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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5.

 

답답한 마음에 그냥 뭐 하고 삽니까, 그런 전화였다.

뉴캐슬 팬 사이트 정모에서 알게 된 S였다. 그전 여름 과외에서 돌연 잘린 뒤 20만 원을 선뜻 빌려준 형이었다. 그즈음에는 뷰티 분야 스타트업의 창업주가 되어 있었다. 그날도 구구절절 내 넋두리했다. 나는 얘기하고, 형은 들어주고. 언제나 그랬다. 나는 좋지 못한 근황이라면 무슨 일이건 좀처럼 주변에 말하지 않는 편이었다. 좀 힘에 부친다, 또는 힘들다, 이런 생각이 들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게 꺼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내심은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그런 내게 유일한 상담 창구였고, 자기중심적인 –그리고 별로 효과적이지 않은-은유로 말하자면 압력솥의 하나뿐인 배출구였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힘들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내가 누군갈 힘들게 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럼 누가 누굴 힘들게 하고 있단 말인가?

자기연민을 빼고 바라보면 우리의 힘든 일이란 실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객관적으로도 정말 어려운 일이라면 원인과 책임이 통상 나에게 있기 마련이었다. 힘든 일을 맞닥뜨릴 때 그게 전자에 해당한다면, 진실을 멀리하고 혼자서 고난을 감당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자기연민이란 마조히즘은 인생을 견뎌내는 힘을 주니까.

후자일 때도 가까운 이들에게 속을 털어놓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친구들이나 여자친구들에게는 쪽팔려서였고, 부모님에게는 어차피 해결될 일도 아닌데 속이나 썩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극이 엎어졌고, 광고 공부는 손에 안 잡히며, 오래된 근성이 또다시 솟아나 고립되는 와중에 남들 다 하는 알바 하나 제대로 못 구하는 것. 이 주제들은 전부 내 책임이 과반을 넘었다. 나는 내 능력 부족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남 탓 못하는 푸념에 스스로 찔리기도 싫었다.

하지만 S형은 내가 ‘힘든 일’, 말 못 할 일에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형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사이였지만 왜, 어떤 경우엔 절친보다 치부를 더 많이 공유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인간관계의 동심원에서는 조금 바깥에 있지만 그런 말이 술술 터져나오는 사람. 그 형이 그랬다. 혼자서 어려움(또는 자기연민)을 삭이다 못해 찾게 되는 존재. 그러니 그는 압력이 절정에 이를 때 수증기를 빼 주는 고마운 사람이던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 회사에서 인턴을 하면 어떨까? 그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S 특유의 말투가 있었다. 이러저러하니 이렇게 하면 어떨까, 너에게도 좋지 않을까? 내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형을 알게 된 후 십 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내가 나름대로 영상 이론을 배웠고(학부에서 촬영 기초를 배웠다), 역시 나름대로 기획 공부 경험이 있으니 본인 회사에서 마케팅 인턴을 하라는 것이었다. 피부과 홍보 영상의 촬영과 편집, 그리고 뷰티 정보를 제공하는 SNS 페이지 관리 따위를 하면 되었다. 공강날에 오든 수업을 마치고 오든 자유, 그리고 최저임금 보장. 하나 더, 서울에서 같이 살면 어떨까? 본인도 풍족하지는 않은 살림이니 또 다른 창업주와 살림을 합친다고 했다. 쓰리룸을 구해보자, 네가 거기 들어와서 한 달에 20만 원만 내는 게 어떨까? 우리도 좋고 너도 좋지 않을까?

그들이 좋은 바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형은 내가 몇 년 동안 절실하게 원하던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통학 생활과 고질적 빈곤 때문이었다. 둘 중 무엇이 각각 인과라고 잘라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루에서 집에서 자는 시간과 음주로 밤을 보내는 시간, 광역버스로 집과 서울을 오가는 시간이 거의 비등하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였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는 두 가지 결핍.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고 결과가 되는 이 망할 결핍. 그것을 한꺼번에 해소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우리는 같이 살기로 했다.

 

6.

 

이태원이 그렇게 기막히게 높은 언덕을 뒤로 만들어진 동네인 줄은 몰랐다. 보광동의 쓰리룸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은 아주 가팔랐다. 부동산 중개사는 야트막한 큰길 오르막을 지나 난간 없는 골목의 계단을 세 번이나 갈아타야 나타나는 집을 보여줬다. 뜻밖의 고난도 런지를 거듭하며 덩치 큰 남자 셋의 숨이 가빠졌다. 기민한 중개사 아주머니는 뒤돌아보며 웃었다. “건장하신 분들이라 이 정도 오르막은 다닐 만 하시죠?” 아니요… 편한 길만 다니니까 살이 찐 거죠…

신기했다. 오를 때는 이십 분이던 게 내려올 땐 오 분이나 걸렸던가. “보세요. 내려올 땐 금방이죠?” 그러나 모르는 소리. 몸뚱이가 크면 클수록 내리막에서 헛디뎠을 때 굴러가는 비거리가 길다. 어디가 부러질 확률도 비례해 오른다. 그 집을 단념한 것은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에서였다.

중개 어플리케이션으로 봤을 때는 그냥 ‘공기가 좋고 리모델링해 깨끗’이란 설명이 전부였다. 방 세 개, 1000/80.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충족하는 서울 시내의 흔하지 않은 집이었다. 몇 번의 실패와 강북 미개발지 탐험 끝에 희망을 안고 간 곳이기도 했다. 턱없이 높은 기준으로 집을 구하다 보니 우리는 재개발이 미뤄지는 낡은 주택가의 구옥을 보러 다니고 있었다. 신길, 북아현동, 보광동이 그랬다. 그렇지 않으면 높은 언덕에 위치한 곳이었다. 충정로, 청파동, 만리동이었다.

주제에 집을 까다롭게 고른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본 집들은 사진으로도, 그 밑에 달린 중개사의 설명으로도 그럴싸한 곳들이었다. 그러나 서너 번 방을 본 뒤로 중개 어플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꼭 허위매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경치가 좋다 = 집이 언덕에 있다
야경이 멋지다 = 집이 언덕에 있다
산책하기 좋다 = 집이 언덕에 있다
주변에 편의점이 있어 편리 = 편의점이 동네의 랜드마크
지어진지 좀 되었지만 = 준공년도가 1976년
공간 활용 괜찮습니다 = 좁다
혼자 살기 최고 = 매우 좁다
금액 대비 상태 양호 = 각오하고 보러 와라
1층 같은 반지층 = 계단 위에 변기가 있지만 어쨌든
버스정류장이 가깝다 = 근처에 지하철역이 없다
교통이 편리하다 = 근처에 지하철역이 없다 (‘지하철역 5분’ 같은 구체적 언급이 없다면 대개 이런 경우다.)
남자분이면 괜찮다 = 후미진 골목길이나 가파른 오르막인데다 지은 지 오래되었으며 화장실 타일도 몇 개 떨어져 있지만, 그 정도야 무던하게 지낼 사람을 찾는다 (못 믿겠다면 당장 직방을 켜서 용산구의 구옥들을 검색해보라. 다섯에 하나는 그런 집에 그런 설명이 나온다.)

가장 기가 찼던 것은 ‘마을버스 종점 인근이라 교통이 편리하다’였다. 야 정말 미친놈들인가? 싶었지만 이 정도면 솔직한 축이었다.

 

상수동의 쓰리룸은 우리가 본 마지막 집이었다. 공인중개사들의 이런저런 감언이설을 물리치고 서울 이곳저곳을 오르락내리락한 끝에. 거짓말처럼 좋은 조건이었다. 말도 안 되는 보증금과 월세에 부합하고 언덕에 있지도 않으며, 형들이 차를 댈 수 있는 공간과 내가 탈 지하철역이 가까운 곳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조용한 술집과 심야식당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던 골목이 집 앞이었고 거기서 십 분만 걸으면 한강으로 나갈 수 있었다. 조금 오래되었고 비슷한 방향에 있는 K대 경영관의 스타트업 사무실과 우리 학교까지 조금 멀긴 했다. 그러나 예전을 생각하면 이만한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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