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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고향을 찾아 그리운 얼굴을 만난다거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옛날 연인을 마주친다는 클리셰는 우리 이야기에 좀처럼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세대다. 일부러 우연을 가장하지 않고서 옛사랑을 만나기란 힘들다. 지나간 이들의 근황을 확인하는 법은 메신저 친구 목록을 스크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료한 날 보게 되는 프로필사진과 상태 메시지로 말이다. 물론 차단을 당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꼭 전 여자 친구들이 아니라도 생각나는 몇이 있다. 이를테면 5년 전 베를린에서 만난 한국인이 떠오른다. 친구들을 프라하에 남겨놓고 혼자 1박을 했었는데, 맥주 두 병과 다음날 조식을 얻어먹은 바 있어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는 호인이었다. 그는 호스텔 2층 침대의 1층을 썼었다. 그는 취리히의 비정부기구에서 일하는데 재계약을 기다리며 유럽을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유엔에서 인턴을 한 적도 있었다. 계약이 불발되면 어쩌실 거냐고 물었다. 얼마든 유럽에 다른 자리는 많다는 것 같았다.

그의 근황은 생각보다 간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성씨가 ‘ㄱ’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프로필을 보니, 한국으로 돌아와 투어 가이드와 ‘국제 행사 코디네이터’를 하고 있었다. 어쩐지 막연해 보이는 후자와는 달리 전자 쪽에서 일거리가 더 많으리라.

신입생 때 들었던 교양 토론 수업의 교수님도 있다.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준 분이라 기억에 남는다. 나는 매일 피로한 얼굴로 들어와서도 발표만 시키면 준비 없이 대강 임기응변을 해냈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빙교수라는 이름의 비정규직 강사였다. 2학년 때 별안간 그에게서 문자가 왔는데, 수업이 폐강 위기에 처했으니 후배나 동료들에게 홍보를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수업은 어쩐지 월요일 9시와 수요일 10시 30분처럼 전공수업이 빽빽이 들어찬 시간대에만 배정되었다. 필수교양이었음에도 서른 명 정원에 예닐곱 명만 신청하는 일이 잦았나 보다. 교수님은 결국 그 학기에 수업을 하지 못했다. 그의 최근 프로필 몇 장은 낚시나 등산을 하는 것이었고 여덟 번째 사진부터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사진이었다. 강의를 못하게 된 시점이 그쯤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몇 년간 고정되어 있는 상태 메시지 ‘Amor Fati’는 그대로였다. 그는 릴케로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 시대다. 4.7인치 화면만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어쩌면 예전보다 훨씬 더. 물론 프로필에 못난 셀카를 올리는 사람은 없으며, SNS 피드는 보기 좋은 구석만 편집해 올리는 곳이다. 그러나 정확히만 해석한다면 그 너머를 들여다보는 건 어렵지 않다. 풀파티와 페스티벌에 열중하던 친구들이 어느 날 더럭 신입사원 연수 사진을 올렸을 때 정말로 당황했다면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스쳐간 인연들의 침잠을 확인하고 씁쓸함을 느끼는 것, 그것만이 이 시대의 새로운 표상은 아니다. 오늘 인간관계의 시작과 끝은 모두 SNS 안에서 일어난다. 카톡 몇 줄로 오랜 인연을 종료하는 이별 통보나, 구(舊)남친 사진을 염탐하다 잘못 누른 ‘좋아요’로 파생되는 온갖 나비효과 따위는 흔한 것이다. 친밀의 형성, ‘인싸’와 ‘아싸’의 판별, 인연의 맺고 끊음 같은 것이 모두 인스타그램 안에서 일어난다. 재밌는 건 그 안의 가장 단순한 행동양식이다. 팔로잉과 언팔로잉. 이를테면 나를 팔로잉하는 것은 서로가 인간관계의 가장 넓은 동심원에 들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든 인스타 팔로잉 정도는 주고받게 된다. 하지만 언팔의 의미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누군가 팔로잉을 취소한다는 건 ‘당하는’ 것이다. 언팔은 단순히 나의 게시물을 보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꼬박꼬박 좋아요를 눌러주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상대방이 언젠가는 배신감을 느낄 걸 알고도 저지르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세대에서 언팔의 동의어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절연, 요즘 말로는 ‘손절’이다.

*

전말은 단순했다. 발단은 어떤 트위터 사용자가 유아인에 대해 평한 것이었다.

“20미터쯤 떨어져서 보기엔 좋은 사람인것 같다.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것 같음. 막 냉장고 열다가도 채소칸에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 있으면 가만히 들여보다가도 나한테 혼자라는 건 뭘까? 하고 코찡끗 할것같음

(이 글의 인용문은 모두 그대로 옮긴 것이다.)

유아인은 이렇게 반응했다.

애호박으로 맞아 봤음?(코찡긋)

이게 전부다. 다음날부터 유아인은 여성혐오 폭력남으로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누군가에게는 ‘한남’이자 여성혐오자의 상징이 되어 있다.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에 정리부터 하는 게 좋겠다. 먼저 유아인의 성격을 촌평했던 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불분명했다. 이것은 페미니즘 논쟁으로 이어질 일이 아니었다. 유아인의 반응이 보기에 따라 과격했다면 그것을 문제 삼으면 되었다. 며칠간 이어진 설전에서 그의 몇몇 발언이 문제가 되었지만 전부 유아인과 남성에 대한 혐오 표현에 응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인터넷에 날라지지 않고 발언만이 취사선택되어 옮겨졌다.

일단 ‘폭력’을 당했다는 것이 그 트위터 이용자인지 유아인인지 모호했다. 일단 그 트위터리안의 성별을 모르니 이것이 젠더 문제인지도 의문이었다. (익명의 트위터 이용자는 대부분이 여성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는가?) 그리고 유아인은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본인의 성격을 예단하는 트윗을 받아들었다. 무엇보다 애호박 트윗 이래 수천 명의 이른바 ‘페미니스트’들에게 모진 욕설과 혐오 발언을 들은 것은 유아인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를 불구대천의 여성혐오자로 부르며 ‘재기해라’ ‘자살해라’ 따위의 폭언을 하는 것이 더 인간에 대한 혐오로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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