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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그날따라 숙대입구역에서 남영역으로 내려가는 길바닥이 한참 질어져 있었다. 그날만 그렇고 보통 날들은 추웠던지, 아니면 대개 따뜻했던지는 모르겠다. 누구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그해 여름을 입에 올리면 모두가 지독했더라고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겨울이 어땠는가는 아는 사람이 없다. 본래 겨울이 스스로의 자취에 미련스러운데도 그렇다. 눈 녹은 자리는 응달에 기대 삼사월 오래도록 질척이지 않던가. 되려 눈 자국 꺼매지는 것이 볼썽사나워서일까. 우격다짐으로 흔적을 남기려는 겨울 끝자락의 습성이 지긋지긋해서라면 그 역시 고개를 주억거릴 만하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국어 과목의 ‘가정교사’ 자리의 면접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따뜻하던 2018년 연말 남영동. 겨울이 된 것은 그해 여름이 정신없이 지난 다음이었다.

나는 2년 동안 주말을 바쳤던 학회에서 나오게 되었다. 세미나보다 뒤풀이가 더 중요한 동아리 생리에 줄기차게 반대하다 학기 마지막 날 회장 선거에서 낙선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겪은 실패에서 조금도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학회에 남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간부들은 OB들을 끌어모아 투표장으로 모셔왔다. 형들 내가 거물은 거물인가 봐, 그날 밤 나를 배웅하던 ‘지지자’ 소수에게 너스레를 떨던 기억이 난다. 다소간 연민하는 눈으로 따라오던 발걸음들도. 원래 빌런은 스스로가 빌런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 법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를 달갑지도 않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든 내 이십삼 년이 갸륵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스타트업을 나온 다음 휴학을 했다. 일단 돈을 버는 일이 급했다. 공덕동 스타벅스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상수동 집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형들은 그들 본가와 가까운 안양으로 이사한다고 했다. 나가라는 얘기였다.

수원에서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을 때쯤 목동의 학원에서 강사 제의를 받았다. 고맙게도 홈페이지에 ‘대표 강사’ 타이틀을 달아준 조그만 학원이었다. 사회탐구라면 어느 과목이든 닥치는 대로 맡다 보니 한 달에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이날 보기로 했던 면접이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여름보다 훨씬 사정이 나아졌고, 목동에서 하는 수업을 준비하려니 시간적 여유가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해야 했다.

 

나는 가을에 이별했다. 처음으로 의지에 반했던 아픈 상실이었다. 텅 빈 날들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 곧 잊으리라 생각했다. 일 년에 한두 번 꼭 겪던 그제까지의 이별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지금이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잊히지도 않았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눈을 감을 때마다 여름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하루를 꽉 채워 보내고 쓰러져 잠들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감은 눈에 밀려드는 자괴감을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묻어버려야 했다. 최선을 다했다. 함께한 일이 있어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라면 근처라도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지하철역을 지나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 표지판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나는 합정역도 상수동도 공덕동도 혜화동도 신촌 로터리도, 심지어 친구들과 모여들던 동네 카페도 갈 수 없었다.

내가 정말 무서워하던 것이 있다. 붐비는 길을 걷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더럭 그 친구가 떠오르고는 했다. 동그란 얼굴로 끝을 가볍게 말아 넣은 단발머리와 나보다 딱 한 뼘 작았던 키는 어딜 가도 있었다. 그런 외양은 모든 감각을 돋우는 기억을 끄집어냈다. 함께 아침을 맞고 집에 갈 때 고데기를 못해 뻗친 머리를 부끄러워하며 웃던 얼굴, 와락 껴안으면 한 손에 가볍게 들어오던 부드러운 뒤통수 같은 것들. 우리가 그러던 순간에 목덜미에서 배어 나오던 비누향이 그다음으로 와닿았다. 그러면 서로를 보다듬었던 부드러운 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난하고 우울하고 미지근해서 더 떠올리기 비참한 여름날들이 다가와 나를 미치게 했다.

그리하여 그런 대증요법은 부질없었다. 스무 살 이후 만들어진 세상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일 뿐이었다. 오히려 취한 날 청승맞게 훌쩍이며 집으로 돌아오던 것은 비밀도 아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꼭 어딘가가 무너진 채였다.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노래는 없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정말 내 얘기 같았고, 어떤 노래처럼 앞날을 빌어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음이 잦아들어야 현관문을 열곤 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엄마의 걱정을 사지 않도록.

그해 말까지 삼 개월 내내 그 꼴이었다. 무엇보다 피하고 싶던 그 감정 소모였다.

그러던 날들이었다. 뭔가를 해야 했다. 그 딱한 ‘나’를 마음속에 쑤셔 놓고 남영역으로 ‘가정교사’ 면접을 보러 온 것이다. 오 년 차가 되어 가는 과외선생으로서 자의식에 지식노동자라는 허울을 욱여넣고 돈을 버는 것. 그것은 옛 동아리 친구들을 불러 모아 공모전에 도전하고,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밤새 노트북을 두드리고, 광고회사의 인턴 공고에 포트폴리오를 넣고. 열심히 사는 척 변죽을 두드리는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면접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자기 PR이란 자신있었다. 스스로를 포장하며 자존감을 가짜로 높여 놓고, 급여는 시간당 얼마일지를 가늠하며 다시 지하철에 오를 요량이었다. 또 그날은 다행히 술 약속이 없었다. 간만에 조금은 점잖게 귀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좀 다르게 흘러갔다.

 

‘면접을 두 명이서 봐도 좋을까요?’

이르게 도착해 시간을 때우려니 면접관이 문자를 보냈다. 수업을 받을 고등학생의 누나라고 했다. 비교 대상이 생긴 것 같아 긴장했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면접장은 남영역 굴다리 옆 크리스피크림도넛 2층이었다. 정말로 면접관과 또 다른 면접 대상자가 나와 있었다.

그녀는 2018년 치고는 참으로 보기 드문 차림을 했다. 옛날 성시경 뮤직비디오 산골 분교 여선생 같았다고 할까. 회색 스웨터 가디건과 누런 목도리 차림, 머리를 거의 쪽진 얼굴에 화장기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별 후 룩북을 뒤져가며 옷을 사 입고 그날도 니트-슬랙스라는 포멀한 차임에 BB크림을 펴 바르고 와서 입장 전 화장실에서 퍼프로 얼굴을 두드리고 온 내가 보기에는, 어휴, 수수하고 순박하시군요. 하지만 제가 벌써 이긴 것 같네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온 나는 자기소개에 이런저런 과외, 강사 경력과 이항대립이 어쩌구 비문학 트렌드가 어쩌구 하는 말들을 지껄였다. 물론 국어란 가르쳐 본 적도 없는 과목이었다. 그럴 듯 하지만 내용은 없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산골 선생님은… 사촌동생을 일 년간 가르쳐본 게 경력의 전부라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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