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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8.

열흘 뒤, 공덕오거리로 스타벅스 파트너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평소에 스타벅스를 자주 이용한다면 이유가 있을까요?”

“와이파이가 정말 잘 되더라고요. 노트북 하러 자주 갑니다.”

이따위 대답으로 합격을 했다는 게 용했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버스에서 조는데 진동이 왔다. 끊기기 전에 전화를 허겁지겁 받았다. 칠월이 되자 결국 휴대폰이 정지되었고 수신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교통카드와 휴대폰 요금이 모두 밀렸고 동시에 갚을 길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명제에 직면했다. 무직의 23세 휴학생이 사람 구실을 하는데 휴대폰과 교통카드 중 무엇이 더욱 필요한가? 바꿔 말해 둘 중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마침 주제넘은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째였다. 그렇지만 나는 휴대폰을 단념했다. 발신자는 내 ‘사수’였던 스타트업의 여성 대표였다.

 

유월 말일, K대 캠퍼스의 사무실 계약 기간이 끝났다. 우리 회사는 지원 사업은커녕 다음 사무실도 구하지 못했다. 상수동이 임시 오피스가 되었다. 쓰리룸의 거실에는 안 어울리게 거대한 적갈색 중역용 데스크가 있었다. 쓰리룸에 입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주워온 것이었다. 집 앞 골목에는 뮤지션들의 아지트로 유명한 Y카페가 있었다. 그 앞에 버려진 것을 발견하고 셋이 이고 왔었다. 책상에는 의자가 네 개 딸려 있었다. 이건 합정역 근처 빌딩 앞에 버려진 것이었다. 멀쩡한 물건이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형이 곧장 차를 끌고 나타났다. 무거운 책상을 밀고 끌 때나 의자를 자동차에 테트리스 하듯 구겨 넣을 때나 우리는 킬킬거렸었다.

K대에서 뺀 짐과 사무용 컴퓨터 따위를 그 책상에 갖다 놓았다. 사무실이 된 쓰리룸에 ‘출근’한 여성 대표는 아연했다. 이유야 안 물어도 뻔했다.

우리는 결국 파주에서 한 푼도 벌지 못했다. 기껏 리플렛 1,000장을 인쇄했는데 S형은 학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다른 일을 권했다. 여느 날처럼 집 앞을 산책하던 밤이었다.

“우리가 피벗1을 할 거야. 당분간은 마케팅 인턴이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새 아르바이트를 구해보면 어떨까? 여의도나 공덕의 외국계 회사에서 어드민을 많이 구하거든. 사람인이나 잡코리아를 찾아보면 돼. 그걸 알아보면 어때? 월급도 센 편이고 집에서 다닐 수도 있고.”

이로써 인턴 생활이 끝났다. S형의 회사에서 인턴 노릇을 하는 게 어려울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따질 새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방적인 해고 통보였지만 그때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형이 새로운 일로 화제를 돌린 덕분이다. S형 특유의 화법이었다.

“그게 뭐에요? 제가 졸업자도 아닌데 사무보조도 아니고 그런 게 될까요?”

“아니야. 어차피 비정규직이라서 수시로 구해. 일이 어렵지도 않고.”

상대방이 잘 모르는 일을 모호하지만 자신 있게 권하는 것도 형의 화법이었다. 스타트업도, 파주 학원도, ‘어드민’도 그랬다. 형 말대로 사람인과 잡코리아에서 채용공고를 확인했다. 나에게는 지원 자격조차 없었다. 어드민이란 직종은 단순 사무보조가 아니라 관리직이었다. 스타트업 인턴 경력이 전부인 대학생을 채용하는 곳은 없었다. 현실을 파악하자마자 중소기업 사무보조와 프랜차이즈 카페 아르바이트로 눈길을 돌렸다.

된다더니 이게 뭐야? S형이 권한 건 정말 하나도 되는 게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형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가능성 없는 분야에서 시간을 낭비한 건 그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을 선택한 건 나였다.

 

지금도 그 형을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누군가는 이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가스 라이팅’이라고 평했다. 그 여성 대표였다. 나에게 전화하는 일이 거의 없던 이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라기에 대단히 긴장했었다.

“용규씨, 집 청소를 잘 안 하나요?”

저요?

“빈도로 따지나 들인 시간으로 따지나 제가 제일 많이 하죠. 그런데 요즘에는 수원에 있을 때가 많기는 해요. 그런데 청소해봤자 하루 이틀 만에 고양이 털이 풀풀 날려서…”

“그건 너무 잘 알아요. 얘기를 듣다가 보니 좀 이상해서요.”

버스에서는 내린 지 오래였다. 전화를 끊고 보니 통화 시간은 두 시간이 넘었다. 첫 한 시간 동안 들은 건 S형이 나에 대하여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들이다. 그 대표는 나에 대해 부정적 감정이 생길 뻔했다고 했다. 집 청소를 잘 안 한다, 본가에 내려가서 잘 오지도 않는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파주 학원 일에 대해 무책임하다, 인쇄하자고 돈을 달라는데 자기 돈인 양 한다… 다 본말을 자른 얘기들이었다. 그녀에게 처음부터 곡절을 다시 설명해야 했다.

두 번째로 들은 건 형의 개인사에 관한 기막힌 거짓말들이다. 인턴을 시작할 때쯤 회사를 나간 여성 창업주와 얽힌 것인데 그 내용이 너무 민망하고 한심해서 여기 옮길 수도 없다. 그다음은 형이 회사 구성원들에 관하여 이런저런 뒷담화를 했다는 것이다. 앞뒤가 다른 것이야 그렇다 해도 사실이 아닌 것을 퍼뜨리는 것이 문제였다. 여성 대표에게 내 얘기를 하던 것과 똑같이. 대상은 주변의 여러 사람이었고 거기에는 예전의 여성 창업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타트업에 남은 여성 대표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S형이 전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다. 대표가 나에게 연락한 것은 형이 전하는 내 이야기도 그랬으리란 짐작 때문이었다. S형을 거치면 사실도 말도 왜곡되었다.

마지막으로 공유한 건 내가 느낀 걸 그녀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뭔가 이상한데 S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 그래서 잘못된 건 스스로라고 여기게 되는 것.

그동안 S형 탓을 누르고 있었던 건 그가 최소한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게 아니었다. 형은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는 상사도, 믿음직한 동료도, 온전한 인간도 아니었다.

어느덧 강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일곱 시였다. 햇빛이 아직도 창창했다. 지겹도록 기나긴 여름이었다.

 

얼마 안 되어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녀가 업무 톡 방에 남긴 작별인사에 S형은 아주 예의 바르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옛 여성 창업주에게 보낸 카톡이 이랬다.

-아웃.

메시지 캡처를 봤다. 그녀가 대표에게, 대표가 나에게 차례로 보내준 것이다. 그때 나는 기분이 어땠을까. 배신이나 원망 같은 감정은 전화할 때 다 쏟아냈었다. 형이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주제넘지만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은 슬펐던 것 같다.

계속

 

1 사업 아이템을 바꾸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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