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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토요일 두 시마다 세미나를 여는 학회에서 그 아이에게 반한 건 그해 사월이었다. 하얗고 동그란 얼굴과 웃을 때 남김없이 초승달이 되던 큰 눈에 항상 미소가 일렁였다. 이른 봄의 신열을 못 버린 누구의 서툰 마음쯤은 얼마든지 허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 위로 토요일 낮 노란 봄볕이 시리게 부서지고는 했다. 해가 비추면 어쩐지 더욱 하얘지던 화장기 아래 흐르던 발그레한, 킬커버나 입생로랑 팩트로 숨길 수 없는 풋기가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했다.

언젠가 세미나에서, 그 아이는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에 스스로를 열정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모든 일에 열정을 쏟아낸다며. 열정이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항상 생글거리던 시옷 자 입매에 숨겨지지 않는 그늘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것이 나와 닮은 구석은 아닐까. 어른스럽기를 자처하던 나의 어린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해졌고, 이내 좋아졌다.

그녀는 정말로 밝고 당차고 열정적이었다. 지방에서 홀로 올라와 오롯이 혼자 벌어 학교에 다니고 집세를 냈다. 학교에서 돌아와 과제를 마치면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고, 주말에는 동아리 세미나에 참석한 뒤 다시 카페에서 야간을 뛰었다. 비슷하게 바쁘고 비슷하게 피로했던 우리는 낮에 만나면 한숨 자고 저녁에 데이트를 시작하는 날이 많았다. 스물두 살 여자애가 혼자 지기에는 무거운 듯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버릇처럼 힘들다는 말을 꺼낼 만큼 어리지 않았고, 스트레스와 피곤을 짜증이나 넋두리로 쉬이 바꿔 남자친구의 감정을 소모하지도 않았다.

사귀기 전 함께 술을 마신 날이 있었다. 그때 손을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손가락 밑에 작은 굳은살이 배겨 있었고 손톱은 바짝 깎여 있었다. 그녀에게도 돈을 버는 일이란 손에 옹이가 지도록 하는 일이었고, 분김에 주먹을 꽉 쥐어도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지 않을 것이었다. 아닌 척 그다음을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아이였다. 취했던 나는 이렇게 물었다. 웃음이 많은데… 그거 다 진짜니? 역시 취했던 그녀는 골몰하듯 내민 입술을 달싹이다 거두었었다. 그녀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그때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던 그늘.

우리가 한창 서로에게 빠져 있을 때 난 그걸 포착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아이가 나에게 의지하기를 바랐다. 네 피로한 그늘을 지우진 못하겠지만 내가 안락한 그늘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라면 모든 걸 열어놓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인 척하기에도 나는 너무 어렸다.

그녀에게 기댄 채 스물셋을 흘려보내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문제의 일단은 가난이었다. 봄과 여름 동안 스타트업에서 숱한 일을 겪으며 고전하는 동안 나는 사실상 무일푼에 가까웠다. 돈을 빌려 휴대폰 요금을 내고, 다음 달 납기일에 연체될 후불 교통카드로 간신히 통학하고, 선물 받은 기프티콘을 팔아 밥을 사 먹던 시기였다. 기어이 휴대폰이 정지되면 학교와 집과 일터를 오가는 중에는 그녀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메시지를 몰아서 확인하던 날도 여럿이었다. 연체된 휴대폰은 수신만 가능했다. 그녀가 먼저 전화하기를 기다리며 왜 답장이 늦냐고 물어볼 그녀에게 둘러댈 변명을 궁리하는 것은 곱씹을수록 비참했다. 오월부터 시월까지 거의 모든 데이트에서 나보다 그녀의 지출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은 나를 정말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몰려올 때마다 상수동 앞 양화대교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전화를 끊기고 주머니는 텅 비었을 때 그나마 멀쩡하던 것은 휴대폰 속 음원들과 이어폰뿐이었다. 일렁이는 한강 물을 멀거니 보면 콧등이 꼭 시큰해 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난 삼 년간 했던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 돈도 여유도 없이 막연한 꿈에서 도망가 또다시 막연한 곳에서 시간만을 팔았다. 그러나 사다 모은 건 열등감, 자기연민, 자괴감, 그리고 빌어먹을 궁핍뿐이었다.

피로한 것은 그녀도 매한가지였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만났다. 막판의 몇 번 데이트에서 선명한 것은 술을 마시다 졸고는 하던 그녀의 얼굴이다. 같은 처지란 걸 알면서도 그게 참 미욱했다. 날 만날 때마다 피곤해하지 말고 일을 줄여라… 전에는 하지 않던 타박과 얼빠진 충고를 했다. 내 열패감과 피로감이 그녀에게도 곧장 전해지던 것이다. 새된 목소리로 그럴 때 그녀의 기분이 어땠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처음 가졌던 설렘은 뒤로 물러나고, 그녀는 점차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아니라 내가 붙잡고 있던 마지막 무언가가 되었다. 이상한 건, 내가 힘들수록 나는 그 힘듦을 그녀에게 모두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변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만은 그러고 싶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내 오래된 컴플렉스의 근원을 –원치 않았겠지만- 다 들었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열한 살 때의 트라우마들,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얄궂은 장면들. 우스운 건 그런 말을 내뱉고 나서 꼭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서운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녀는 무거운 이야기에 섣부른 감정을 내지 않으려는 것이었지만, 나는 곧장 동정받지 못하는 것에 아이처럼 투정했다. 나는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내가 걷잡을 수 없이 그늘지고 예민해지던 어느 날, 나는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그녀의 친구와 셋이서 만난 자리가 발단이었다. 나는 여자친구보다 그 친구에게 훨씬 더 집중했다. 대화도 농담도 그쪽을 향했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 애처로운 광대쯤으로 여기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녀의 친구이니 잘 보이고 싶기도 했지만, 농담으로 존재를 증명해 온 근성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그녀는 자리가 파하고 서운해했는데 여기에 화가 난 것이다. 나는 나다운 모습으로 노력했을 뿐이니까. 원래 그렇게 남들을 즐겁게 해온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했을까? 지금 적어놓고 보면 최악의 자기연민이지만, 그때 최선을 다해 짜낸 방어기제는 그랬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아마 면목동 아파트에서 연필깎이를 집어 던졌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끝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이별을 고할 때, 나는 우습게도 미안하다고 했다. 못 해준 게 너무 많아서 미안하다고. 나는 끝까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몰랐다. 그 아이는 그 말에 조금의 웃음도 남기지 않았다.

그랬다. 분명히,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아, 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날로부터 오랫동안 마주하게 된 것은 그녀를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화를 참지 못하는 모습이야말로 너무나 익숙하지만 피하고 싶었던, 진짜 나다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산골 선생이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술술 지껄였다. 늦여름의 미지근한 추억이 너무 괴롭다… 울먹이기도 했고, 말하다 숨이 막혀오기도 했다. 대화를 시작할 때는 낮았던 목소리가 어느덧 콧소리가 섞여 못나졌다. 말을 잇다 보니 더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다시 확인한 내 허물에 한 번, 그리고 희한한 후련함에 한 번. 그녀는 내 얘기를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랑 헤어지면서 본인의 이십대가 다 밀려오셨을 것 같아요.”

그랬다. 범박하고 비루한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이 그녀가 떠남으로써 완벽히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삼 년 동안 학교로, 광고 학회로, 신도시와 주택가의 학원으로, 중산층 아파트의 과외교사로, 스타트업 사무실과 스타벅스와 파출부를 뛰던 백화점으로, 나는 향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배회했을 뿐이었다. 흐릿한 것을 쫓기만 했고, 그 가운데 운 좋게 만난 단 하나의 실재였던 그녀가 사라지자 나는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되게 많이 생각하시네요.”
“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힌 내게 그녀는 다시 말했다.

“자기성찰이요.”

그녀의 순박한 눈은 고맙게도 칭찬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그건 사실 나를 뼈아프게 뚫는 말이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에 대해 뭔가를 하긴 하는데, 결국은 그게 아닌 나를 위해서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서울역으로 가는 중림동 내리막길과 돌아가는 일호선에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이제는 자존감 회복이 아니라 다른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구나.

나는 함께 있어도 홀로 생각하는 놈이구나.

그날 오랜만에 맨정신으로 돌아온 내게 엄마가 물었다.

“여자친구 만나고 오니?”
“헤어진지 좀 됐어.”
“왜 헤어져?”
“성격이 안 맞아서…”
“걔가 성격이 좀 모났나 보지?”
“모나긴 내가 모났지.”
“니가 뭐가 성질이 모가 나?”
“아버지 닮아서 그렇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방에 들어와 한참 울었던 기억이 선하다.

 

그 산골 선생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몇 날 동안 충정로 스타벅스에서 나눈 대화를 반추했다. 한참 뒤, 어느 날부터인가 어떤 단발머리와 소담한 키와 동그란 얼굴에도 그 친구의 향기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그녀의 잔향이 떠오르지 않던 날. 그날 이후 나는 다시 먼 기억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그때까지 나의 겨울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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