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휴가란 쉬기 좋은 때가 아니라 일하기 나쁜 때에 떼 지어 가야하는 것이다. 이 사진과 글은 2008년, 그런 휴가철을 거부하다 여름 끝에 다녀온 작은 섬, 그리고 어떤 사람과 이 세상에 대한 기억이다.

 

#1 <바닷길>

도시와 도시 바깥의 가장 큰 차이는 시야의 범위다. 별거 아닌 무엇이 얼마나 별거이며, 대단한 무엇이 또 어찌나 별거인가. 한반도를 내달려온 산맥이 바다에 풍덩 뛰어들며 남겨둔 보루, 즉 섬은 이만치 다가갈수록 저만치 멀어지곤 했다.

# 2 <섬-버스>

여러 섬에 들러 광주리를 허리에 낀 할머니와 상기된 관광객들을 내려놓은 섬-배의 풍경은 시골버스 같았다. 시골에선 세상이 좋아지면 버스가 들어오고, 세상이 더 좋아지면 버스노선이 없어지곤 했다.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좋아져 매일 오가는 여객선이 생겼고, 다리가 놓인다거나 하여 세상이 더 좋아지면 노선이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좋아진다는 말에는 세상이 바뀌고, 버스나 여객선으로 실어 나를 사람이 줄어든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예전 시골 버스정류장들을 이어놓으면 그려지던 별자리가 바다에도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3 <이순신>

승객들이 이물과 고물을 오가며 짙푸른 파도를 구경하고 있는 여기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에 벌어진 한산해전을 비롯하여 이순신 함대와 일본 해군의 격전이 벌어진 바다이다.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00원짜리 동전뿐만 아니라 지금은 볼 수 없는 500원짜리 지폐를 거북선과 함께 장식했다. 역시 지금은 볼 수 없는 5원짜리 동전도 거북선의 것이었으니, 가히 이순신은 화폐통제사였다. 과연 그는 자신이 돈의 모델이 된 것에 기뻐할까?

#4 <원균>

후배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야 했던 장군, 이순신과의 불화, 이순신의 파직, 그러나 자신도 원하지 않았던 전투, 남해를 장악했던 조선 대함대의 전멸, 그 궤멸의 책임 지휘관, 그리고 어느 무인도 작은 나무 아래에서 홀로 맞이했다는 최후, 기록한 자와 기록하지 않은 자의 승패, 그로 인한 후대의 평가. 원균의 마지막 장면을 상상해보면 어떤 회환이 서리고 어딘지 운명적이다. 또한 이순신이 될 수 없는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기도 하다. 사뭇 감상적인 어조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동반자는 물었다. “그 때 원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5 <착륙>

한 시간이라니! 물길은 흙길만큼 시간을 쉬이 덜어주지 않았다. 사방이 모두 열린 것처럼 보여도 배가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는데다 여객선은 침착하게 속도를 지켰다. 시골버스가 정류장을 거치듯 여러 섬에 들러 사람들과 보따리들을 내려놓았고, 항구를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으로 보던 바로 그 모습과 너무 비슷한 모습에 놀라며 짧은 보폭으로 걸음 하나를 내딛는 순간, 짧은 사다리를 내려와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는 닐 암스트롱의 감회를 떠올릴 겨를도 없이, 이 섬에 당도하고 말았다.

#6 <배울 것 많은 식물>

건강과 환경을 생각한다는 취미생활을 위하여 고가의 자전거와 장비, 고가의 등산용품들과 에베레스트에 오를 때나 입을 법한 옷, 심지어 차라리 편안한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은 고가 캠핑세트를 장만하고 뿌듯해 하는 유행을 보면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마저 산업이 된 시대일수록 ‘촌사람’ 마인드가 필요하다.

#7 <그런 이들은 보지 못한 풍경>

사람들을 빨아들인 마지막 배가 떠난 다음 순간, 섬과 선착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고작 반나절 동안 휙 둘러보고 떠난 그들은 머물면 머물수록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질 섬과 간단히 작별을 고해버릴 정도로 부지런했다. 낙오된 방랑자, 혹은 떠들썩하게 놀던 손님들을 떠나보낸 집주인이라도 된 양 한적함과 쓸쓸함이 뒤덮은 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설 자리라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8 <동백나무 터널>

동백나무 터널이 끝나는 출구 너머에서 햇빛이 손짓했다. 그 곳에 먼저 도달한 여인의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마법의 세계로 통할 것만 같은 동백나무 길을 나서자, 바다 같은 하늘과 하늘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9 <눈부신 섬>

도심 시위는 극렬해도 젖은 몸을 말리며 귀가할 때 사는 동네는 평화롭다. 병원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상이고, 자신의 고통을 남이 몰라주듯 자신도 남의 고통을 모른 채 살아간다. 이것이 세상이란 걸 알게 되는 과정이 여행이고 삶이다. 낯설고 조용한 여행지는 자신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상이고, 이미 죽은 후의 세상에 불쑥 들어가 보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 날 밤의 섬 하늘은, ‘별이 쏟아질 것 같다’ 정도의 상투적인 표현으로는 어림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빅베이비드라이버, <A Line in the Sky>, [5th anniversary Electric Muse 5](2012)

아름다운 해변을 떠올리며 어떤 노래가 어울릴까 생각하다 한국 인디레이블에서 나온 이 곡으로 결정한다. 하늘과 수평선이 만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듣기에 좋고, “A Line in the Sky”라고 속삭이는 부분은 나른할 정도로 평화롭다. – 빅베이비드라이버는 근래에 신작 [사랑](2020)을 발표했다. 고양이 집사라면 이 앨범을 꼭 보고, 들어야 한다.

도노반(Donovan), <Epistle to Derroll>, [For Little Ones](1967)

파도소리로 시작하는 이 아름다운 노래에는 깊고 푸른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가 등장한다. 밴조 연주자 데럴 아담스(Derroll Adams)를 추모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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