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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1.

 

어떤 사람은 밥솥 같다. 풍선은 누르면 터지고, 냄비는 불 위에 조금만 오래 둬도 탄다. 하지만 밥솥은 열과 압력에 멀쩡하다. 터지지 않는다. 수증기를 빼 주는 추가 있으니까.

둘 중에 하나다. 열과 압력을 견뎌 내거나, 적당한 시점에 스트레스의 줄기를 어딘가로 돌려놓거나. 진실이 뭐든 폭발하지 않고 맛있는 밥이나 해내면 그만이다.

 

상수동의 쓰리룸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날, 가장 마지막으로 옮긴 짐은 형들의 전기밥솥이었다. 빨갛고 동그랗게 앙증맞지만 용량이 제법 컸다. 결코 가볍다곤 못 할 밥솥이었으나 겨드랑이에 끼고 나른 밥솥은 아주 가볍게 느껴졌다. 장롱 두 개를 옮기는 데 두 시간을 소모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짐이랄 게 없는 수준이었지만 몇 년 자취를 하다 살림을 합치게 된 형들은 아니었다. 용달차는 길고 좁은 골목 초입에 짐을 부려놓고 떠났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셋이서 온 힘을 다해야 겨우 허리 위로 들 수 있는 장롱 두 짝이 문제였다. 바퀴가 달린 사무실 의자에 장롱을 아슬아슬하게 걸쳐놓고 밀고 끌었다. 골목을 건너가는 동안 하수구 뚜껑에 바퀴가 걸리고, 앞에서 균형을 못 잡아 장롱이 쓰러질 뻔도 했다. 1층 현관에 도착하니 3층까지 이 물건을 올리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덩치가 컸던 우리에게 오래된 다세대주택 계단은 몸뚱이 하나 구겨 넣기에도 좁았다. 계단참이 나올 때마다 짐을 내려놓고 각도를 비틀고 손이 난간에 찧기고 숨을 몰아쉬는 걸 몇 번 거듭했다. 장롱을 가장 큰 방에 밀어넣고 나니 또 다른 형이 쓸 또 다른 장롱이 남아 있었다. 요령이 생겼지만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까닭에 시간이 더 걸렸다. 아직 쌀쌀한 삼월 말, 검은 후드티 밑에서 땀이 비오듯 했다.

 

이사가 대강 마무리되고, 형들은 집에서 가져온 보리를 섞어 밥을 했다. 반찬으로 뭐가 놓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갓 지은 밥 냄새만은 선명하다. 구옥의 쿰쿰한 곰팡내를 씻어내는 단내였다. 과일의 달콤함과는 다른, 어린 날 저녁께를 떠올리게 하는 그 익숙한 달큰함.

밥을 한 술 떴는데 이물질이 씹혔다. 쌀겨인가 했는데, 검은 깨처럼 생긴 것이 아주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것만 골라내고 다시 한 숟가락을 떴다. 이번에는 단단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모래가 되어가는 작은 돌, 같았다.

앞으로는 그냥 햇반을 사먹기로 했다.

 

2.

 

언제부터인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는 지역부터 묻는 버릇이 생겼다. 어느 동네가 나오더라도 대강은 아는 척을 할 수 있다. 몇 년간 과외 자리를 주는 곳은 어디든 마다하지 않은 덕분이다. 정작 서울에 살지도 않으면서.

학원을 합쳐 세어보니 열한 동네, 자치구로는 여섯 개. 그만한 경력으로 이 대도시의 모든 곳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 가지 경우의 수를 벗어나는 지역은 별로 없다. 과외를 하던 동네거나, 그 옆 동네거나, 옛 여자친구들이 살던 곳이거나. 목동이요? 몇 단지 쪽이세요? 제가 3단지 쪽 학원에서 일했었어요. 어, 창동 사세요? 저 중계동에서 과외 했었는데. 연희동 살아요? XX 아세요? 거기 규동 진짜 맛있는데. 어떻게 아냐고요? 예전에… 예, 그랬었네요.

상수동과 그 일대가 나오면 이따위 주접이 더욱 강렬해진다. 합정 샐O디 아세요? 거기 리코타치즈샐러드를 꼭 먹어봐요. 상수요? 몇 번 출구 쪽이요? 4번 출구 앞에 버X골에서 한 번 스쳤겠는데. 자연 마포구와는 연고가 없어 보이는 나에게 되물음이 날아들고는 한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아, 거기 잠깐 살았어요.”
“자취하셨어요?”
“그런 셈이죠…”
“그런 셈?”
“남자 셋이서 고양이 네 마리 데리고 살았거든요. 그것도 자취라면…”
“학교랑 멀지 않아요?”
“한 시간은 걸리죠…”
“그런데 왜 상수동에서 자취하셨어요?”

꼭 전 연애를 생각할 때만 말꼬리가 흐려지는 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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