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함께 있어도 홀로 (1)

→ #16. 함께 있어도 홀로 (3)

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도넛 가게 창밖에는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면접관은 자기가 사서 준비해놓은 도넛 두 개에는 하나도 손을 안 대고 우리 이야기를 경청했다.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말답게 우리가 학생의 멘토가 될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의 어린 시절, 전공, 진로 계획, 가족사 등 인생 전반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

수십 번은 아니지만 십수 번은 되는 강사 면접 자리 경험에 의하면 이건 함정이었다. 여기서 쓸데없이 감상에 젖은 소리로 빠지면 이름에 가위표가 쳐진다. 학생의 공부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본인을 꾸밀 수 있을 만한 말만 골라야 한다. 나는 그 조건에 충분하면서 일견 흥미로운, 이를테면 연합 광고 동아리 간부, 스타트업 인턴, 광고매체 인턴, 학원 강사, 전공은 연극연출 따위의 경력을 꺼냈다. 면접관은 정말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되돌려줬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옆의 그 순진한 누나-산골 선생님-가 그보다 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 개소리에 호응하고 있었다.

“와 진짜 다양한 경험 많이 하셨네요.”
“아 예, 그런가요, 하하.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지만요.)
“저는 다큐멘터리 연출 공부하고 있어요, 대학원에서.”
“오…”

그녀가 내 얘기에 집중할수록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연출 공부라니. 연출을 전공했다지만 학교에 다니는 내내 연극에서 도망 다닌 기억뿐이었다. 깊은 얘기로 들어가면 밑천이 금방 드러날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경력’이랄 것이 그랬다. 또 한 가지는, 대화의 흐름상 “그럼 앞으로는 뭐 할 생각이세요?”가 나올 타이밍이었다는 것이다. 그 질문을 던진 건 면접관이었다.

“네… 로빈 윌리엄스 아세요?”

 

어영부영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진눈 흩어지는 문밖에서 노란 털목도리의 그녀가 나를 불러세웠다. 가만 보니 위에 걸친 코트는 좀 트렌디하시네. 매장 출입구 위에 달린 노란 조명등 밑에 서니 좀 다르게도 보이는 얼굴이었다.

“제가 캐릭터를 수집하고 있어서요.”
“캐릭터요?”
“되게 재밌게 사신 분 같아서, 전화번호 한 번 여쭤봐도 될까요? 연락드릴게요.”

대답은 당연히 “네”였다. 집으로 오는 내내 면접 합격 여부보다는 종교단체 소속이 아닌 여성에게 전화번호를 준 이 기이한 일에 대해 생각했다. 트렌디한 코트 밑 다시 당황스러운 잿빛 통치마가 신경 쓰였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내가 번호를 물어본 적은 많은데,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은걸? 기도 안 차는 자존감 회복탄력 메커니즘을 뇌에서 돌리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정말로 얼마 뒤 나에게 연락했다.

우리는 맑은 날 충정로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서울역 근처에서 보기로 했는데, 서울스퀘어나 시청 앞은 작년 그 친구와 함께였던 곳이라 피했다. 그렇지만 마침 나는 그해 여름 공덕오거리 스타벅스에서 일하다 한 달 만에 녹색 에이프런을 벗어던진 근과거를 갖고 있었다. 지저분한 기억이란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았다.

도착하니 그녀는 정말로 테이블에 질문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며칠 전 남영동과 거의 비슷한 차림이었다.

“진짜로 연락하셨네요.”
“그럼요, 그런데 원래 충정로를 좋아하세요?”

이렇게 물어오는 악의 없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였다. 그건 별로 솔직하거나 선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양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서울역 앞에서 다른 델 소거하고 남은 데가 여깁니다.) 근데 여기 되게 바쁘네요. 제가 여름에 스타벅스 파트너 잠깐 했었거든요. 되게 힘들 텐데.”
“우와, 그런 것도 하셨어요? 지금은 안 하세요?”
“네.”
“왜 그만두셨어요?”
“네… (그때는 학원도 과외 일도 하나도 없었고 스타트업 인턴을 했다가 창업주 넷 중 둘이 회사를 나가 회사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고요, 일도 못하고 월급도 못 받는 개 같은 상황에서 다른 곳에 취직하여 여자친구가 더 많이 내던 데이트비용을 안전하게 조달하기 위해 취직했는데 금방 헤어져 버렸고요, 딴 생각하느라 일도 실수 연발이었고 걔가 앞에 찾아와 날 기다리고는 했던 데라 모든 게 꼴 보기 싫어져서 퇴직한 겁니다. 그래도 돈은 많이 받아서 역시 머슴을 해도 대감집에서 머슴을 하는 게 옳다는 걸 깨달았죠. 됐나요?!) 학원 일이 마침 생겼거든요.”

왜 나는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을까. 추측만 해 볼 뿐이다. 분명 사실이긴 하지만 진실은 아닌, 솔직하지 못한 얘기를 그날도 적당히 앞세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던지는 질문들은 뜻밖에 예리했다. 아니, 질문만 놓고 보면 두루뭉술했다. 본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어떤 일을 할 때 즐겁냐, 미워하는 사람이 있냐, 따위의. 지금 그녀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그녀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는 사실과 신 앞에 매우 겸허한 인물이었다는 것, 본인의 아픈 경험을 암시하며 그렁그렁해졌던 눈동자 같은 것들이다. 그녀 앞에서 솔직하지 않는다면 정말 나쁜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는 것도.

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성격도 안 좋고… 아뇨 진짜입니다… 남들 시선 되게 의식하고요. 이런 식의 객쩍은 자아비판이 흐르게 되었는데, 면접 때 그녀가 감탄했던 그 장황한 경력들이 사실은 그냥 다 텅 비어있는 거라는 고백도 했다. 얼마 안 되어 나는 술술 과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재수 생활 끝에 들어온 학교, 하지만 나는 절실하고 재능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책상물림일 뿐이었다고. 섣부르게 정의로운 체했으나 감정을 돕지 않는 식은 열정이 부끄러웠다고. 그래서 학교에서 도피했고, 돌아갈 수 있을까 기껏 밤새 키보드를 두드려 가져간 창작극은 연습에 들어갔지만 석연찮게 엎어졌다고. 그대로 도망간 곳은 광고였다고. 하지만 내 손으로 만든 광고 기획서는 몇 편 되지도 않으며 작은 공모전이나마 입상한 일도 없었다고. 구차스럽게 창작이란 막연한 꿈을 다 놓지는 못했다고. 구상만 수십 편을 했지만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고. 그나마 돈벌이를 한다던 강사 자리는 기껏해야 목동 시장통이나 신도시 구석에서 일이 년 동안 너댓 명 짜리 몇 개 반을 맡았을 뿐이라고. 과외도 마찬가지라고, 수업에 쓴 시간보다 서울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왕복한 시간이 더 많을 거라고. 창업 팀 인턴은 고작 몇 달 뿐이었고 심지어 못 받은 월급 때문에 창업주들과 이젠 연락도 하지 않는다고… 남김없이 스무 살에서 스물셋이 그렇게 갔다고…

이유야 어쨌건 속내 한구석에 밀어 넣고 들추고 싶지 않았던 진실들이었다. 가끔 불쑥 자각의 형식으로 찾아와 나를 괴롭히곤 했던. 그래서 놀라울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내놓지 않았던 진짜 얘기를, 이성에게, 그것도 최초로 내 전화번호를 가져간 사람에게 하다니.

이내 그녀에게서 이런 질문도 들을 수 있었다.

“왜 헤어지셨어요?”

당연한 듯 그 이야기를 해야 했다.

얼마 전 헤어진 친구는 웃음이 많은 아이였다고. 그리고 어떤 남자아이든 웃음 짓게 만들 수도 있었다고.

 

 

 

계속


 

목록보기  instagram

 

 

Comment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