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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7.

 

K대 경영본관의 공유사무실에 출입증을 찍는 날들이 이어졌다. 상수역에서 6호선을 타고 가는 날도 있었고, 학교를 마치고 들러 형들과 함께 퇴근하는 날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즐거웠다.

처음 출근하자마자 건네받은 건 명함이었다. ‘마케팅 인턴’이란 직함과 이름. 그 위에는 내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증명사진에서 따온 깔끔한 곡선이었다. 뒷면에는 회사로고가 빗살 모양으로 연속해 배열되어 있었다. 텍스트만 덜렁 있는 평범한 명함이었어도 감읍했을 터, 너무 예뻐서 말을 잇지 못했던 기억이다. 회사 일을 전담하는 디자이너가 무료로 만들어줬다고 했다. 놀랐다. 이것이 청년 사업가들의 연대, 뭐 그런 건가? 누끼만 딴 거라지만 그래도 품 없이? 나중에 듣기론 그에게 일 년 동안 준 어플리케이션 디자인 비용이 회사 전체 지출의 절반이 넘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창업의 세계는 그런 것이려니 했다. 그래, 예쁜 게 중요하지.

어쨌거나 그 명함을 케이스에 끼운 목걸이 출입증으로 출근하면 되었다. 2층의 절반을 통째로 쓰는 스타트업 캠퍼스엔 모두 여덟 개 업체가 있었다. 데스크가 네다섯 개 모여 있으면 회사 하나. 사무실을 가로질러 작업용 아이맥이 놓인 우리 데스크에 앉아 있노라면 치열한 사회인 세계의 중심에 있는 듯 했다.

물론 앉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날은 바쁘게 흘러갔다. 뷰티 분야 어플리케이션의 선두주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고객은 피부과 예약과 화장품 구매를 하고, 병원은 홍보를, 기업은 상품 판매로 수익을 낼 것이었다. 사업계획서의 분석대로라면 규모가 몇 조원이나 되는 잠재적 시장에서 일등을 하기에 우리가 아주 작은 회사란 걸 몰랐던 건 아니다. 하우스 메이트 형 둘, 마케팅 담당 여성 대표, 그리고 인턴 하나로 된 스타트업. 그러나 출근 첫날 S형에게서 우리의 비전을 듣고 나니, 그것은 정말 실현 가능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경쟁자들의 허점은 명확하고, 우린 그 허점을 채운 완벽한 플랫폼이 될 것이었다. 형이 말하는 경쟁자들이 이미 스타트업 수준을 훌쩍 넘어선 중견 업체들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으나, 이미 웅장해지는 가슴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뷰티 분야 앱의 TOM(Top Of Mind)가 되려면 해야 할 것이 많았다. 한 목표를 향해 함께 뛴다면 정말 가능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했었다.

 

첫 과제는 앱에 접근할 수 있는 고객을 유치하는 거였다. 피부과 병원의 홍보 영상을 찍어주고 그 영상을 독점 공개하는 아이템을 시도했다. 고객들이 우리 앱을 통해서만 피부과를 선택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S형의 친구이기도 했던 또 다른 대표 형은 화장품으로 유명한 기업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었다. 그 인맥이라면 분기 내 예닐곱 군데 정도는 금방일 거라고 했다. 정말로 머지않아 첫 영상을 찍을 피부과가 섭외되었다. 피부과에서 원장을 인터뷰하고 그 영상을 편집했다. 병원이 여는 평일 낮이었고, 그래서 수업은 빼먹었을 것이다.

결과물은 그저 그랬다. 전공 수업을 가르친 촬영 이론 교수님은 그저 그런 분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저 그런 태도로 수업을 들은 바 있었다. 딴에는 몇 번 경험을 거치면 점점 나아지리라 생각했으나 창업주들이 자신했던 피부과 인맥은 한 군데가 끝이었다.

아쉽지만 다른 일도 많았다. 주말에는 회사가 참여한 창업 스쿨에 참석해 중견기업 회장이나 청년 사업가들의 강연을 들었다. 창업 스쿨의 커리큘럼을 마치고 우수한 팀에게는 경쟁 PT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순위에 들면 상금과 지속적 지원사업에 참가할 기회를 준다고도 했다. S형은 발표까지는 갈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으나, 석 달 뒤 일정이 모두 끝나고 우리에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사실, 지금 그 경험은 내용보다는 이런 느낌으로 기억된다- 역시 목걸이 사원증을 걸고 유명한 회사의 깨끗한 강의장에서 케이터링 메뉴로 나온 드립 커피와 로투스 과자를 씹는 것.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평일 사무실에서는 여성 대표와 함께하는 일이 더 많았다. 어플리케이션 런칭 전 페이스북 홍보 페이지를 개설하고 카드뉴스를 만들었다. 그녀와 20대, 3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콘텐츠를 만든다고 애를 썼다. 서로 낄낄거리던 기억이 선하다. 31세 직장인 여성의 에피소드로 카드뉴스를 만드는데,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무료 이미지는 흑인과 백인이 섞인 외국인밖에 없었다. 흑인 여성의 얼굴 밑에 ‘김영미(31)’이라는 텍스트를 달고 보니, 우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형들이 출근했다. 형들은 생계를 위한 다른 부업을 해야 했거나 때로는 그냥 게을렀다. 서너 시에 도착한 형들은 담배를 피웠다. 같이 나가 바람을 쐬고, 매점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돌아와 일한 것을 브리핑하면 저녁때였다.

작은 회사라는 건 단순히 인력이 부족하거나 사무실을 남들과 공유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사업에 필요한 자금이 궁하다는 의미였다. 그 덕에 우리는 어플리케이션 런칭 따위의 일들을 접고 일단 정부나 기업의 지원금 사업에 매달렸다. 인턴인 나까지 기획서를 붙잡고 PPT로 내용과 디자인을 수정했다. 어쩌랴, 우린 스타트업이니까. 오히려 그런 환경이 나를 들뜨게 했다. 우린 한 목표를 향해 함께 뛰고 있으니까! 사업계획서에 적힌 시장 규모는 수조 원, 내년 말 예상 매출액은 수억 대였다. 어찌 들뜨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다 보니 봄부터 초여름까지가 훌쩍 지났다. 치열하게 산다는 것, 정확히는 치열하게 사는 ‘느낌’. 이것이 지난겨울까지 있던 어두운 면을 가려주고 있었다. 연극 실패, 인간관계에서 저지른 똑같은 실수 같은 것들 말이다. 어딘가 두루뭉술한 예감은 있었으나 나에게는 무엇보다 구체적인 사물이 있었다. 아이맥, 드립 커피, 명함, 목걸이 출입증, 상수동의 자취방.

 

 

8.

 

 

밥이란 모름지기 맛이 있어야 한다. 뚜껑을 열어봤을 때 그럴싸한 걸로는 모자라기에 하는 말이다. 쌀을 대충 씻어도 첫 냄새는 달아서, 희뿌연 훈김의 세례 속에서 쉽게 황홀하기 쉽다.

스물네 살의 봄이던가, 여름이던가. 사람들과 조금씩 멀어져 왔다는 걸 실감하던 어느 날 누군가 해준 말이 있다.

“밥 한 술을 떴는데 돌이 씹혔다고 하자. 그럼 그걸 빼고 다시 먹겠지? 그런데 두 번째 숟가락을 떴는데 또 뭐가 씹혔어. 이제 어떻게 할까? 그 밥솥은 그냥 버리는 거야. 밥솥에 돌보단 밥이 더 많아도, 그냥 버린다고.”

내 밥솥에 든 건 정말 무엇인가, 이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제대로 된 밥을 짓고 있었을까.

지금에야 생각하면, 남들이 나라는 밥솥을 포기하는 시점이 있었던 것 같다. 돌멩이가 정말 두 개밖에 없을 수도 있는데, 날 얼마나 잘 안다고? 그렇게 돌이 얼마나 들었을지 남들은 알 수 없는 밥솥을 사수해선 안 되었던 것 같다. 다시 쌀을 박박 씻고 밥을 안쳐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나는 상수동이라는 새로운 동네와 스타트업이라는 탈출구로 김을 확, 빼내 버렸다.

스물세 살이었다.

 

9.

창작극이 실패하고 몇 달 뒤, 그 소식을 들은 예전의 연극 선생님이 대본을 한 번 보자고 했었다. 그러고는 하루 뒤엔가 나에게 건네준 얘기가 기억난다.

“의외다. 네가 사람 사이의 대화를 잘 못 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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