥을 볶아줄 때처럼.

숙제 해 오구,
다음 주 화요일 일곱 시에 보자.

이런 말을 다 마치고 나서 신발을 신는 십여 초. 허리 굽혀 뒤꿈치를 욱여넣느라 피가 쏠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시뻘개진 얼굴로 “그럼 다음 주에 봬요. 혹시 수요일에 수업할 수 있으시면 연락 주시고요.(화요일은 원래 쉬는 날이니까 제발.)” 라는 식으로 지껄이고 도어락을 한 번 더듬으면 마중 나온 어머니나 여학생이 보다못해 문을 열어주고는 했다. 문이 닫히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자면 이유 모를 아주 긴 한숨이 쏟아졌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아홉 시나 열 시가 넘어있다. 일 층에 다다른 문이 열리면 할머니 몇 분을 마주칠 때가 있었다. 낯익은 분을 볼 때도 있었고 처음 보는 무리일 때도 있었다. 분리수거를 하고 돌아오는 이들도 있었고 담소를 나눈 듯 핸드백을 팔에 걸치고 들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밝은 표정이었다. 그들끼리가 아니라 혼자 내리는 나를 마주치는 얼굴이. 종종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받는 것은 당황스러웠다. 보통 동네의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그러지 않는다. 코트를 입고 각진 가방을 어깨에 걸친 낯선 남자를 보면 일단 위아래로 훑어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가 아닌 친절로 이방인을 대하는 것은 거기서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 친절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정말로 슬펐던 건 그 모든 당연함 때문이었다.

 

회의감 때문에 그 동네의 과외를 그만둔 건 아니다. 지식노동도 노동일 뿐이며 좋은 일자리라면 마땅히 추구하니까. 나는 해고당했다. 동아리 뒤풀이에서 소맥 여섯 잔을 말아먹고 간 수업 때문이었다. 캔커피 세 캔 가글로 무마될 줄 알았지만, 술 냄새가 너무했기 때문이다. 아주 덤덤히 수용했다. 다만 선금으로 받은 셋째 달 월급 35만 원의 대부분을 돌려줘야 했던 건 치명적이었다. 안 주고 잠수를 타 볼까 싶기도 했다. 그럴 용기는 없었다. 빌린 돈으로 입금해줬다. 오랜 뉴캐슬 팬으로서 십 년 가까이 알고 지낸, 바로 전해 나에게 기자를 소개해주었던 형 S가 20만 원을 빌려주었다.

스물하나에서 스물넷까지의 나날 가운데 삼 분의 일은 수면으로 보냈다. 또 삼 분의 일은 학교와 술과 가끔 사랑으로 착각하던 감정 소모, 또는 나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던 감정 소모로 채웠다. 나머지 33.3%는 과외와 학원 수업, 그리고 여러 중산층 이상의 동네로 가는 대중교통 안에서 보냈다. 평창동, 위례신도시, 세곡동, 목동, 분당, 판교, 잠실, 일산, 노원, 방배동, 학동, 그리고 동부이촌동…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러한 여유로운 동네 특유의 공기를 좋아했다. 분명히. 그리고 그 일원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던 것도 아니다. 그걸 단념해서 슬퍼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지금 가장 그립게 생각하는 것은 사연 많은 우리 동네와 이방인으로 가득한 사당역이다. 억척스럽고 경박하고 피곤하고, 어떨 땐 얼른 벗어나 서울에 자리를 잡고 싶게 하는 모습. 아차 싶으면 막무가내인 아줌마들과 뻔뻔한 아저씨들, 저녁 짓는 냄새가 경계 없이 퍼지며 아직 일하는 엄마 아빠를 두고 자기들끼리 무릎이 까져가며 거칠게 몰려 노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동네, 그리고 버스 줄이 한참 남은 김에 퇴근의 피로를 김치찌개와 매운탕, 빨간 뚜껑 소주에 녹이는 가장들과 통학이 고될지라도 마음만은 편한 집이 있는 경기도 외곽으로 돌아가는 가련한 청춘들이 모여드는 사당역의 모습. 평생 서울 시내에 아파트란 장만할 수 없을 사람들. 모든 것이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어쩌다 올라탔지만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다.


 

목록보기  instagram

Comment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