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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솔직히 페미니즘에 대하여 말하려면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나는 대한민국이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를 앞두고도 남아를 선호하는 유교 근본주의가 만연했던 시기, 그런 문화가 가장 강했던 경상북도 시골에 할아버지가 살았다는 것, 하필 장남이었던 아버지, 보통 성깔이 아니면서도 그 성정을 죽이고 살아오는 게 당연했던 우리 엄마. 이 독립변수 가운데 하나라도 없었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신 나는 반 년 어치 유럽 생활비를 무람없이 보내 줄 부모를 갖지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서울 시내에 구할 자취방의 보증금을 지불할 수 없다.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용돈을 매달 보태 줄 수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누군가 권력의 한 편에서 우월하다는 이유로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면, 나도 부유한 부모가 있거나 편의점 알바를 해 본 적이 없는 누군가를 비웃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루아침에 집에서 쫓겨났던 트라우마가 있으며, 돈 그 자체가 모든 갈등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고, 그런 사람에게 두 번의 기회는 좀처럼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많은 경우, 나에게 닥친 불행을 가정사와 계급 탓으로 돌리고는 했다. 많은 경우의 많은 경우, 내가 노력하지 않거나 오래된 도피벽으로 기회를 놓친 결과였지만 말이다. 내 가족사와 가난 때문에 남성으로서의 원죄를 거부하거나 억울한 심정을 논리적으로 타당히 여기는 것은 유아인 사건이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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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성차별의 심연은 깊다. 페미니즘은 필요하다. 여성이 겪고 있는 차별은 실재한다. 마약 같은 자기연민을 지니고도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차별을 줄이기 위한 서비스나 제도는 흔하게 조롱의 대상이 되지만 잘 따져보면 타당한 구석이 있다. 백화점 입구와 가장 근접한 여성 전용 주차장, 지하철 여성 전용 칸, 임산부 배려석, 안심 귀갓길 같은 것들 말이다. (진정한 여성 인권 신장에 도움이 안 된다거나 범죄 예방 등의 실효성에 의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어두운 주차장에서 일어나는 범죄나 지하철 성추행, 범법촬영 같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대증요법이 필요하다.) 이런 게 인터넷에 회자될 때의 반응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그래서 지금 페미니즘이 왜 거부감을 일으키는 단어가 되었는지 알아내야 한다. 이 시도를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고 빈정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성주의를 주창하는 목적이 단지 싸움을 좋아해서이거나 단순한 정념 분출인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일단 계속 지적했듯 성별 문제와 다른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남자들을 적으로 만들 때 보이는 습성이다.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게 여성주의자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거악이 살아 숨 쉴 때만 정체성을 갖는 부류도 있으므로. 그러나 ‘옳지 않다’. 간신히 등록금을 충당하고 알바에 거의 모든 여가시간을 쏟아 붓고 물론 일베는 하지 않는 평범한 남자 대학생에게 가서, 그가 잠재적 범죄자이거나 남성의 임금이 여성보다 훨씬 높으므로 그 역시 여성을 착취하는 입장에 있다고 말해 보라. 그는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나온다. 실제로 남성이 여성보다 유의미하게 높은 임금을 받는다. 업종이나 학력, 나이 같은 다른 변수를 통제한 연구에서도 그랬다. 요컨대 20대 후반의 대졸 직장에서 대체로 8~9% 차이가 난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64%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는 익숙한 수사보다는 훨씬 덜한 사실이지만. ‘잠재적 범죄자’, ‘한남’, ‘냄져’ 같은 구호 때문에 이런 핵심이 가려지는 것이다.

정반대로 모든 일을 젠더 문제에 가져다붙이는 것도 문제다. 타워팰리스가 남근을 인유한다던 것은 미학적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재해나 재난 사건이 회자될 때, 피해자가 남성이라는 이유만 가지고 괴이한 논리를 만들어 조리돌림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망 사고를 ‘남성의 과시 문화가 만든 안전 경시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참아주기 힘든 것이다. 만일 이런 경향이 내가 주장하는 대로 자기연민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 마음 속 깊은 선한 본성과 거꾸로 간다는 건 분명하다.

이런 습관을 통해 우리 세대가 단순히 즐기던 것을 단죄하려는 경향도 있다. 이를테면 인디 밴드 ‘검정치마’는 아주 좋은 타겟이다. 그가 그리는 여성상이 피동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그의 노랫말을 두고 가해지는 이런 비판은 대개 취사선택을 토대로 한다. 그의 가사에는 ‘날 가지고 놀던’, ‘겁내지 말래도 어서 뛰어들라고 손짓’하는 여성도 있다. 이들도 수동적인가? 검정치마의 남성 화자는 보통 사랑을 갈구하고 여자의 사랑이 없으면 ‘숨도 쉬지 못하는’ 존재다. 이것은 수동적인 남성상인가?

그러나 이런 것은 그들의 논의 대상에서 전혀 배제된다. 음악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성차별적 코드가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연다는 면에서 그들의 시각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토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일단 단정을 짓고 죄를 따져 묻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나아가서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이들이 내뱉는 혐오 표현도 적지 않다. 일부 트위터리안들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기독교의 일부 이단처럼. 그러나 그들이 유아인이나 검정치마, <나의 아저씨>를 옹호한 유병재처럼 집단적 공격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점점 세력이 약해져가는 좌파정당의 당원으로 육 년간 당비를 납부해 왔다. 물론 나는 전국의 좌파들 가운데 가장 오른편에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나를 남녀차별주의자로 만드는 것보다는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가 남근이 달려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내 음악 취향이나 자연스러운 측은지심을 괴롭힌다면 내가 페미니즘을 싫어하게만 만들 것이다.

남자들이 여자 대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한남’ 같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쉽게 입에 올리는 광경을 보게 하라. 남성이라는 이유로 면전에서 그 얘기를 듣는 것은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남자들은 돌아서 남녀차별에 앞장서게 될 것이다. “남성인 게 정말 권력이라면 왜 그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지?” 실제로 남성이란 성별 자체가 권력이 맞는데도 이런 역반응을 부른다는 것이다.

젊은 남성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이성적으로는 동의한다. 그러나 20대 남자를 이제 와서 ‘쩨쩨한 남자’의 프레임에 가두는 40~50대 남성들(이건 오히려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이다), 우리를 너무나 쉽게 비웃는 또래 여성들에게는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 우리는 중년 가부장들이 가정에서 아내를 어떻게 대했는지 똑똑히 보고 자랐고, 여학생이나 여사원에게만 쿨하고 열려있는 척 하는 교수들이나 부장들을 질리도록 보아왔다. 군 복무를 쉬운 일로 여기는 또래 여자 친구들의 언행에 빈정이 상하거나, 좀 편한 아르바이트 공고를 찾았더니 ‘여성만 가능’이라는 문구를 발견하는 것도 예삿일이다. 이것은 절대 마음으로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페미니즘을 수용하는 데 내가 찬성이나 반대를 하려면, 내가 그러기 위해 어떤 행동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내 언행과 생각은 거의 모두 성차별의 결과에서 나왔을 테니까. 내가 가진 재미있는 것, 심각한 것, 추한 것, 예쁜 것에 대한 개념은 모두 90년대 중반에 태어나 베이비붐 세대의 양육을 받아 90년대 후반에 탄생한 사회적 분위기가 오래 지속된 매스미디어를 보고 자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양쪽의 견해를 공정하게 듣고 토론하는 것이다. 성별만이 아닌 다른 변수를 인정하고, 일베와 메갈리아에게서 선을 긋는 것이다. 집단적 조롱, 조리돌림, 악플, 낙인찍기 같은 그들의 행동 양식을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싸움은 그쪽과 벌어야 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갈등을 조장해서 수혜를 보는 편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검정치마의 가사가 여성혐오라고 확신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면 곤란하다. 그것은 음악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들과 페미니스트의 싸움 같은 구도로 비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검정치마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니까.

가끔, 어떤 이들은 남성들이 자살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남자들까지 성 대결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남자들은 자기연민이 제공하는 길로 도망칠 것이다. 만일 매우 빨리 도망친다면 그는 일베 쪽으로 갈 지도 모른다.   1  

1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그런데 우리의 노동계급 형제들은 우리가 그들을 환영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살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중산계급이 그 만남을 이런 식으로 볼 때 그는 도망친다. 만일 매우 빠른 속도로 도망친다면 그는 파시즘 쪽으로 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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