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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어쩐지 세상과 불화하는 것 같은데,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화해할 수 없을까?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광고 기획을 공부해본다면 그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비관적이다. 실제로 깨달을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이다. 취향, 선호, 이념, 사상, 모든 것이 우리 세대와 좀 동떨어져 있다는 것. 버리기도 바꾸기도 어려운 것들이다. 그런 건 모두 몸 속 세포처럼 나를 하나하나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트렌드의 아웃사이더로서 동시대의 소비자들에게 건넬 컨셉과 아이디어를 만들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 두 해 동안 학회에서 마케팅을 공부하며 깨달은 것은 그뿐이다.

트렌드와 친해지기는 어려웠다. 누가 만드는지 모를 트렌드를 벌써 누리는 세상 사람들을 쫓는 건 더 어려웠다. 아, 깨달은 게 하나 더 있다. 사실 사람들이 좇는 것은 유행 그 자체가 아니다. 유행 그 자체를 이미 누리고 있는 힙스터들의 모습이다. 한참 마케팅을 공부한다고 법석일 때 선배들 여럿의 조언을 구하고는 했는데, 유명 대행사에서 인턴을 하던 공모전 동료가 얻어다 온 얘기 가운데 이런 게 있었다.

“열 명 중에 여덟, 아홉 명이 느끼는 게 트렌드일 것 같나. 그렇지 않다. 그건 그냥 현재다. 열 명 중에 선도하는 한두 명이 하는 게 트렌드다.”

나에게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려왔다- 그 ‘한두 명’에 들지 못하거나, 적어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면 광고를 그만두어라. 생각해보면 함께 광고 기획을 지망하던 동료들은 대부분 나와 달랐다. 그 ‘트렌드’가 몸속에 잘만 스며들던 것이다.

 

물론 광고업에 종사하는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또 다른 선배가 들려준 얘기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나처럼 아웃사이더의 향기가 풍겨오는 비범한 인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싫어도 알아야 해. 이 업을 하려면. 이번 반기, 이번 분기, 이번 달, 이번 주에 어떤 게 트렌드인지, 요즘 애들은 무엇을, 누구를 좋아하고 찾는지 다 조사한다고. 자, 봐봐. 입사했을 때부터 쭉 정리해놓은 거야. 내가 2013년에 입사했거든? 그때는 엑소를 모르면 안 됐어. 너 시우민 초능력이 뭔지 아냐?”

“모르겠는데요, 물?”

“결빙이야, 임마. 물을 만들어내는 건 수호야. 하지만 물이 없으면 능력을 잃어버리지. 그래서 수호가 꼭 필요해.”

SM엔터테인먼트가 만든 세계관에서 엑소는 단순한 아이돌 그룹이 아니다. 기억과 초능력을 잃고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들이다. ‘시우민’과 ‘수호’도 단순히 그룹 멤버가 아니라 외계에서 온 초능력자들이다. (그래서 ‘EXO’다.) 이들이 힘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이들의 무대와 활동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런 기획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여고생들을 빼면 이 디테일을 꿰고 있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학원 조교 시절, 선배와 비슷한 나이였던 선생님은 엑소가 50명인 줄 알고 있었다. 아니 무용단이에요? 라고 비웃으며 나보다 두 살 어린 고3 여학생들과 까르르 웃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건 마치 노인정에서 최신 유행을 전하며 으쓱해지는 꼴 아니었나.

 

물론 자기성찰을 목적으로 광고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스물 둘, 생각해 보면 진정 하고 싶은 게 없었던 것 같다. 그때 선택한 건 꿈에도 꿔본 일 없는 광고 동아리였다.

그렇다고 나름대로의 궁리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우선 급했던 건 혜화동을 떠나는 것이었다. 대학로에 대한 거부감은 혐오감이라기보단 ‘자격 없음’을 느낌에 가까웠다. 가기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쯤부터 나는 학교에 갈 때 혜화역을 통하지 않고 안국역부터 북촌을 거슬러 올라가는 후문 쪽을 택하고 있었다. 휴학을 할까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숨 막히던 1학년 시절을 떠올리면 억울했다. 그러잖아도 일 년 유예되었던 이십대 초반을 즐기고 싶었다. 그렇다면 달리 발붙일 서울의 어딘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수면 밑에 가라앉았던 조급함이 있었다. 뭔가 하긴 해야 한다.. 빠르면 전문대를 마치고 취직했거나, 3학년에 벌써 인턴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인생의 행로를 그들처럼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러나 간신히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다니며 생활 전선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을 때였다. 월급을 모아 적금을 붓고 차를 사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건 나를 조금쯤 초조해지게 했다. 그래서 허울로라도 진로를 탐색해야 했다. 학과와 멀어졌다는 건 연극과 영화에 대한 공부를, 또 그것을 공부하는 가장 쉬운 루트를 포기한 것이었다. 다만 막연한 의무감은 남아 있었다.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어떤 글을 쓸 것인지 몰랐다. 희곡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다. 난 항상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희곡이나 드라마 극본이나 비슷할 거라고 여겼었다. 시나리오 작법 책을 대여섯 권 읽고 난 지금은 크게 부끄럽다.

아무튼 이럴 때는 새로운 것에 끌리게 된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학교 대자보 게시판이나 학교 커뮤니티 홍보게시판을 뒤져보는 것이었다.

그때 눈에 뜨인 것이 연합 광고 동아리였다. 코난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조롱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매력적인 분야에 근거 없는 자신을 갖는다. 카피라이팅이라면 자신 있지, 글이니까.

E대나 Y대의 강의실을 빌려 토요일 두 시마다 세미나를 열었던 학회. 그러나 거기서 내가 가장 잘한 건 신촌에서 동이 틀 때까지 이어지던 음주였다. 가장 자신 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밤새 술을 마시고 떠드는 것.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듯, 센스와 주책을 줄 타는 농담으로 신입생 대표에 선출되었다. 나이도 학년도 제각각이었던 학회원들은 남학생 열다섯에 여학생 마흔여섯이었다. 여초사회의 장(長)이 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밌는 건 동아리의 오래된 규정이었다. 밤 열 시까지는 뒤풀이에 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야 술 마시는 게 아무래도 좋았으므로 상관없었다. 그러나 신입생 61명을 데리고 지속 가능한 규칙은 아니었다. 어라, 어딘가 익숙한 규율과 그 뒤를 쫓는 군상들이었다. 주말알바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아이들, 뒤풀이에 참석하지 않으면 집행부가 전하는 눈치들.

약간의 문제의식이 떠오르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신입생이 된 듯 부풀었다. 지하 술집 입구에서 열없는 눈으로 담배를 피우는 OB들을 뒤로 한 채. 아직 특권은 내 것이었다. 젊음이라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그 좋은 젊음을 멋지게 허비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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