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3월, 직장 산악반에서 지리산 반야봉(1732m)과 노고단(1507m)을, 1992년 1월 민주노총건설을 도모하던 시절 세석평전(1600m) 다녀 온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가끔 종주만 꿈꾸었을 뿐 바쁜 시간에 쫓겨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항상 그리움의 산이었다. 그러다 10월 중순 설악산 대청봉을 다녀 온 뒤 용기를 냈다. 겨울이 오기 전 당일치기로 백무동에서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1915m)에 오르기로 했다.

오전 8시쯤 고속도로 지리산 IC를 빠져나와 산내면을 지나 백무동에 도착했다. 산 위는 단풍철이 지났는데 깊은 계곡을 따라 단풍나무들은 여전히 붉은 색깔을 뽐내고 있다. 당일치기에다 해가 빨리 지는 늦가을 산행이라 하산하는 시간을 감안하여 하동바위를 거쳐 장터목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 조금 오르자 단풍은 거의 다 지고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있다.

등산로는 편편한 돌로 잘 정비되어 있어 오르는 데 무리는 없다. 1300m 고지를 지나면서 등산로를 양쪽으로 산죽 군락이 펼쳐진다. 산 아래쪽은 따뜻했는데 계곡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장터목대피소에 이르자 강풍으로 변한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등산객도 많지 않아 매우 한가롭다. 몇몇이 식사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반대편으로 중산리쪽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도 보인다.

장터목에서 힘겹게 세석봉을 오르자 뒤쪽으로 천왕봉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저기 고사목이 팔을 벌려 푸른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통천문을 거쳐 천왕봉에 오른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날씨는 청명했고 지리산은 웅장하면서도 포근했다. 투쟁사업장지지 인증샷을 찍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지리산은 3개도 5개 군에 걸쳐 있고, 1,500m 이상 10여 개, 1,000m 이상 20여 개의 봉우리를 품고 있다. 종주는 못했지만 반야봉, 노고단에 이어 30여년 만에 천왕봉까지 지리산 3대 고봉에 오른 셈이다. 우뚝 서 있는 반야봉과 삿갓모양의 노고단이 멀리 보이고, 하늘 아래 지리산 자락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다.

차가운 바람에 손이 시려온다. 오후 3시쯤 되자 등산객들도 모두 하산하고 정상에는 아무도 없다. 까마귀들이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정상 주변을 활공한다. 하산시간에 쫓겨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다시 장터목을 거쳐 백무동쪽으로 향한다. 오후 6시쯤 어둑어둑한 시간에 손전등을 켜고 마무리 하산을 한다. 한 두 식당 외에는 불이 꺼져 있다. 컹컹 개들이 짓는 소리 들린다. 지리산은 어둠 속으로 묻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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