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하거나 특별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_산골 농부 서정홍의 ‘그대로 둔다’>

길을 찾아 헤매다 산골 농부가 되었다는 서정홍의 시집, <그대로 둔다>. 천천히, 느리게 보았습니다. 찬찬히, 마음에 담았습니다.

어제와 같은 길이지만

어제와 다르고

어제와 다른 길이지만

어제와 같은 길을

나는 걷는다

시시하거나

특별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길’이라는 시를 만났을 땐 뭔가 조금 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산골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만 같았거든요. 시시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고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한 장 두 장 넘길수록 아, 역시 다르구나, 깨닫습니다. 농사일, 마을살이, 자연을 가꾸고 보듬는 정성과 마음까지 제가 감히 따를 수 없는 삶의 경지랄까요, 그런 걸 느낄 수 있었거든요.

특히 산골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보면서는, 울컥하기를 여러 번 했어요 5년 넘게 살면서도 여전히 다가서기 어렵기만 한 우리 마을 할머니들이 자꾸만 떠올랐거든요.

요양원은 살러 가는 데가 아이고 죽으러 가는 데 겉애. 배골띠기 할마이는 요양원에 드갔다가 보름도 못 넘기고 택시 타고 내뺐다 아이요. 혼자 살다가, 혼자 시상 베린다 캐도, 집에서 죽고 싶다꼬. 구십 펭상 택시비가 아까바서 택시 한 번 안 타 본 사램이 배골띠기 아이가. 그런 배골띠기가 요양원에서 달아날 끼라꼬 누가 생각이나 했겄노, 그것도 택시를 타고. 그 이바구로 듣고 마을 사램들이 얼마나 배꼽 잡고 웃었는고 아나? 하도 구슬파서 웃었겄지. 하모하모, 사램이 웃는다꼬 쏙까지 웃는 거는 아이지.

_‘슬퍼서 웃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 시를 보다가는 막 눈물이 날라캐서 보던 시집을 그만 내려놓았어요. 가슴 삭삭 쓸어내리면서. 시간이 지나 다시금 시집을 펼쳤는데요. 또다시 아….

“셋방살이에 어렵고 힘들게 키운 아들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아가씨 손을 잡고 혼인을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잘 생긴 아들이 무엇 하나 모자람 없는 아들이 (부모 눈엔 다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무슨 인연이기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과 한평생 살려고 한단 말인가?

아버지, 다음 달에 혼인식을 올리려고 합니다. 아내 될 사람이 비록 앞은 잘 보이지 않지만 어느 누구보다 성격이 밝고 착해요 제가 한평생 ‘눈’이 되어 살겠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남자든 여자든 착한 사람 만나 사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앞이 캄캄했습니다”

_‘마음에 들어가서’ 가운데서

눈이 불편한 며느리를 맞이하며 요동치는 마음을 누르고 또 누르며 시로 담아냈을 이야기들이 열여섯 편에 걸쳐 이어집니다. 왠지 아프고 서럽고 슬프고. 그럼에도 희망과 사랑을 새록새록 피워 내는 시인의 마음. 참으로 솔직하기에, 진실하기에 더욱 감동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시였습니다.

 

‘농사지으며 노래하는 이가

농사지으며 시 쓰는 이에게’

이런 제목으로 시집 뒤에 나온 ‘건네는 말’도 새로웠어요. ‘시 해설’이 아닌, ‘시 느낌’을 담은 시집. 서정홍 시집과 참 잘 어울렸답니다.^^

흐뭇한 마음이 가득 차서 때론 서글픔이 밀려와서 자주 책뚜껑을 덮어야 했던 시집. 여리게 푸른 표지가 마음을 차분하게 보듬는 <그대로 둔다>의 마지막 쪽을 넘깁니다.

나에게 있어 그대로 둘 것,

세상에 있어 그대로 둘 것.

그대로 두어야 더 아름다울 수 있는

무언가를 하나둘 떠올려 봅니다.

다시 시집을 펼쳐 보며

다시금 눈에 안기는 시 하나,

‘어린아이처럼’.

그래, 이거야!

팔십 년 넘어도 변하지 않는 이 마음, 이 삶부터 그대로 둘 수 있다면, 복잡하고 팍팍한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살아갈 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될 것만 같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농사일 따라다녔다는 느릿재 할머니는 올해 여든이시다 농사 경력 팔십 년이다. 팔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생기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생기고 공기청정기와 로봇이 생겼다. 그런데 팔십 년이 지난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밭에만 가면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야야, 무시 싹 올라왔다야! 얼른 와 보거래이!”

_‘어린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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